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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n 21. 2022

161209-01

스크린도어에 낀 남자



지이이잉~~ 지이이잉~~   

  

눈을 감은 채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알람을 끈다. 월요일 아침 6시 20분. 어제 새벽 3시까지 보고 자료를 만드느라 눈도 뜨기 힘들고 어깨는 내려앉았지만 6시 55분 지하철을 타려면 뭉그적 거릴 여유가 없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빠른 걸음으로 8분. 지하철을 타고 약 55분 동안 27개 역을 지나면 회사가 있는 역. 그 역에서 회사까지 다시 빠른 걸음으로 5분.


1년 전 오너가 여성으로 바뀌면서 전체적으로 야근과 술자리는 줄었지만 대신 아침 일정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때 바뀐 우리 부서의 팀장은 보고 자료와 회의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었다. 매주 월요일 오전 9시, 전체 직원회의에서 각 팀장들이 오너에게 지난주 실적과 이번 주 계획 및 예상 실적을 보고하는데, 그것을 위해 우리 팀은 매주 월요일 오전 8시에 별도로 회의를 하고, 그 팀 회의를 위해 일요일 밤에 2~3시간씩 노트북 앞에 앉아있어야 한다. 팀원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고 나만.      


우리 팀에서 보고자료 즉, PPT를 만드는 것은 나의 담당이다. 금요일 퇴근 전에 팀원들이 각자 맡은 거래처의 최근 1주일의 실적과 다음 1주일의 계획 및 예상 실적을 공용 파일에 업로드해 놓으면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금요일 저녁에 회사에서 아니면 주말에 집에서 PPT로 작업을 해 팀장에게 보낸다.


주말부부인 팀장은 금요일 퇴근 후부터 일요일 밤까지 꼬박 48시간을 대전에 있는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보낸다. 빠르면 일요일 저녁 8시, 늦으면 밤 11시 정도에야 내가 보냈던 PPT를 훑어보는 팀장은 전화로 아주 상세하게 수정해야 할 내용을 지시한다.


어찌나 상세한지 통화 내용을 녹음해서 들으며 작업을 할 정도이다. 그래프의 순서나 배열은 기본이고 그래프의 크기나 모양, 세로축의 단위, 그래프 제목의 폰트, 글자 크기와 색상에 이르기까지 듣고 있다 보면 “저에게 말로 설명할 시간에 직접 수정하세요.”라는 말이 입술 끝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하지만 팀장은 딱 워드와 엑셀까지만 다룰 줄 알았지 PPT는 손도 댈 줄 모른다. 하지만 만질 줄은 모르면서 전체를 보는 안목과 미적인 감각은 있어 팀장의 말대로 수정한 PPT와 처음의 PPT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수정한 것이 훨씬 더 눈에 잘 들어오면서도 깔끔해 보이기는 한다.


몇 차례 팀장의 수정사항을 반영하면서 일요일 밤마다 팀장과 통화하고 수정본을 보내서 다시 확인받는 절차를 없애보려고 초안을 만들 때 팀장의 스타일로 만들어서 보내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정사항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초안을 만드는 데 시간이 더 걸려 결국 내가 PPT를 붙잡고 있는 전체적인 시간만 늘 뿐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초안을 만드는 데는 큰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요일 운 좋으면 저녁 9시 아니면 밤 12시에 꼼짝없이 노트북 앞에 앉아 PPT를 손봐야 했다.    

  

9시 전체 직원회의 전 8시 팀 회의에서는 팀장이 지시하고 내가 수정한 PPT를 다른 팀원들과 함께 보며 혹시 더 수정해야 할 부분이나 보완해야 할 내용이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점검한다. 이때 누구라도 팀장의 손 아니 머리를 거쳐 완성된 PPT에 대한 칭찬을 하지 않으면 그날의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진다. 하지만 이때 그의 손이 되어 실제로 수정을 한 나의 일요일 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사항이다.


어쨌거나 주말 동안에 실적이 변동하는 일이나 잡혀있던 일정이 변경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회의는 10분이면 끝난다. 그 뒤로는 각자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를 공유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그 얘기를 꼭 월요일 아침 8시 10분에서 9시 사이에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팀장에게 월요일 팀 회의를 30분 아니 10분만이라도 늦추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없다.   

   

어제는 팀장이 대전에서 좀 늦게 올라왔는지 12시가 다 되어서야 전화를 했고,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수정을 하고 다시 컨펌을 받고 3시에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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