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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Jun 24. 2022

161209-04

스크린도어에 낀 남자



어쨌든 그 여자든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싶어 새로운 고통을 감수하며 고개를 180도 가까이 오른쪽으로 돌려봤지만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사람들의 뒤통수도 보이지 않았다. 출입구에서 조금 옆으로 이동한 지하철 덕분에 누군가가 지하철 문에 눈을 대고 밖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지금 이 상황이 지하철 안에서는 안 보이게 된 것이다.     


항상 만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면서 나와 같은 칸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고 눈빛도 주고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외롭다거나 우울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한발 물러서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고 했던가. 지금 이렇게 항상 있던 공간이 아닌 처음 머무는 공간에서 나를 바라보니 참으로 고독하고 불쌍하고 처참해 보였다. 과연 이러한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기장이 지하철 문에 끼었거나 지하철과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인 것이 사람의 발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신발이나 큰 가방 같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지하철을 최대속도로 높인 후 출발시키면 내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이 났다.     

 

역사물에서만 보던 옛날 사람들은 너무나 잔인하다고 여기게 만들어 준 능지처참의 고통을 현대인을 대표하여 느끼게 되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손이나 발 중 어느 것 하나를 포기해야 하나. 그렇다면 손을 놓고 지하철에 왼발이 끼인 채로 선로 위를 끌려가다 머리통이 깨지는 것보다는 한쪽 발목을 포기하고 스크린도어에 딱 달라붙어 있다가 지하철이 지나가면 잽싸게 선로 밑 공간에 대피하는 것이 나으려나.     

 

그 어느 쪽도 실천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살려달라고. 여기 사람 있다고. 지금 출발하면 안 된다고. 청소년 시절, 가위에 눌렸을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쳤는데 바로 옆방에 있던 엄마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고 했을 때 느꼈던 오싹한 공포가 추가되었다. 아무도 내 소리를 못 들은 것처럼 지하철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때 새로운 가능성이 추가되었다.      



지금 여의도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다음 열차 기장에게 전달이 안 되어 여의나루역을 조금 전에 출발한 지하철이 이미 여의도역에 도착하기 직전이라면. 어쩌면 나 때문에,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5호선이 충돌하는 사고로 출근하던 직장인들과 등교하던 학생들과 무고한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한다면?


그런 충돌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나도 충돌의 여파로 죽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죽게 되는 것은 즉어가면서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맘 같아선 소리만이 아니라 주먹으로 지하철을 쾅쾅 치고 싶었지만 지금 한 손을 놓으면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나의 몸의 균형이 깨질 것 같아 소리만 더 크게 질렀다.


아까는 정말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내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이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나의 구조요청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졌는지, 사람들이 일어나고 웅성웅성 대고 희미하게 누군가 기장과 얘기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일단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지한 것만으로도 이대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 채 죽지는 않겠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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