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4일의 나
나는 잠잘 때 얼굴을 가리는 버릇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이 무섭다.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 술을 마시는 것은 나 자신을 잊기 위해서다. 나 자신을 잊기 위해. 알코올성의 고독을 몰아넣는 것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고독한 글쓰기
몇 달 전 좋은 동료이자 친구이자 동생이자 언니 같은 지인에게 책 한 권(삶을 바꾸는 책 읽기, 정혜윤 지음)을 선물 받았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괜히 툴툴댔지만 나를 위한 선물을 준비한 지인에게 마음 깊이 감사함을 느끼며 그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빨리 책을 읽고 소감을 전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와 당장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 형식의 글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속도가 안 붙었다. 재미가 없거나 지루해서가 아니라 얼핏 보면 쉬운 것 같은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게 느껴져서였다.
책이 잘 읽히지 않으면 작가 소개나 해설을 먼저 보곤 하는데, 작가 소개를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니 익숙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이 작가 10여 년 전에 이미 다른 작품을 통해 내가 만나봤던 사람이었다. 내가 예전에 읽었던 작품의 작가의 신간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우연에 기뻐하며 다시 책 읽기에 속도를 내보았다.
선물 받은 책을 다 읽고 바로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역시나 접어놓은 페이지가 꽤나 많았다. 20대 후반의 나와 지금의 내(30대 후반)가 같은 책을 읽고 받아들이는 느낌은 얼마나 비슷할지 아니면 얼마나 다를지 스스로 기대하며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
중간중간 마음의 여유를 앗아가는 일들로 인해 다시 읽기를 끝내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이 있는 부분을 접어놓고 다 읽은 후 그 부분을 워드로 입력해 컴퓨터 파일로 저장하는 일도 이제야 끝이 났다.
보통은 워드로 입력하면서 접어놨던 페이지를 펼치곤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여전히 접혀있는 페이지가 많다. 아마도 또 10년 후쯤, 40대 후반에 다시-다시 읽기를 하게 될 것 같다. 그때까지 내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면 이 부분에 조금 더 정리된 소감을 추가하고 싶다.
오늘은 글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소감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나를 조금은 아는 사람들이 보는 나는 그리고 내가 보는 나는 “시니컬한 줄 알았더니 뜨거운, 안 할 줄로 알았는데 하는, 관심 없는 줄 알았지만 관심 있는, 쿨한 척하지만 찐득찐득한, 무정한 줄 알았더니 껴안아주는, 다른 줄 알았는데 닮은, 혼자인 줄 알았는데 옆에 있어주는” 까지는 도달한 것 같다.
그런데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호통치면서도 존중하고, 경멸하면서도 끌어안고...” 까지는 아직은 힘들 것 같다. 특히나 맨 마지막, 경멸하면서도 끌어안는... 은 정말이지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경멸’이라는 감정까지 가지 않더라도 나와 조금 맞지 않는다 싶으면 굳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게 된다. ‘나와 잘 맞고 만나서 기분 좋은 사람들과 보낼 시간도 부족해’라며 스스로 벽을 만들어 거리를 두곤 한다. 그리고 티는 안내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느새 나와 맞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판단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어쩌면 ‘나’는 열려있는 사람이고 허용적인 사람이며 상식적인 사람이라는 그래서 그런 ‘내’가 불편하거나 못마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폐쇄적이거나 융통성이 없고 비상식적인 사람이라는 착각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만난 인생 선배 중 한 명은 ‘나는 왜 책을 읽는가?’를 항상 스스로 생각하며 책을 고른다고 했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나는 ‘현재의 내’가 아닌 ‘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보다 나은 나의 모습에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호통치면서도 존중하고 경멸하면서도 끌어안는 모습을 채워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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