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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권형 Mar 09. 2017

인천에서 나의 문화 예술 정체성 찾아가기


2014년 3월 4일 스페이스빔 비평지 [시각] 기고


 지금(2017년 3월)으로부터 3년 전 기고한 글입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음악을 시작하던 시기의 기억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스스로를 음악가로 정체화하지 않았던 시기입니다. 영화에 빠져있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영상을 보고 음악을 시퀀싱하는 감각에 영향을 주고있지 않나 싶습니다. 펑크라는 유령은 저에게 좋은 스승이었고 자립의 기조와 문화재단의 청년지원사업은 지역 문화를 접하기에 괜찮은 교두보였습니다. 그때 저에게 인천(지역)은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1. 소개
 민운기 선생님의 제안으로 『시각』지에 제 얘기를 꺼낼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뜬금없이 동네에 나타나 뭔가 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셨던 것 같습니다. 민 선생님은 글쓰기를 제안해주시면서 지나가는 말로 저에 대해 좋은 의미로 ‘넘나든다’는 표현을 해주셨는데요. 나쁘게 말하면 그런 애매한 저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실 그런 건 신경 안 쓰고 지금껏 지내 와서 뭐하는 분이냐는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 아직 어색합니다. 처음에야 열과 성을 다해 일일이 설명하고는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기가 구차하고 창피해서 집중하고 뭔가 할 때도 됐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이런 글을 통해서라도 제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도 저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좋게들 봐주신 분들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잘 정리된 글은 아니겠지만 기회가 됐으니 제 얘기를 구구절절 풀어보겠습니다.


2. 학교

 7살 때 이사 와 12년간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진학할 때마다 저마다의 꿍꿍이가 있어 일부러 학교를 멀리 다녔습니다. 같은 인천이라도 통학 거리가 있다 보니 긴 등하교 시간동안 음악을 듣고 동경하는 게 저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입시라는 명분으로 제한된 학교 체계 안에서 나름 저의 흥미를 찾아 접점을 찾아갔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때마다 재밌을만한 무대를 기획하고 선보였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반응이 좋아서 다소 호전적인 성격임에도 원만하게 생활하면서 그 기세로 저만의 흥미를 주체적으로 찾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같이 음악 얘기 하던 중학교 동창과 밴드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재밌는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게 제가 음악을 하게 된, 또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계기였죠.


3. 펑크

처음 송내역 합주실에서 합을 맞추는데 성공했을 때의 환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만, 제 생애 첫 번째 밴드는 공연 한 번 못해보고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때 만난 친구를 통해 접하게 된 펑크(Punk)의 문화와 태도는 아직까지도 제 근간이 되는 힘이 아닌가 합니다. 적어도 저에게 펑크란 ‘누구나 할 수 있고’, ‘스스로 하는’ 것이었거든요.


4. 창작

 학창시절에 저는 대학 진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실제 대학에 입학해서 다니면서도 비싼 돈 주고 청심환 먹는 기분이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불안이 없지는 않았지만 졸업이 다가올수록 하고 싶은 것은 명확해져가는 편이었거든요. 물론 하고 싶은 것이라는 게 통상적인 개념의 직업과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흥미 있는 분야가 명확했기 때문에 일단은 하고 싶은 것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밴드도 했었던 것이죠. 밴드가 흩어지고서는 정말 막연히 기타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쓰던 아이팟에 녹음 기능이 있는 것을 알고 조금씩 흥얼거리던 것이 제 음악 창작의 시작이었습니다.


5. 작당

 처음에 아주 날것의 음악들을 만들어 주변 친구들에게 피드백 받았습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아 자신감을 얻고 있을 때쯤 같이 밴드 하던 친구에게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의 작당을 제의 받았습니다. 그 때의 작당은 얼마 안가 와해됐지만,그 때 만난 친구들과의 인연으로 이태원 해방촌 <빈 가게>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됩니다. <빈 가게>에서 처음 공연을 하게 되었던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첫 공연을 한 이후로도 종종 놀러가고는 했는데, 해방촌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태도들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내가 강요받아 오던 삶의 태도가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봤습니다. 그 후에도 간간히 공연을 하고 이따금씩 공연기획도 경험하게 됩니다. 골치 아프고 외로울 때도 많았지만 꿈만 같던 시간들이었습니다.


6. 자립

 무슨 고집이었는지 혹은 자격지심이었는지 저는 홍대의 공연 시스템에서 공연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그저 노래를 하러 홍대에 가면 공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홍대 밖에서 공연하는 일이 많았고,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름대로 음악가로서 정체성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뮤지션 한받씨의 소개로 콜트 콜텍 연대공연을 한 뒤로, 북아현, 카페 ‘그’ 등 농성장에서 공연을 하고 함께 하면서 음악가로서 정체성을 고민하고 행동한 것에 의미를 느꼈습니다. 자립음악생산조합(이하 ‘자립’)도 그래서 가입하게 됐습니다.


“‘경쟁이 아닌 상생으로’, ‘분열이 아닌 연대로’, ‘의존이 아닌 자립으로’ 우리는 늘 고대한다. 새로운 씬의 탄생을.”


 자립 소개 페이지 마지막 문단입니다. 전부는 아니라도 위의 슬로건이 제가 인천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려고 마음먹는데 크게 용기를 준 것은 분명합니다. 서울까지 가는 게 멀고 지친다고 항상 생각만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해방촌에 놀러가서 친구에게 “너는 동네에서 재밌는 기획들 하고 좋겠다.” 했더니 그 친구가 한 마디 던지더군요. “너도 너희 동네에서 해!” 그 때부터 위의 슬로건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바로 학교를 휴학하고 인천 집으로 오게 됩니다.


7. 청플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막연히 집 근처에서 뭐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 전에 동네를 좀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인천에 살면서도 인천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발견한 게 청년플러스(이하 ‘청플’) 공모였습니다. 마침 청플에서 프로젝트 참자가를 모집 중이었고, 저는 빨리 동네에 스며들어 적응하고 싶은 마음에 두 개의 프로젝트에 동시에 참여했습니다. 동네에서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고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프로그램을 통하면서 사람들과 교류했던 것이 인천을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게 운 좋게도 동네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사람들, 편하게 들를 공간들을 접하게 됐죠. 그게 그러니까 제가 처음 청플 프로그램에 참여한 게 작년(2013년) 7월쯤 됐을 겁니다.


8. 동네

그러니까 이 동네, 정확히 말에 구도심 일대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간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운 좋게 저의 상황과 당시 동네에서 벌어지던 일들이 잘 맞물렸던 것 같습니다. 나름 청플이라는 공간을 필두로 비교적 제 또래들이 모이는 기획들이 돌아가고 있었고, 기획된 프로그램에서 만난 몇몇 분들을 통해 ‘국제 대소동 페스티벌’ 기획에 숟가락을 얹으면서 중구 일대의 공간들을 누비고 다닐 명분이 생겼습니다. 이제 나도 동네가 생겼으니 어떤 구실이라도 찾아서 일을 벌이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9. 고민

한동안은 무슨 기획이라도 해보려고 동네를 누비며 제 생각을 배설하고 다녔습니다. 막연히 혼자 일을 벌였다가는 제 의지가 소진될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자연스럽게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찾는 게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일단 동네에 같이 뜻이 맞을 만한 사람이 드물었고, 가뜩이나 제 또래는 더 드물었습니다. “내 세대의 담론을 끌어내보자”는 둥, “전에 하던 활동들을 인천에서 이어갈 명분을 찾자”는 둥 갖가지 고민을 한 끝에 나온 결론은 “다 내려두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였습니다.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왔던 이유는 일단 제가 이 동네에서는 아직 음악인도 아니고 작가나 영화인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커뮤니티에 대한 미련은 일단 내려두고 심기일전하기로 했습니다. “스스로 해서 보여주면 어떤 명분이건 알아서 생기겠지”


10. 영화

그래서 각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하는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공부를 하게 된 것은 각본이 있어야 저만의 담론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요새는 영화 작업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면 할수록 갈 길이 멀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제가 다행인 것은 적어도 영화 만들어서 피드백 받을 사람들과 맘 편히 상영회라도 하면 같이 회포 풀 사람들과 공간은 있겠다는 생각을 내심 하게 되니 영화 만드는 게 헛수고가 될 일은 없겠구나, 싶습니다.


11. 인천

지금 인천이라는 동네는 저한테 그런 의미에서 힘이 됩니다. 영화공간주안에서 좋아하는 예술 영화가 개봉하고, 미림극장에서는 고전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집 앞에는 수봉 도서관이 있고, 자전거만 타도 마음 편히 들러서 머물 공간들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풍부한 인프라가 있는 동네도 드물 것 같습니다. 이게 이 동네와 골목이 저에게 주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뭐라도 하려고 혈안이 되었다가 제 풀에 죽기라도 했겠지만 이제는 비교적 차분한 심정으로 제 정체성을 찾아가는 느낌입니다. 저는 어쩌면 인위적으로 지역문화를 찾아온 것이다 보니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 될 수 있었는데, 지금 이 글도 쓰고 있는 거보면 인천이 참 재미있는 동네인 것 같습니다.저는 영화를 만들어서 제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감사한 사람들을 초대해 상영회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분됩니다.그 이상의 성과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전에 일단 부끄럽지 않게 좋은 영화 만들어야죠. 그 때부터는 뭐하는 분이냐고 물으시면 영화하는 사람이라고 주저 없이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 지역

앞으로는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동네를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네가 주는 힘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지들이 하나둘 모여 있는 게 지역문화 아닐까 합니다. 저도 인천도 아직은 갈 길이 먼 것 같긴 하지만...앞으로 이 동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기대하고 긴장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곳에서, 종종 애관극장에 모여 영화보고 술도 한잔씩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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