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으로 있다가 나온 지 어느덧 10개월이 되어간다. 그동안 여러 가지 하고 싶던 일들을 하기 위해 분주하긴 했다. 조금씩 만들어가고, 심고, 뿌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아직 속 시원하게 해결되거나 기쁨을 얻지는 못했다. 심은지 얼마나 됐다고 열매를 맺겠으며, 아직 물길을 내줄 수 있는 파이프가 완성되지도 못했다. 욕심이다. (괜히 코로나 탓을 해본다.)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이어 나가고 있다. 나라는 사람에게 더 맞는 옷은 어떤 것일지, 어떻게 하면 그 옷을 얻어낼 수 있을지… 사실 정답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뭐가 나에 대한 정답일까 싶기도 하다.
회사에 있을 때부터도 계속해서 나 자신을 알고 싶어 했고, 알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밖을 나와보니 나라는 사람의 작음과 보잘것없음 또한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난날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절대.
퇴사 후 한 가지 생각해보는 것이 있다. 바로, ‘스토리’이다. 나만의 이야기, 나를 대표하거나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그 무엇.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는 나만의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살아온 나를 돌이켜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스토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 머 상당한 시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삶의 경험과 에피소드가 있긴 했으니 얼마든지 잘 맞춰보면 있긴 할 것이다.)
요즘은 그런 다양한 생각을 해보면서 지난 12년 7개월간 있었던 은행에서의 삶을 떠올려 보게 된다. 입행했을 때부터 퇴사하던 그날까지 과연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얻고, 잃고, 경험하고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러면서 은행원이 되고 싶거나, 지금 은행에 막 들어간 분들에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몇 가지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머릿속 은행 폴더를 다시 열어보았다.
은행 문을 열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것만은 알고 있자.
“은행·카드사·보험사까지… 인원감축 규모 역대 최대 전망”
“5대 은행 신입행원 공채 인원 30% 감소… 성과급도 줄어들 전망”
요즘 뉴스 기사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타이틀이다. 사실 예전에도 늘 보였던 기사 제목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끄덕여진다. 점점 금융권 인원은 축소 중이다. 과거의 부모님들이 생각하는 막연히 은행은 좋은 직장이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채워서는 안 될 것이다.
세상이 변해갈수록 조직구조, 문화가 바뀌고 사람이 바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은행에 들어가고 싶어 하거나, 혹은 이제 막 은행에 들어갔다면 지극히 현실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1) 은행은 시대를 앞서가는 곳이 아니라 시대를 따라가는 곳이다.
그 말인즉슨, 혁신기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에서 나를 더 돋보이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종종 새로운, 창의적인 뭔가를 떠올리고 표현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생각도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은행은 나의 혁신적인 발언이나 생각이 먹히기 어려운 곳이란 얘기다.
조직의 특성이란 점도 있겠지만, 상상 이상으로 폐쇄적이고, 예스럽다.
그런 점을 타파하고 싶어서인지 요즘 금융권 광고는 상호 간 상품이나 기능적 부분의 차별성을 논하기보다는 이미지 광고에 초점을 맞춘다. 마치 누가 더 신선하고 젊은 느낌으로 나름 신뢰감을 더 줄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모델을 선정하거나 광고 이미지를 구현한다.
상품적 측면(금리 등 상품 구성요소)은 다 거기서 거기다. 이미 자신의 은행으로 고착화된 소비자 층은 부동적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렇다면 새로 가입할, 이제 막 사회에 뛰어든 계층, 미래의 부자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환골탈태 중이다.
하지만, 은행을 구성하는 사람과 그 안에 이미 형상화되어있는 본질 자체는 혁신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 시대를 따라간다는 점이다.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해보고 실패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다시 말해 실패를 하고 그것을 디딤돌로 삼는 교과서적인 일들은 그저 교과서일 뿐인 것이다. 그렇게 할 시간이 없고, 그러면 경쟁사에 뒤쳐진다는 것이다.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하던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2) 은행에서는 특별한 기술을 배울 수 없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은행에서 나오면 치킨집 한다는 것을. 요즘은 카페가 추가되기도 한다. 알고도 은행에 들어갔고, 버텨왔다. 솔직히 카페는 차리고 싶다. 카페 가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커피도 좋아하니깐.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은행 밖을 나오더라도 자연스럽게 남들과 다른 테크닉적인 요소를 손쉽게 챙기고 나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만일 영업점에서 근무한다면 고객과의 대면 기술 및 가끔 직원을 놀라게 하는 손님들로 인한 임기응변 능력, 세일즈 기술이 증가하려나?
본부에서 근무한다면 기획 능력, 파워포인트, 워드, 엑셀 작성에 따른 사무 Tool 사용능력 및 글짓기, 발표 능력이 증가하거나 부서나 직무에 따르겠지만 소소한 마케팅 능력이 증가할까? 직급이 좀 더 올라가서 직원 관리 능력이 향상되거나…
나열하고 보니 그것을 배웠다고 하면 배운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퇴사를 한 상황에서 돌이켜 봤을 때 생각한 것은 은행에서의 어떤 직무도 퇴사 후 실질적으로 바로 활용되는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즉, 직무와 회사 밖의 삶과의 연결고리가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금융권에 있었으니 경제지식이나 금융지식을 얻지 않았느냐.”
음… 이 부분은 다음 챕터에서 얘기하겠다.
자, 결국 은행이든 어느 회사든 마찬가지 일 수도 있지만, 은행은 더더욱 자신만의 장점, 재능을 최대한 쥐어짜서 그 안에서 자신이 하는 일과 강제로 엮어낸 뒤, 고도의 집중을 발휘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 놔야만 한다. 절대로 그냥 하라는 것만 얼렁뚱땅 처리해서는 안된다. 은행에 있었다고 해서 나에게 자동적으로 무기가 장착되는 게 없기 때문이다. 다음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3) 은행원들이 생각보다 경제에 대한 지식이 없다.
논란이 되려나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이다. 은행원들도 솔직히 인정할 것이다.
직원들은 적어도 두 달에 1~2차례 이상 각종 시험을 본다. 한국금융연수원을 비롯한 여러 금융 관련 조직들과 연계하여 다양한 금융 능력 향상을 위한 연수들을 온•오프라인으로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직원들의 능력을 정체되지 않도록 한다. 직원의 업무 역량 개발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나도 입사해서 퇴사하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시험의 연속선상에 놓여있었던 것 같다. 가족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대학 졸업하면 시험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입사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시험을 봤으니…
은행 상품을 판매하는 직원을 교육한다는 점에서 연수 후 테스트는 유용한 학습이자 성과 측정 도구로 보인다.
그런데 거기 까지다. 실제로 고객과의 접점에서 크게 유용하지 않다. 학습에 투여한 시간 대비 얻는 것이 적다. 게다가 지금의 소비자들은 스마트하다. 더 많은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된 소비자를 대하기 위해서는 일은 일대로 하고 그 외적인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서 지식을 습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객과의 대면에서 바로 말문이 막히고 판매할 수가 없게 된다. 시험은 많이 보는데 시험은 시험일뿐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전 같으면 손님에게 알려주면서 세일즈 하기 좋은 쪽으로 유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손님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세일즈 하기가 어렵다. 그 말인즉슨 실적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더 가중될 것이라는 말이다. 은행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아, 혹시 “나는 영업점에서 손님 상대 안 할 건데”라고 생각한다면, 은행은 무조건 처음 몇 년간은 영업점에서 세일즈를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본부에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영업점에서 일정기간 세일즈를 하도록 순환근무를 한다.
결국 경제, 금융 관련 지식과 정보를 별도로 공부해야 한다.
은행에서 생활하지 않는 일반 소비자들처럼 말이다. 물론 직원들이 하기는 한다. 그런데 그 공부량이 적은 것 같다. 일단, 일과 중에 할 일이 퇴근할 때까지, 퇴근하고 나서도 꼬박 해야 할 만큼 주어진다. 워라밸 시행 전에는 무조건 야근이었다. 물론 평소 야근하고 나서도, 주말을 이용해서 별도의 경제, 금융 공부를 하면 될 것이다.(그런데 본부 근무 때는 주말에도 꽤 많이 출근을 했던 기억이…) 그러나 은행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차•과장급 이상의 직원들은 은행 업무적인 지식만으로도(딱히 진짜 경제, 금융공부를 안 하고도) 여태껏 밥 벌어먹고 잘 살아온 것이다.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상사의 영향력이 나름 꽤 있다는 것을 안다. 같은 울타리 안에서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은 비슷하게 움직이고 반응할 수밖에 없다. 즉, 물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화상에서 정말 도움이 되는 경제, 금융이야기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은행이 혹시 엘리트 집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혹시 있을 수도 있다. 그 옛날 은행의 대출 문턱이 넘기 힘들어서 전전긍긍하던 시절을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 은행에는 경제, 금융지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단지, 직무에 있어서 한정된 부분만 알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경제, 금융은 본인 직무 분야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 금융지식이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로 인해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 금융은 어떻게 활용되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행 내 직원끼리 말하고 듣는 그런 경제, 금융 이야기가 아니다.
은행 내에서는 마치 은행 상품을 통해 부를 얻게 될 것처럼 말한다. 이제는 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안에서 자주 듣고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가 하고 그냥 그렇게 묻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하는 얘기다.
겉으로는 그렇게 얘기 들어주고 끄덕이더라도 진정한 내 안에서는 그것을 깨고 내 인생에 실제로 도움되는 경제, 금융 공부를 별도로 많이 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은행에 있다고 해서 저절로 알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4) 상상 이상으로 고인물이 많다.
말 그대로다. 은행은 예로부터 안정적인 직장의 대명사였다. 그런 만큼 조직 구성원이 피라미드 형태가 아니라 항아리인데 위가 엄청 볼록하고 아래가 좁은 그런 구조를 보인다. 그런 만큼 위쪽에 인원이 많아 고여 있는 것이다.
매년 인사적체에 따른 노사갈등은 말할 것도 없다. 정년은 지키면서 고용보장은 하라고 하고, 직급별로 승진은 시켜달라고 하는데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어려운 부분 같다.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 대상으로는 급여의 한계를 정해서 몇 년 까지는 얼마 이상 올리지 못하게 하는 제도도 만든다. 은행은 좀 일찍 태어나서 빨리 들어갔었다면 아주 좋은 직장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은행은 승진 체계가 일반 기업하고 조금 다르고 늦는 편이다. 비슷한 시기에 타 회사에 들어간 주변 친구들의 직급에 따른 호칭과 은행 내 내 직급과는 괴리감이 느껴질 것이다.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열심히, 잘, 일을 하고는 있는데 승진이 안 되는 일이 많아진다. 위에 인원은 많은데 나가질 않고, 금융업 특성상 인원 감축은 서서히 꾸준히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위는 안 빠지고, 회사 내 책상과 의자는 계속 빼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행 내 나이 드신 분들 중에서는 “나는 너 나이 때부터 지점장 했는데.”라는 괴변을 늘어놓는 촌극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은행에 들어가야 하고, 이제 막 입사했다면 그 점을 알고 생활해야 할 것이다.
5) 은행 안에 나를 두지 말고, 내 안에 은행을 두어야 한다.
나는 은행이라는 회사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게 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참 부족했던 것 같고, 어리석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당연히 은행이라는 회사는 내 인생에 거쳐가는, 그리고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찌들고, 희로애락을 겪다 보면, 회사는 내 안에 두는 것이 아닌, 내가 그 안에서 한정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은행에 막 들어갔거나, 은행원을 꿈꾸는 분들에게 그래서 말한다.
나 자신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라고.
원론적인 얘길 하는 이유는 그 속에 있다 보면, ‘나’를 떠올리는 일에 게을러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막 들어갔지만, ‘이곳을 나간 후의 인생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 둬야 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을 비롯해서 ‘과연 내가 이곳에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할 때 즐거운가’,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일하며 돈을 벌고 싶은 것인가’ 등의 인문학, 철학적인 당연한 질문을 수시로 해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은행뿐만 아니라 직장에 있는 동안에 돈에 대한 고민은 늘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어떻게 하면 회사 내에서 월급을 더 받을까?’를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넓은 세상 속에서 돈을 더 많이, 잘 벌 수 있을까?’를 고민했으면 한다. 회사는 회사 내에서 월급을 더 받는 길만 알려준다. 당연하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내가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고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은행은…
아직까지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장 중 하나인 것만은 맞다.
들어가기도 쉽지는 않고, 일단 들어가면 꽤 긴 기간 동안의 직장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다. 게다가 그 어느 회사보다도 복지가 좋고, 급여가 안정적인 점은 큰 메리트로 작용된다.
소속에 대한 욕구도 해결되면서, 어디 가서 누가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는 자신감마저 채워준다.
은행은 좋다. 다만, 알고 가야 하고, 자신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인생의 길을 개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건네고 싶은 퇴사 선배의 사소한 조언이다.
p.s. 국내 1 금융권 시중 은행에 있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다른 종류의 금융업, 은행과는 다른 모습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