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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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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Nov 05. 2021

공부를 시작하는 게 너무 힘들고 불안해요.

11월 4일, 정신과 상담

내가 복기하려고 쓰는 글


내 하루는 내가 짜 놓은 계획대로 흘러가야만 한다.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그 순간 내 하루는 망쳐진 것이고, 이미 망한 하루에 의욕을 쏟을 정도로 내 마음은 건강하지 않다. 오늘(11월 4일)도 그랬다. 8시에 일어나서 바로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명상을 한 다음 신문을 읽다가 9시 30분에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웹툰을 보다가 9시에 일어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 오늘 하루도 망했네. 진짜 난 구제불능이야, 죽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과한 흑백논리라는 사실을 알고 생각할 시간에 행동하는 것이 나은 해결책임을 알지만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공부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어서 밖에 나가 산책이나 하고 병원이나 갔다 올 겸 길을 나섰다. 스타벅스에서 주는 생일 쿠폰을 써먹을 요량으로 정신과 바로 밑에 있는 스타벅스에 갔다. 

11월 신메뉴 "핑크 캐모마일 릴렉서" 이거 진짜 맛있다.


2주 전에 병원 갔어야 하는 날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선생님을 뵙지 못하고 약만 받아서 갔다. 5주 동안이나 할 이야기가 쌓이고 또 요즘은 일상생활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오늘은 꼭 선생님을 보고 싶었다. 1시간이나 일찍 가서 명단에 이름을 적고, 스타벅스에서 호로록 호록 음료를 빨다가 올라갔다. 다행히 2시 예약자가 없어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선생님한테는 여러 애로사항을 말했다. 먼저 공부가 잘 안 된다는 문제를 말했다. 옛날(작년이나 올해 초)에는 머리가 뿌옇고 멍한 느낌 때문에 집중이 잘 안돼서 공부가 안 됐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게 머리는 멀쩡하고 쌩쌩하게 돌아가지만 이런저런 부담이나 두려움 때문에 공부가 안 되는 느낌이다.

내가 공부하는 시험은 예비순환-1순환-2순환-3순환의 형태로 같은 과목을 4번 동안 거듭해서 듣는 강의 체계가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같은 과목을 공부하면 기본서는 1권으로 쭉 가는 경우가 많은데, 예비순환을 듣고 새롭게 1순환을 들으려고 하니까 '무슨 색으로 필기를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집어삼켰다. 같은 색으로 하면 중요도 체크가 안될 것 같고, 다른 색으로 하자니 조화가 안 되는 것 같고, 이미 형광펜을 칠해놓은 부분에는 볼펜으로 덧칠할까 형광펜을 덧씌울까도 고민이었다. 정말 쓸데없는 일이지만 내게는 너무 중요한 문제였고 생각을 하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그날은 공부를 하지 못했다. 한두 시간쯤 고민하다가 결론을 못 내리고 잠을 잤었다.


이외에도 공부를 시작하려고 하면 '내가 오늘 목표를 다 할 수 있을까?'로 시작해서 '내가 이 시험을 붙을 수 있을까?',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거 아닐까?', ' 다른 공부나 취업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떨어지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하는 등의 불안이 올라와서 도저히 시작을 못하는 날도 많았다. 일단 시작하면 불안이 잦아들지만 그 시작이 너무 안돼서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그러면 그다음은 자기혐오의 시간이었는데, 자기혐오를 하는 것도 힘들고 자기혐오를 하는 내가 혐오스러워서 더 힘들었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갖는 게 너무 싫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 '공부'를 하지 않는 내가 또 싫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이메다씨는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겠는 게 아니라, 공부가 어쨌든 하기 싫거나 무서운데 어쨌든 공부를 해야 하니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건 아닐까요?"라고 했다. 원인과 결과가 도치된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논리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해도 공부를 시작을 못하고 불안해하는 상태가 해소되지 않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내게는 어릴 적 부모나 주변의 요구사항이든, 사회의 요구나 학습이든, 성장배경이든,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산적인 사람이 돼야 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버림받지 않는다"는 생각이 심어져 있다. 이는 날 때부터 내게 있었던 생각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각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내 안에 남아있으며 이질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내가 정말로 이를 원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내게 들어왔든지 간에 이런 생각이 의욕의 형태를 띠고 내 행동을 정당화시켜줬을 거다. 하지만 이는 내가 원하지만 내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고, 반강제적으로 심어진 생각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질적인 형태로서 "명령"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내 안에 있는 생각이기에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지만, 내가 자연히 원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질적이고 명령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 하기 싫은 나는 여기에 거부할 수 있는 나름의 합리적인 변명을 찾는 것이라는 거다. 또한 이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니 스스로 자괴감과 스스로에게 자책감이 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오랫동안(작년 4월부터) 이야기해왔지만 나의 문제는 늘 이것이며 계속해서 같은 쳇바퀴를 돌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20여 년 간 쌓아온 삶의 방식이니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위로를 더하면서 말이다.



그럴듯하게 들렸다. 내 안에 들어왔지만 완전히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하지 않고, 죄책감을 느낄 대상이나 이유가 없지만 내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의사의 말이 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의사는 결국 "이렇게 하면 좋겠어요." 하는 해답은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답답했지만, 의사는 답을 제시하는 전지전능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내가 스스로 깨닫게 하는 존재라는 걸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묻지는 않았다. 조금 막막함은 있지만 스스로 이 사실을 상기하며 내가 같은 패턴에 빠져 있다면 끊어내고, 생각 대신 행동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할 테다.


그간 쌓인 이야기가 많아서 다른 이야기도 했는데, 어제(11월 3일)가 생일이라서 설레면서도 너무 두려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생일이 다가오자 축하해줄 사람들의 멘트나 선물이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훨씬 크게 다가왔다. '나를 축하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으면 어떡하지?', '기대했는데 아무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축하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내게 관심이 없으면 어떡하지?'같은 두려움이 구체화되고 커져가자 생일날 연락을 확인하기가 너무 싫고 무서웠다. 내 생각대로 아무도 내게 연락을 안 해줄까 봐 말이다. 아무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심하게 받을 것 같았다. 내가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누군가에게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나는 생일 전날 밤에 카카오톡을 지웠다. 우울증의 시기를 대충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서 나를 괴롭히는 성격적 문제인 '버려질까 봐 두려워서 완벽해지려고 시도한다. 완벽해질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지면 아예 포기하고 변명거리를 만든다.'는 레퍼토리가 또 한 번 반복됐다.


선생님은 아까보다 더 밝고 힘찬 목소리로 공부가 안 되는 것과 똑같은 메커니즘이라고 했다. 내가 카카오톡을 지운 것은 '아무도 날 찾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인데, 이는 공부와 같이 내가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까 봐 두려워서 결과를 내지 않고 결과를 차단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공부는 공부 자체를 없앨 수는 없으니 제대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가 나오지 않게 공부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죄책감을 낮추기 위해서 합리적인 변명과 이유를 찾으며, 카카오톡은 내가 아예 지워버려서 결과를 확인하지 않을 수 있으니 카톡을 지워버린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나는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를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서 모든 상황을 설계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더했다. 긍정적인 결과가 있어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평가절하하고, 내게 좋지 않은 시그널만을 주의 깊게 확인하며 '맞아, 역시 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야'라고 변명거리와 자기 위안을 찾는 패턴이 반복된다고 했다. 사실 이도 맞는 말인 것이, 생일 전에 이미 두 명이나 내게 미리 생일 축하인사를 건네고 선물을 줬는데도 나는 그들은 까마득히 잊은 채(또는 의도적으로 머릿속에서 배제한 채) 내게 축하를 하지 않을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는 나를 축하하고 내 존재를 인정해줬는데 말이다. 내가 찾는 것은 나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줄 사람이 아니라, 나는 불행하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각해 줌으로써 스스로 자기 연민과 불행 속에 갇힐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변화는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고통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못내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쩌겠냐, 나는 현재 그런 사람인데. 인정해야 변화가 있을 것이고 부정하면 변화는 없을 것이다.



어찌 됐든 요새 공부도 잘 안되고 불안이 많아졌으며, 진료와 상담을 1년 반 넘게 받아왔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내가 바뀌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면서 나를 구원해줄 마법의 약과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린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당장 기댈 수 있는 건 약밖에 없었기에, 선생님께 약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선생님은 상태를 보니 약은 충분히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이지만, 내가 불안해하니 일단 증량을 해보겠다고 하셨고 항우울제(SSRI)를 늘려주셨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늘리니 안도감이 든다.


내가 처음 상담을 받던 2020년 4월이나, 병원에서 약을 먹기 시작한 2020년 8월이나, 자살소동을 일으켰던 2021년 5월이나,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끝낸 2021년 8월이나, 내 문제는 늘 하나였다. 나는 나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나는 가치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이를 주변인들에게 확인받고 싶어 한다. 내가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믿어주지 못하니까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예측도 부정적이고 행동이나 생각도 부정적이다.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므로 남들이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버려진다면 내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나의 존재를 밖에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셈인데, 사실 밖에서는 아무리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내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타인의 인정에 집착하고, 긍정적 시그널보다는 부정적 시그널에 집중한다.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원하는 행동양식을 따르고 최대한 완벽해짐으로써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통제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줄이려고 한다. 성과를 내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줄임으로써 불안을 억제하려고 하지만 인생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기에 나는 다시금 타인의 신호에 목말라하고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세우며 나를 괴롭게 만든다. 그간 잊고 있었던 나의 문제를 오랜만에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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