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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페이지 Aug 16. 2020

맥시멀리스트

2020. 8. 13. 목 / 240 days

아빠는 창고정리를 시작했어. 우리 집 창고에는 정말 다양한 물건들이 숨어있었단다. 아빠와 엄마의 취미 스펙트럼이 넓었거든. 버릴 건 버리고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것들은 정리하겠다며 당근 마켓에 물건을 하나 둘 올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거실에 널브러졌던 물건들이 남의 손에 들려 사라지고 말았어. 새 물건을 사서 깨끗하게 썼던 터라 헐값에 팔아넘기는 게 아까웠지만 앞으로 몇 년간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니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해.


플스4, 용접마스크, 고장 난 오큐러스, 텐트를 처분하고 나니 제법 공간이 비어. 거기다 자전거까지 정리한다니. 엄마는 겨우 갖고 있는 옷의 1/4를 정리했을 뿐, 다른 물건들은 꼭 쥐고 있는데 말이야. 엄마가 물건을 버릴까 고민할 때 아빠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했어. 정말 버리고 싶어 질 때 버리라고. 오래 가지고 있던 물건들과는 이별할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아. 이들이 정말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거나 집에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때 헤어질 수 있도록 아빠는 엄마에게 오랜 유예기간을 선물했어. 몇 년이 걸릴진 알 수 없지만 분명 엄마도 헤어져야 하는 물건들과 언젠가는 진정한 이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다려주는 아빠 덕분에.


우체국에 들러 택배로 중고 물건들을 보낸 후, 날이 너무 좋아서 우린 대구로 향했어. 점심을 먹고 베이비페어와 차 공예 박람회를 보기로 했지. 전부터 먹고 싶던 경대북문의 반미 샌드위치를 향해 차를 몰았는데 시작부터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어. 차가 도심을 빠져나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는데도 다인이가 잠들지 않았거든. 밥을 먹기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잠도 안 자고 엄청나게 울어대서 엄마 아빠는 목적지를 바꿨어. 수유실이 있는 건물, 그러니까 점심을 먹고 도착하기로 했던 엑스코로 말이야. 울음을 달래느라 떡뻥을 여섯 개나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휴게실에서 빠빠를 먹기 시작하자 꿀떡꿀떡 잘만 먹더라고. 다인이는 배가 조금이라도 고프면 차를 태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너에게 여유가 생기니 엄마 아빠도 배고픔을 해결해야지. 여름이니까 냉면을 먹을까 하다 개정에 들렀어. 엑스코 앞 인터불고호텔 17층에 위치한 음식점인데 대구의 유명한 냉면 전문 체인점이야. 비록 지점은 다르지만 추억 속의 음식점이라 아빠와 할 이야기가 많았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오랜만에 육회를 먹은 날이야. 다인이가 엄마 뱃속에 있는 동안은 날것을 가려먹어서 1년 반 정도 육회를 못 먹었거든. 이제는 카페인과 알코올만 아니라면 뭐든 먹어도 괜찮아서 엄마는 행복하단다. 카페인과 알코올 정도는 다인이가 엄마 빠빠를 먹는 동안 흔쾌히 참아줄 수 있어.


만족스러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베이비페어 현장을 찾았어. 알고 보니 메세코리아에서 진행하는 행사였네. 구미 베이비페어 중 한 곳을 주관하는 업체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 코로나 19 때문에 전시컨벤션 행사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줄어들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렇다 할 수확은 없어서 아쉬웠어. 다인이의 쪽쪽이랑 양말이랑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것들이 좀 있었는데.


차 공예 박람회와 리빙페어도 둘러보았는데 예년에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어. 그래도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에 유모차를 끌고 시원한 실내 산책을 할 수 있어서 엄마는 좋았단다. 맛있는 식사도 했고.


아빠의 남은 볼일을 처리하러 가야 해서 다시 차를 탔는데 우리 다인이는 또다시 카시트에서 몸을 뒤틀며 악을 쓰듯 울기 시작했어. 열이 많은 너를 위해 바람이 나오는 패드도 깔아 두었고 노래가 나오는 튤립도 틀어주었지만 너의 불편함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나 봐.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카페에 들러 엄마와 다인이는 잠시 쉬고 아빠만 다녀오기로 했어.


카페에서는 유모차에 앉아있어야 하는데 도저히 그러지 못해 소파에 널 내려놓았어. 그랬더니 의자 등받이를 잡고 일어서서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계속 움직이는 거 있지. 그래, 이렇게라도 있는 게 낫겠다 싶어 위험하지 않는 선에서 너의 움직임을 허락해주었어. 진이 쏙 빠질 무렵 아빠가 돌아왔고, 우리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트 수유실에 들러 너의 배를 채우고 나왔어. 다행히 돌아오는 길에는 푹 잠이 들더구나. 덕분에 긴장이 풀려서 엄마도 잠들어버렸어. 집에 도착해서 아빠가 그러더라. 둘 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깰까 봐 중간에 차를 세울 수가 없었다고. 아빠도 돌아오는 길에 졸음이 살짝 쏟아졌다고. 그 말을 듣자 엄마는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그리곤 졸리면 다인이나 엄마를 깨워도 좋으니 차를 세워 운전하는 사람의 졸음을 깨우고 오기로 약속받았어.


다인이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에서 깨지 않았어. 카시트에서 엄마 품으로 넘어오면서도 줄곧 잠든 상태였지. 덕분에 엄마와 아빠는 편히 저녁식사를 했어.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었단다. 위에 적는 걸 까먹었네. 집에 오는 길에 경대북문에 들러 반미 샌드위치를 사 왔어. 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더라고. 고수가 듬뿍 들어가 씹을 때마다 동남아시아의 맛이 입안에 퍼져나갔어. 고수를 좋아하는 아빠도 대만족. 신이 나서 서로 음식 평을 나누며 대구에 가면 또 먹자고 이야기했어.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일은 참 즐거워. 물건이라면 손에 넣고 싶고, 음식이라면 먹어보고 싶고. 모든 것을 다 겪어볼 수는 없지만 가능하면 많이 해보고 싶은 엄마는 다시 생각해봐도 맥시멀리스트야. 당분간은 이 상태를 조금 더 즐길래. 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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