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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Aug 01. 2024

누군가의 진심

* 인물 사진은 당사자의 허락을 받거나 극단 인스타에 공개된 것만 사용합니다.


거창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연극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배우, 연출뿐만 아니라, 무대 제작자, 오퍼, 심지어 관객까지도). '예술'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독특한 위압감 때문에, 우리는 예술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술의 본질은 '놀이'이다. 흥얼거리거나, 낙서를 하거나, 역할놀이를 하던 것이, 체계적인 구조와 다양한 의미를 가지면서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의 기본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직접 감각할 수 있는 대상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우리 성향 때문에, 예술을 어떤 결과물로 간주하는 사람이 많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문학이든, 최종적으로 완성된 결과물만 예술로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행위 자체이지 결과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 예술은 우리가 세상에 내놓는 결과가 아니다. 예술은 우리를 세상에 내놓는 방식이다. 우리 내면에 솟구치는 무언가를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에 표출하는 과정이 예술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은, '예술'이라는 행위가 감각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진 창조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결과물을 '예술'이 아닌 '예술 작품'이라고 부른다.


위에서 언급했듯, 예술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고유의 방식으로 표출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생각과 감정이 제각기 다르다. 같은 대상을 마주하더라도 완벽하게 일치하는 생각과 감정을 갖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유로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생각과 감정이 부딪히기도 한다. 그들 각자의 예술이 서로 다른 탓에, 본의 아니게 마찰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원 소통을 차단할 순 다. 연극은 '집단 예술'이므로, 작품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받아야 한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되, 타인의 생각과 감정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조연출, 조명 오퍼, 그리고 나


그런데 소통이라는 것이 쉬운 하면서 어렵다. 어떻게 보면 소통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거의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오고, 만약 소통이 쉬웠다면 이런 문제들은 처음부터 발생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특히 직언을 잘하거나 단언하는 말투를 가진 사람은 소통에 어려움을 겪기 쉽다. 타인의 마음에 무의식적 거부감을 심는 탓에, 옳은 말이든 그릇된 말이든 본의가 왜곡되기도 한다. 내가 이 고충을 잘 아는 이유는 내가 바로 이런 부류이기 때문이다(내 글에서도 나의 이런 성향이 다소 느껴질 것이다).


다행히 연극을 하면서 타인과의 소통법을 깨우치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내가 늘 경우 없이 말하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의견 충돌이 발생하면 내 성향이 거침없이 드러났었다. 직언과 단언은 고사하고,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선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연극을 계속하려면, 이런 성향을 대폭 줄여야만 했다. 연극 특성상 이를 고치지 않고서는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타인과 이견을 조율하고 절충하는 법을 익혀야 했다.


나는 『돌의 이름』을 연출한 선배와의 인연으로, 『사랑과 우정 사이』 또한 참여하게 되었다. 『돌의 이름』 준비 당시 연출은 배우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 주었다. 이는 내가 선호하는 연출 방식인데, 연출이 모든 연기에 관여하면 배우가 가진 창의성이 억눌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우정 사이』의 캐스팅 제안을 받았을 때 서슴없이 수락할 수 있었다. 애초 연출의 성향은 극 참여 여부의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그만큼 나와 연출의 궁합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길).


연습 중인 『사랑과 우정 사이』 배우들


그런데 『사랑과 우정 사이』 연습 첫날, 연출은 『돌의 이름』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단지 연습 첫날일 뿐인데, 내 배역이 가져야 할 감정과 동선을 하나하나 조율하러 든 것이다. 나는 180도 달라진 연출 방식에 적잖이 놀라고 또 불편했다. 연습을 마친 후 귀갓길에는, 지금이라도 하차 의사를 밝혀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비록 단막극이고 겨우 한 번의 연습이었지만, 배우로서 책임을 저버리는 짓을 할 순 없었다. 나는 이를 조율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고민을 거듭한 결과, 역시 정면 돌파가 최선이라는 판단이 섰다. 회피나 대리 전달은 일을 더욱 그르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투르고 취약한 나의 소통 능력이었다. 섣불리 대화를 시도했다가는 나도 모르게 직언과 단언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나는 우선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완성한 글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온통 직언과 단언투성이였다. 나는 이를 여러 차례 고쳐 쓰면서 가능한 한 부드럽고 다정한 표현으로 바꿔 나갔다. 글쓰기보다 수정에 열 배의 시간을 쓴 것 같았다. '퇴고는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다시금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완성한 글을 인쇄한 다음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든든한 커닝 페이퍼를 한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연출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게 뭐 대수라고 발신음이 들리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화기 너머 연출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미리 준비한 글을 조심히 읽어나갔다. 연출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는 틈틈이 적극적인 호응도 하면서 내 말이 끝나기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나의 기나긴 장광설이 끝나자 연출이 말했다(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므로 뉘앙스만 전달한다).


『돌의 이름』과 『사랑과 우정 사이』의 연출


"맞는 말이네요. 이전 극단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를 연기했었는데, 그때의 무대와 블로킹을 나도 모르게 고수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저 또한 제 기억 속 무대 느낌과 지금 배우들과의 무대 느낌이 달라서 고민하던 차였습니다. 배우가 그렇게 느꼈다면 배우 말이 맞습니다. 좋은 의견 고맙습니다.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난 수화기 저편에서 연출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극단뿐만 아니라 인생으로서도 선배였던 연출에겐, 거침없던 나의 주장이 불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뜻 견을 수용했고 실제 연습에도 반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직 선배에게 감사하단 말을 제대로 못 한 것 같다. 이 글을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가 [연극패 청년]에 빠르게 적응하고, 좋은 사람들을 사귈 수 있었던 건 그분 덕이 크다. 내 부족한 연기력과 사교성에도, 내가 [연극패 청년]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성심으로 도와주었다. 언젠가 나 또한 극단의 선배가 될 것이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연출을 맡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받은 선배의 진심을 꼭 기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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