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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훈 Aug 28. 2024

연극 『한여름 밤의 꿈』 '오베론' 인물 전후사



전사


저는 태초부터 존재했습니다. 여러 물질과 정신이 한곳에 모여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형태로 탄생했지요. 제가 처음 의지를 느꼈을 때,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거친 황야였습니다. 전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처럼 자연스레 그곳에 뿌리내렸습니다. 제 뿌리는 작은 점에서부터 그 면적을 조금씩 넓혀갔습니다. 그렇게 넓히고 넓히다 마침내 세상 모든 곳에 뿌리가 가닿았습니다. 저는 지면 위로 ‘후’하고 숨결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자손들이 세상 전역에 숲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저는 숲의 요정이자 숲의 주인이었습니다.


저는 보리수나무의 형상으로 세상 모든 숲을 아울렀습니다. 그런데 제 자손들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습니다. 저는 부족함 없이 모든 걸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손들에겐 꼭 그렇지만도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그들이 쓸쓸하지 않도록 다른 요정들을 불러 모았지요. 바위의 요정, 바람의 요정, 새의 요정에게 말했어요. "내가 여러분의 그늘이 되어주고 악기가 되어주며 양식이 되어주리다. 나와 함께 하겠소?" 그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요정들을 하나둘 그러모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바람을 타고 향긋한 내음이 찰랑이며 다가왔습니다. 저는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이 좋은 향기는 어디서 오는 거요?" 바람은 자기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대신 향기가 나는 곳으로 저를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요. 저는 향기를 음미하며 바람의 안내를 따랐습니다. 제가 도착한 곳엔 거대한 호수가 있었습니다. 호수는 하늘의 별과 달을 품고 있었고, 수면을 수놓은 윤슬이 향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저는 호수의 매혹적인 자태에 풍덩 빠져 버렸습니다. 마치 저의 존재가 이미 점철되기라도 한 듯 호수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저는 호수의 요정이자 주인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그대의 안식처가 되어 주리다. 그대 내 사랑이 되어주오." 그녀는 화답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 사랑. 그대가 하늘 높이 뻗을 수 있도록 제가 도울게요." 훗날 요정들은 그녀를 티타니아라고 불렀습니다. 아낌없이 주려는 끝 모를 자비심 덕에 붙여진 이름이지요. 저와 티타니아는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요정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고, 그들 또한 숲과 호수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끝내 우리를 요정의 왕과 여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상 모든 것엔 고유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정신은 또다시 고유의 형상을 취하지요. 그렇게 요정들이 탄생한 겁니다. 우리는 모든 정신을 대변합니다. 그 목적은 세상이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어떤 알 수 없는 대상이 심어 준 공동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또 때가 되면 꽃이 지는 겁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흩날리고, 해가 뜨면 새가 지저귀는 것도 같은 원리이지요. 여기에 자유의지는 없습니다. 세상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공동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해가 산 중턱을 넘어갈 무렵, 처음 본 생명체가 숲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른 생명과는 확연하게 다른 무언가가 있었지요. 그는 보리수 형상을 한 제게 기대어 울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물은 노을빛을 받아 피처럼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는 중얼거렸습니다. "내 사랑, 그대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면 이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없소." 저는 있을 곳이 없다던 그의 말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멈추지 않는 그의 눈물이 제 마음을 시큰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신을 대변해야 할 요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요정이 없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알고 보니 그에겐 자신을 대변할 요정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에겐 자유의지가 있던 겁니다. 세상 그 무엇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능했습니다. 그는 내 몸에 기댄 채 뜨거운 피를 뿜어냈습니다. 생명으로 요동치던 그의 심장이 서서히 사그라들었습니다. 사실 전 그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놀란 나머지, 아니 어쩌면 자유의지에 질투를 느낀 나머지 그냥 지켜만 봤습니다. 자유의지가 있다는 건 축복이자 저주였습니다. 그래서 이날 이후, 저는 인간을 보면 연민과 질투의 양가감정 속을 헤매곤 합니다.


얼마 후 티타니아가 제게 말했습니다. 바람과 함께 물결치며 놀 때, 어떤 생명체가 호수 곁으로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묘사를 들어보니, 그 생명체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인간은 호수 옆 바위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 숲으로 사라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어요. 어디서도 당신을 찾을 수 없군요. 이미 숲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당신을 따라 숲의 일부가 된다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그녀는 이내 티타니아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티타니아 또한 너무 놀란 나머지 손 쓸 도리가 없었지요.


사랑과 자유의지는 양립 불가합니다. 사랑은 모든 걸 수용하는 건데, 자유의지는 모든 걸 판단하거든요. 저는 새를 사랑하지만, 새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거지요. 딱따구리가 제 몸에 상처를 내도 저는 다 이해합니다. 저는 그를 사랑하니까요. 그런데 인간에겐 두 개념이 양립 가능해 보였습니다. 저와 티타니아는 인간의 사고가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인간의 형상을 취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음 본 인간의 형상을 본떠 스스로를 변형시켰습니다. 그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호수에 뛰어들었던 여성의 꿈이 현실이 된 겁니다.


다른 요정들도 우리를 따라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인간의 사고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게 너무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동안 가지지 못한 감정이 제 마음속에서 요동쳤습니다. 인간의 시야로 본 티타니아는 전보다 더 사랑스러웠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그녀는 세상 어떤 호수도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저는 그녀의 눈에서 같은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 또한 인간의 모습을 한 저에게서 그동안 보지 못한 장엄함을 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숲과 호수의 형상이었을 때보다 더욱 열렬히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감정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취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절 괴롭혔습니다. 새가 목을 축이러 호수에 입맞춤할 때나, 바람이 부는 대로 호수가 춤을 출 때, 제 가슴속에는 응어리진 듯한 감정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새의 요정 게브와 바람의 요정 퍽에게 명령했습니다. "나의 허락 없이 티타니아와 어울리지 말거라." 그 외 다른 요정들도 저의 허락 없이는 티타니아를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티타니아는 고독한 마음에 제게 항의했지만, 저는 애써 무시했습니다.


문제는 자유의지가 있던 인간이었습니다. 요정과 다르게 그들에겐 명령이 통하지 않았거든요. 인간이 제가 아닌 호수에 소원을 빌 때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호수에 기도하는 인간이 숲을 빠져나갈 수 없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애원해야지만 숲에서 나갈 수 있었지요. 티타니아 또한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제게 기도하느라 목이 마른 인간이 물을 마실 수 없도록 꼭꼭 숨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 사이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갔습니다. 세상 모든 숲과 호수 또한 황폐해져만 갔습니다.


어느 날 인도에서 티타니아를 엿볼 때였습니다. 어느 병약한 임산부가 티타니아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얼굴에 죽음의 기운이 서린 그녀는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꼭 아이만은 건강히 태어나게 해 주세요. 호수의 여신이시여,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제 아이를 평생 당신의 시종으로 두셔도 좋습니다." 평소 인간 시종을 원했던 티타니아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했습니다. 티타니아는 과거 아프로디테를 도와준 대가로 생명의 가리비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임산부가 그 가리비를 만지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소년을 낳게 되지요.


저는 수풀 뒤에 숨어 티타니아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봤습니다. 티타니아는 인간의 발 언저리 물가에 가리비를 흘려보냈습니다. 가리비는 오묘한 빛을 발하며 인간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인간은 바다에 있어야 할 가리비를 보자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인간이 손을 뻗어 가리비를 만진 순간, 시간이 멈추고 아프로디테가 내려왔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던 아프로디테는 인간의 불룩한 배를 손끝으로 만지고서는 사라졌습니다. 다시 시간이 흐르자, 인간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사내아이를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 자신은 더 이상 살 수 없었습니다.


저는 소년이 내뿜는 마법에 매료되었습니다. 그 어떤 요정보다 완벽한 모습이었거든요. 티타니아가 소년을 갖는다고 생각하니 질투가 밀물처럼 다가왔습니다. 전 소년을 뺏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수풀에서 나와 티타니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습니다. 티타니아는 제 의도를 바로 알아챘습니다. "이 소년을 당신에게 줄 수 없어요. 제 시종이 될 거예요!" 저는 비웃으며 협박했습니다. "그렇다면 소년이 산짐승에게 잡아먹히도록 숲길을 열겠소." 그럼에도 티타니아는 완강했습니다. 저는 숲길을 열었습니다.


늑대들은 제가 열어둔 숲길을 따라 소년에게 다가갔습니다. 티타니아는 늑대의 요정에게 물러나라 명령했지만, 요정의 왕은 저인데 제까짓 게 별 수 있겠어요? 늑대들은 킁킁거리며 소년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그러다 우두머리 늑대가 소년의 목을 낚아채려는 찰나, 아이가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생명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늑대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습니다. 티타니아는 잠시 안도했지만, 굶주린 늑대가 소년을 해치는 건 시간문제였지요.


소년의 울음소리는 제가 처음 마주했던 인간을 떠 오르게 했습니다. 제가 그를 살렸다면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제 마음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상기된 겁니다. 저는 소리쳤습니다. "물러서거라 늑대여, 네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 늑대는 깨갱거리며 꼬리를 말고 도망쳤습니다. 어쩌면 저는 처음부터 소년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너무 갈망하면, 그러나 제가 가질 수 없다면 없애 버리고 싶으니까요. 저는 단지 소년을 너무도 갈망했던 겁니다. 소년은 다른 방법으로 빼앗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굳이 목숨까지 앗아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대본




후사


저는 사랑의 비올라 꽃물로 티타니아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덕에 소년도 수중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티타니아와 소년이 제 명령을 거역할 일은 없었습니다. 티타니아는 사랑 때문에, 소년은 경외심 때문에 제 곁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티타니아에게 걸어둔 마법이 풀리지 않는 한, 그들에겐 자유의지란 없었습니다. 그들의 의지는 제 의지에 종속되었습니다. 저의 의지가 곧 모든 것의 의지였던 겁니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쾌한 기운이 꿈틀거렸습니다. 가슴 한편 조그맣게 붙어있던 불쾌함은 이내 전신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마침내 원하던 것을 움켜쥐었지만, 끝 모를 심연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 또한 자유의지의 저주를 피해 갈 수 없었던 겁니다. 사랑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공동의지의 영역입니다. 자유의지 안에서의 사랑은 운명이 아닌 선택입니다. 사랑할 대상을, 지금 이 순간 사랑하기로 한 마음가짐입니다. 저는 티타니아에게 저를 사랑할 선택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저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유의지로 충만했던 저에게는 자유의지로 인한 사랑만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인간을 흠모하여 그 형상을 취한 지 어느덧 천여 년이 흘렀습니다.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에 얽매여 있습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저를 옭아맨 사슬을 벗어 던지기로 했습니다. 우선 티타니아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녀가 사랑할 대상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그녀가 시종의 처우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말이지요. 하지만 막상 마법을 풀자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마법이 풀리면 그녀의 사랑도 신기루처럼 증발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 받게 될 상처가 무서웠습니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티타니아의 자유의지를 뺏을 게 아니라, 나의 자유의지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리라.’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이리저리 흩날리기를 멈추고, 잔잔한 바람을 타고 유유히 흘러가는 겁니다. 저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바람의 요정 퍽을 호출했습니다. “내가 나무의 형상으로 돌아가거든 티타니아의 마법을 풀어주도록 하여라.” 퍽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저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티타니아를 처음 만났던 호수로 향했습니다. 오래전, 한 여인이 뛰어내렸던 바위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과 똑같은 모습을 한 호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이제 곧 저는 호수를 머금고 하늘로 향할 것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인데, 왜인지 눈물이 흘렀습니다. ‘인간이란 끝까지 이 모양이구나.’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숨을 한껏 들이쉰 후, 저는 그대로 나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람에게 소식을 들은 그녀가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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