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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Feb 21. 2023

[딴지일보] 만년필연구소 박종진 소장님 인터뷰

월말 김어준의 대히트 플레이어 박종진 소장님을 대신 만나고 왔습니다.

월말 김어준을 구독하시는, 혹은 구독 예정이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 역시 월말의 열혈 애청자입니다. 해서 이번에 제가 월말 구독자 분들을 위해 혹은 제 사심 충족을 위해  [대신 만나드립니다]라는 인터뷰 코너를 기획하고, 월말이 찾아낸 은둔 최강자, 재야의 고수, 필기구 국내 원톱, 세계 톱 파이브!!! 만년필 연구소 소장님. 이름하야 모든 필기구를 혹독하게 연구하셔서 ‘혹독’이라는 호를 득템 하신  "박종진 소장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소장님을 만나러 가기 전에 저는 소장님의 이미지를 개화기 우국지사들 맨키로 골방에 처박혀 기침이나 콜록거리는 몸도 마음도 나약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월말에 올라오는 사진도 그랬고, 또 소장님의 덕질 분야가 분야다보니, 말하자면 대포나 중장비 같은 게 아니라, 전부 쫌쫌다리 쬐깐한 필기구들이라 소장님에 대한 어떤 그런 편견이 더욱 있었습니다.


한데 웬걸 소장님을 실제로 뵈니 뜻밖에도 소장님께서는 키도 훤칠하게 크시고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하게 생긴 데다 형형하게 살아 있는 눈빛에 호탕한 웃음소리까지 요즘 도시에서 거의 멸종하다시피한? 어떤 그런 야생적 쾌남의 이미지를 갖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어찌나 성격도 유쾌하신지 인터뷰 내내 저는 배와 광대를 잡고 울어야 했습니다.


소장님은 월말에서도 본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신 바 있으신데 이번에도 본인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공부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 그래서일까 만년필 연구소는 남자 혼자 틀어박혀 지내는 공간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기분 좋은 종이와 나무 향이 가득했고, 은은하게 홍차향까지 났습니다. 소장님께서는 정리가 안 된 연구소를 공개하는 게 부끄럽다고 하셨는데, 이상하죠? 제 눈에는 무질서 속의 질서가 보이더라고요. 아마 이곳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아무렇게 놓여있다고 해도 전부 소장님의 피와 땀이 섞인 애장품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소장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홍차를 홀짝이며 본격적으로 그간 월말을 들으며 소장님께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여쭤 보기 시작했습니다.


1. 하필 왜 만년필을 좋아하시는 겁니까? 만년필은 모든 필기구 중 가장 인간을 닮았습니다. 만년필을 공부하는 건 다름 아닌 인간을 공부하는 겁니다. 첫 번째로는 나 자신이 되겠죠. 그리고는 타인과 세상이 되는 겁니다. 만년필을 연구하면서 저는 나 자신을 바꾸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사실 저는 만년필 외에도 좋아하는 게 많아요. 하지만 만년필이 가장 인간적이라 좋아합니다. 요즘은 신발에 관심이 많습니다. 파나마햇도 좋아하고. 야구와 영화도 좋아하고 개도 좋아합니다. 그중 만년필을 가장 아끼는 거죠. 사실 저는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애착이 있습니다. 만년필을 사랑하지만 만년필의 ‘필멸’ 또한 알고 있어요.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사람들은 자꾸 편한 것만 찾으니까요. 시대의 요구에 순응은 하지만 이 아름다운 필기구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쉽게 사라지는 게 많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나 혼자서라도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 싶다. 해서 시작한 게 만년필 연구입니다. 또 만년필을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만과 교만한 마음음 멀리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만년필을 좋아하는 겁니다.   


2. 소장님이 생각하는 필기구들의 성격은 어떻게 됩니까?

(첫째. 만년필) 만년필은 겸손합니다. 왜? 만년필은 종이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소통하고 교감하는 필기구예요. 만년필은 절대로 종이를 상처 내지 않습니다. 타협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상적인 필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낯가림이 있죠. 약간 까다로운 면이 있습니다. 아무 종이에나 안 써지거든요. 어떻게 보면 내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잉크를 가립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세척도 해줘야 해요. 끊임없이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면들이 인간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죠. 인간도 관심이 필요한 존재니까요. (둘째. 연필) 연필은 순하죠. 착해요. 다 맞춰줍니다. 따로 길 들이지 않아도 돼요. 순응합니다. 게다가 지워져요. 연필은 고집이 없습니다. 희생적이에요. (셋째. 볼펜) 볼펜은 '약간'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이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밀고 나가는 측면이 있어서 때론 종이를 아프게 합니다. 뒷면에 글씨가 배기게 돼죠. 대신 볼펜은 낯을 가리지 않아요. 외향적이에요. 원만합니다. 성격이 좋아죠. 씩씩합니다. (넷째. 붓) 붓은 정의하기 어려워요. 필기류 중 가장 어려운 필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은 아무나 못 다룹니다. 군자의 필기구라고 할 수 있어요. 초보들은 다룰 수가 없거든요. 게다가 붓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만의 길을 갑니다. 속내를 알아가기 힘든 친구예요. 여태 붓을 완벽히 정복한 사람이 역사상 별로 없다는 것도 붓이라는 필기구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죠.

3. 만년필 의뢰하는 분들 중에 피하고 싶은 손님의 유형이 있다면? 만년필을 망가트린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지 않고 꼭 핑계 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만년필 보면 딱 알거든요. 만년필이 저한테 말을 해요. 펜촉 보죠. 딱 알아요. 애가 장난친 건지. 와이프가 열받아 만년필로 찍었는지.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요. 그래야 수리하기가 편한데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을 해요. 애들 핑계를 댈 때가 많아요. 그럴 때 좀 괴롭죠. 실제로 애가 그렇게 망가트렸다고 해도 어른이라면 자기 자신을 탓해야 하는데 애를 탓하는 건 보기가 안 좋죠.


4.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소장님께서는 ‘덕’으로 최고 존엄의 자리에 가기까지 가시면서도 가정과 일의 균형을 지키신대 일종의 경외심을 느끼거든요. 그 비결이 뭘까요? 제가 이 질문을 왜 드리나면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에서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는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혼 전 해오던 취미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요. 게임이든 피규어 수집이든 운동화 콜렉트든 그게 뭐가 됐든 결혼하고 나면 전처럼 즐기기 힘들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 대단한 걸 해내셨단 말이에요?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일단. 세상의 모든 아내는 설득이 안 됩니다. 그게 핵심이에요. 자 예를 들어 제가 만년필을 하나 떳떳하게 사려고 아내한테 백을 하나 사주고 내 걸 삽니다. 그러면 와이프가 오케이 할 거 같죠? 아니오. 아내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와이프는 백을 받아 들자 마자 바로 물어봅니다. “너는 뭐 샀어?“ 그럼 깨지는 겁니다. 이런 식의 실수를 하면 안 돼요. 뭐든 산다면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행하셔야 합니다.


또 하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와이프가 무뎌지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와이프가 내 만년필들의 가격을 안다 그럼 복잡해지는 거예요. 아 만년필은 싼 거다.라고 인식하게 하게 해 줘야 해요. 그래서 저는 와이프가 버려도 되는 만년필들을 그냥 집에 툭툭 던져둡니다. 그럼 와이프가 끝내 버려요. 그래도 절대 찾지 않죠. 그러면 와이프가 나중에 비싼 만년필을 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아요. 아 싼 거겠지. 하는 거죠.  


아니 근데 주변에 친구들 보면 꼭 걸리더라고요. 그러니까 현명하게 행동하라는 얘기입니다. 솔직히 부피가 작아서 만년필은 유리한 면이 있어요. 하지만 수집품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일단 아내를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해요. 모든 아내들은 기본적으로 다 착해요. 그런 아내를 화나게 하면 안 됩니다. 잘 보세요. 제가 낚시에 취미가 생겨 낚싯대를 하나 사서 잘 가지고 놀아요. 그러면 어떤 와이프도 절대 뭐라고 안 해요. 하지만 언제 화를 내느냐. 낚싯대를 사고 또 사 자꾸 사서 모아두고 안 써 그러면 와이프는 참지 않아요. 화를 내죠. 그러니 항상 재고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겁니다. 아내 모르게 새로 하나샀다 그러면 기존의 하나를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요령을 찾으세요. 이 과정에서 만약 우리 아내가 화가 났다? 그건 분명 본인이 뭔가 게으르게 행동해서 아내가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절대 아내를 절대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사실 아무도 속이면 안 되죠. 모든 생명은 영험합니다. 아내가 됐든 남이 됐든 절대 누굴 속이려고 하면 안 돼요. 하지만 보통의 경우 와이프를 속여요. 제 친구 남편은 운동화 수집이 취미인데 결혼해서 애 키우니 이제 그만 사라. 놓을 데도 없다 했는데 자꾸 몰래 사서 거짓말을 하더래요. 이건 중국산이다. 이건 친구가 줬다. 그러다 걸려서 어느 날 친구가 다 내다 버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끝내 친구 입에서 운동화랑 살 건지 자기랑 살건지 결정하라고 했데요. 그랬더니 그제야 싹싹 빌더래요. 그럼 소장님은 이런 순간이 사는 동안 없었다는 거네요? 예. 저는 없습니다. 물론 저희 아내가 너그러운 면도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절대로 아내의 분노 임계치를 넘기지 않습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아내가 보기에) 별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것도 빡치지만 그 보다 더 화가 나는 건 여가 시간을 가정에 쓰지 않고 지 하고 싶은 거에 쓰는 것도 꼴 보기 싫거든요. 더더군다나 애가 있다. 그럼 더 화가 나죠. 소장님은 이에 관한 갈등이 없으셨나요?  저는 애랑 많은 시간 보냈습니다. 저는 제가 할 건 다 해놓고 제 공부를 하는 스타일이예요. 그리고 술을 안 마셔서 일 끝나고 친구들과 술 마시며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그 시간에 연구를 하죠. 그리고 중요한 처세 하나 말씀 드리자면 저는 집에 가면 절대로 아내가 오가며 볼 수 있는 공용 공간, 즉 거실 같은데 누워있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제 방에 있습니다. 집안에서는 늘 유령처럼 움직입니다.


남자는요. 집에서 눈에 띄면 안 돼요. 불리해요. 남자가 빈둥대는 게 눈에 띄죠? 그러면 여자들은 생각합니다. 쟤가 왜 누워있지? 그럼 뭐든 시키게 돼 있어요. 또 괜히 괘씸해요. 자기는 바쁜데 남편은 빈둥대는 거 처음엔 봐줄만하죠. 주중에 힘들었으니 주말에 쉬나 보다. 그것도 하루이틀이죠. 그래서 저는 집에 있을 땐 항상 책만 봅니다. 이 세상에 책 보는 거 가지고 뭐라고 하는 아내는 없거든요. 만년필은요. 꺼내지도 않습니다. 또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와이프랑 취미를 같이 하면 안 됩니다. 내 취미에 와이프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와이프에게 내 취미를 공개한다. 그거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요. 소장님 와이프가 앞서 말한 제 친구처럼 소장님한테 만년필이야 나야 둘 중에 하나 선택해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연히 와이프라고 해야죠. 이런 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해 줘야 합니다. 이럴 때 괜한 고집부리면 안 됩니다. 멍청하게 만년필이라고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근데 그러다 새로운 만년필 가지고 노는 걸 걸리면요? 아 그럼 바로 미안하다고 하고 싹싹 빌어야죠. 다시는 안 살게라고 바로 말 해야죠. 아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면 해 줘야 합니다. 저는 이 모든 걸 만년필을 쓰고 공부하면서 배웠습니다. 만년필을 쓰며 소통과 타협을 배운 거죠. 일종의 공감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볼펜처럼 연필처럼 일방적으로 상대를 위해 희생하거나 밀어붙히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만년필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일에 내가 좀 부족하다 하는 걸 느끼신다면 다들 만년필을 쓰고 공부하며 그 태도를 익히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만년필처럼 행동하면요. 세상사에 문제될 게 전혀 없습니다.

5. 관찰력과 기억력이 유달리 좋아서 괴롭다고 하셨는데요, 혹시 좋은 건 없으신가요? 기억력은 좋은 편이죠. 전보다 못하긴 하지만 지금도 초등학교 1학년 때 풀었던 산수책 그림이 기억나요. 지하철에서 불신지옥 이런 거 하는 분들 그분들 얼굴도 다 알아요. 그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나잖아요. 그러면 괴롭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자꾸 만나면 불편할 수밖에 없죠. 저는 사람만이 아니라 고양이하고 개 얼굴도 기억해요. 괴로워요. 모르겠어요 남들은 제 기억력을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기억력 좋아서 저는 불편한 게 많습니다. 전에야 전화번호라도 외웠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데요.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볼 수가 없어요. 만화책도 그래요. 다시 보면서 그 감동을 또 느끼고 싶은데 안 돼요. 괴로워요. 아 길 찾는 건 좀 유리합니다. 한 번 가본 데는 정확하게 기억 하니까요. 틀린 그림 찾기 이런 것도 잘하고요. 어찌 보면 제가 가진 재능은 시각적 재능일 텐데 사실 저는 이런 재능보다 중요한 게 창조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게 오래 기억하는 것 보다 의미 있다고 보거든요.


6. 이번에 월말과 만년필 연구소가 함께 제작한 연필과 종이세트 펀딩이 그야말로 잭팟이 터졌습니다. 뜨거운 반응에 대해 하고 싶으신 말이 있으시다면? 감사하죠. 정말 감사하죠. 그리고 이 모든 건 김어준 총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월말에 나가고 다양하게 반응을 여러 통로로 주시니 좋더라고요. 일단 지난해 펜쇼에서도 월말 독자라고 밝히신 분들도 많이 오셨고 저희 카페에도 많은 분들이 유입됐어요. 솔직히 월말 나가려면요. 두 달도 모자라요. 세 달은 공부해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다들 매달 나오라고 해요.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렇게 자주 나가면 혹독하게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부족한 채로 방송에 나갈 수는 없잖아요. 저는  방송하는 바로 직전까지 공부를 합니다.  또 월말에 나갈 땐 다른 방송보다 특별히 신경을 씁니다. 뭐랄까. ‘월말 김어준’ 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있거든요. 약간 맹수들이 모여 있는 느낌 그런 게 있습니다. 그리고 김어준 총수랑 방송하는 건 즐겁습니다. 무슨 말을 하면 총수님이 바로바로 알아들으니까 속이 다 시원해요. 얘기할 맛이 난다고 할까요?

우리는 이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을지로 미성옥에 가서 설렁탕을 한 그릇 먹었다. 먹는 것에도 혹독하신 소장님께서는 음식도 아무거나 안 드신다. 설렁탕집에 가서 소장님을 따라 고수들만 주문한다는 마나를 추가해 김치와 함께 먹으니 그야말로 머리에서 상투스가 울려 퍼졌다. 이 글을 보는 분들 중 을지문덕 (을지로의 문구덕후) 박종진 소장님만의 맛집 리스트를 공유받고 싶으시다면 소장님의 트위터를 참고하시길. @parker51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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