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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만언니 Oct 27. 2023

이태원참사 1주기_159번째 희생자 재현이 이야기

당신들은 우리를 지울 수 없다.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의 한 골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깔려 158명의 사람이 죽었다. 43일 뒤, 재현이가 스스로를 보내며 159명이 되었다. 그들은 팬데믹 이후, 오랜만에 친구들과 어울려 핼러윈 축제에 간 것뿐인데 이태원의 한 골목에서 압사사고를 당했다. 서울은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다. 전에도 사람들은 자주 도심에 모였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 정부 당국은 몰려드는 인파와 도로를 통제하지 않았다.

 

사고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윤석열 정부는 여전히 사과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국민의 힘 의원들은 "자식 팔아 한몫 챙기자는 수작(김미나 국민의힘 경남창원 시의원)", "세월호처럼 정쟁으로 소비되다 시민단체의 횡령에 악용될 수 있어(권성동 국민의 힘 의원)"등, 막말을 일삼았다. 사람이 159명이나 죽었는데 이 지경이다. 특조위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조사조차 시작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공인들 역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전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희영 용산 구청장, 윤희근 경찰청장, 이상민 행안부 장관, 모두 일상을 되찾았다.   

 

이태원 참사 이후 정부는 축소와 은폐에 열중했다. 사고 이후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고, 유가족 연락처 공유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유가족이 모일 자리조차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 후 유가족과 시민단체가 서울 시청 앞에 어렵게 분향소를 마련했지만 서울시에서는 지속적으로 철거 요청을 했다. 정부는 참사 이후 6일간 ‘애도기간’을 강제로 지정, 지자체 축제와 공연 등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이는 오히려 유가족을 시민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기간 동안 일부 극우 진영 네티즌들은 온갖 포털 사이트를 도배하며 정부를 공격하지 말라며, "그러게 왜 거길 갔느냐 " 며 조롱과 비방의 댓글을 달고 다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반 시민들은 오히려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삼풍백화점 참사 생존자로서 말하자면 삼십 년 전, 김영삼 정부는 백화점 붕괴 직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가의 책임을 천명했다. 덕분에 시민사회는 개인의 책임이다, 국가의 책임이다,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비극적인 참사 앞에서는 이념도 종교도 신념도 없었다. 모두 함께 건물 더미에 깔린 사람의 생사를 걱정했다.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도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나는 사고 책임자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 가는 걸 티브이로 똑똑히 봤다. 하지만 어찌 된 게 이 삼십 년이 지난 정부의 참시 대처 방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세월호부터 이태원까지 국가는 사고의 책임을 부정하고 회피했다. 그뿐인가 책임자 처벌도 없다(참고: 세월호는 사고 후 7년이 지난 시점에서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된 11명 전원 무혐의, 몇몇은 불기소, 그도 아니라면 815 특별사면 되었다. 계약직 선장 하나가 실형을 산 게 전부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세월호‘ 가 특이점인 줄 알았다. 이태원을 보고 나니 세월호는 시대가 역행하고 있음을 알리는 변곡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명징한 상징, 불길한 징조 말이다.

 

이태원 참사의 본질은 죽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데 있다. 국가의 행정공백으로, 관리 부실로, 사람이 사람에게 깔려 죽었다. 하지만 여태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있으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우리는 국가 통계에 기록되는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각자 고유한 삶을 살고 있었던 개별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당신들이 지우려 한다고 해도 우리를 결고 지울 수 없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다.

 

 1. 넥타이를 매고 어린이집에 가던 아이

재현이는 2006년 4월, 서울 금호동에서 태어났어요.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같이 왔는데 첫날부터 잠깐 잠이 든 시간을 빼고는 아이가 계속 울었던 게 생각나요. 애가 너무 울고 보챌 때는 오밤중에 차에 태워 드라이브도 했어요. 재현이는 어지간해선 잠을 안 잤는데 어느 날엔가는 한밤에 무심코 티브이를 켰더니 울음을 딱 멈추고 화면 속 뽀로로를 유심히 봤던 기억이 있어요.

 

그땐 몰랐는데 아마 비염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들었나 봐요. 재현이는 아데노이드성 비염이 있었거든요. 아마 코가 막히는 일이 많아 숨 쉬기 어려워 잠을 잘 못 잤나 봐요. 그래서 아기 때부터 똑바로 눕혀 재우지 못했네요. 4살 무렵에야 원인을 알고 코 수술을 하고 나니 그나마 잠을 좀 잘 자더라고요. 그 이후로도 재현이는 어려서 습관이 남아서인지 저희를 떠나기 전까지 항상 베개를 두 개씩 베고 잤어요.

 

녀석은 고집이 무척 셌어요. 네다섯 살 무렵에는 어린이집에 갈 때, 항상 본인이 아침에 직접 옷을 골라 입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엔가는 지 눈에 아빠 넥타이가 멋있어 보였는지. 한 일 년 정도는 매일 아침 넥타이를 매고 어린이집을 다닌 거 같아요. 애가 또 겁은 또 어찌나 많은지 어려서부터 병원 가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어요. 머리 깎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재현이를 병원이나 미용실에 데려가려면 엄마 아빠는 종일 진땀을 빼야 했지요. 예방주사 맞으러 갈 때에는 하루 종일 재현이가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 주사가 얼마나 아픈지 쉴 새 없이 묻고 또 물었어요. 그러고 나서도 병원 앞에서 아이와 꽤 긴 시간 실랑이를 해야 했죠. 결국엔 엄마 아빠손에 강제로 이끌려 병원에 간 적이 많았고요. 겁이 무척 많은 아이였어요.

2. 열여섯, 만족할 때까지 하던 아이

재현이는 또래친구들보다 체격이 좋았어요. 작년 11월 무렵에는 글쎄 아빠 키를 따라잡은 거 있죠. 애 아빠가 178센티라 작은 키가 아닌데 열여섯의 재현이가 벌써 아빠를 따라잡은 거예요. 덩치만 컸지 하는 짓은 영락없는 어린애였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하나, 철이 좀 덜 들었다고 해야 하나. 그냥 남자아이답게 좀 단순한 면이 있었다고 할까요? 네 맞아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아이였어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늘 싱글 거렸죠. 장난도 잘 치고 명랑하고.

 

신체활동이 유난히 좋아서 재현이 어려서는 어린이집에서 방학을 하면 단지 내 아파트를 포함해 인근 아파트 놀이터까지 서너 군데를 매일 순방해야 겨우 집에 오는 아이였어요. 조금 더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어디서 봤는지 갑자기 *파쿠르를 배워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인근에 학원이 없어 힘들겠다고 하니 녀석이 어느 날 그래요. 혼자서 매일 아파트 안에 있는 낮은 벽들을 돌아다니며 한 손으로 짚고 넘기부터 해서 파쿠르 동작을 하루에 세네 시간씩 연습했다고요. 그 정도로 재현이는 무언가 하나 좋아하는 게 생기면 강하게 몰입하는 아이였어요.  (*파쿠르: 안전장치 없이 주위 지형이나 건물, 사물을 이용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곡예 활동이다. 정해진 기준이나 규칙 없이 주변 환경에 맞춰 자유로운 움직임을 수련하는 것이 특징)

 

파쿠르부터 시작해서, 컵 쌓기,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곡 연주, 그림 그리기 등 뭐든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해야 했죠. 그러니까 어느 날 재현이한테  좋아하는 노래가 생겼다. 그러면 아이가 하루 종일 집에서 그 곡만 연습해서 온 가족 귀에 그 노래가 못이 박힐 정도였죠.  

3. 엄마 옆에 앉아 얘기하길 좋아하는 중학생  

친정 식구들과 한 동네에 살아 저희 집 애들은 어려서부터 사촌들과 함께 자랐는데 그중 맏이였던 재현이가 늘 어린 사촌 동생들을 돌봐줬어요. 동생들도 그런 재현이를 무척 따랐고요. 지네 아빠 닮아 다정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아이였죠. 글쎄요. 다른 집 애들은 딸 아들 할 거 없이 중학교만 들어 가도 방문 닫고 안 나온다고 하는데 저희 애는 안 그랬어요. 학교나 집 밖에서 재밌었던 일이 생기면 제 옆에 앉아 싱글싱글 웃으며 얘기하길 좋아했어요. 제가 음식 준비를 하고 있으면 식탁에 앉아 늘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곤 했죠. 저희 가족은 대화가 많은 편이었어요. 아이와 좋아하는 음악까지 서로 공유할 정도로 말이죠,


초등학교 5학년부터 학원을 안 보내고 제가 아이와 함께 공부했어요. 우리 애 성격에 학원에 종일 앉아 있는 게 힘들 거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죠. 아이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다른 엄마들보다 더 많은 편이에요.


저희 가족은 캠핑을 자주 갔어요. 추운 겨울을 제외하고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꼭 캠핑을 갔죠. 캠핑장에서 음악 들으며 바비큐 먹는걸 재현이가 좋아했거든요. 이 맘 때 재현이랑 함께 앉아 밤하늘에 별을 같이 봤던 게 생각나네요.

4. 주방에도 시장에도 못 가겠더라고요

재현이는 뭐든 잘 먹는 아이였어요. 덩치도 크잖아요. 한참 먹을 때라 그랬는지 먹성도 좋았어요. 제가 또 요리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매일 신나게 해 먹였죠. 어떤 음식을 해 줘도 재현이는 맛있게 잘 먹어줬어요. 그리고 항상. 표현을 해 줬죠. 음~ 맛있다. 하면서 말이에요. 김치 냉장고에서 막 꺼낸 첫 김치를 작게 썰어주면 얼마나 좋아하던지. 애 입에 김치를 작게 썰어 넣어주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맛있다고 더 달라는 아이였어요 그러면 저는 신이 나서 얼른 김치를 가져다 맛있다는 아이 입에 자꾸 넣어주곤 했어요. 그뿐인가요. 콩나물 무침, 시금치나물 같은 것도 금방 무쳐서 반찬 통에 담기 전에 재현이 입에 먼저 넣어주면 맛있다고 좋아라 했어요. 저는 그런 재현이를 보는 게 또 좋았고요.


그런데 재현이가 그렇게 되고 나니까 그 후로는 주방에 못 들어가겠더라고요. 남편이나 딸한테는 미안하지만 도저히 예전처럼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는걸요 뭐. 어디 주방뿐인가요. 마트나 시장도 못 가요. 가면 온통 애 생각이 나서. 아 저걸 해 주면 잘 먹는데, 이맘 때는 이걸 먹었는데, 아 이걸 한 번 더 먹일 걸 그랬지. 그런 생각하며 울다 나오기 일쑤죠. 딸아이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지 하는데 아직은 도저히 제 마음이 어떻게 안 돼요. 어딜 가도 아이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요즘은 집 밖에   잘 나가지도 않아요.  

5. 10.29 참사, 43일 후

재현이가 집중력이 좋은 애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애가 또 굉장히 어설프고 칠칠맞았어요.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외에는 관심이 아주 없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 정도였냐면요. 비 오는 날 들고나간 우산을 도로 가지고 들어 온 게 여태 손에 꼽을 지경이에요. 심지어 학생이 공부하는 책가방도 잃어버리고. 신발주머니는 말해 뭐해요. 수도 없이 잃어버리고 다녔죠. 오죽하면 동생이 집에 오다 학교나 아파트 근처에서 오빠 거  같다며 재현이 가방을 챙겨 왔겠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꽤 여러 번이요

매년 봄가을에 저희는 13명의 친정 식구들이 다 함께 서울 외곽으로 나들이를 다녔어요. 식구가 많으니 팀을 짜서 운동회도 하고 비가 오거나 추운 날엔 실내에서 보드 게임이나 윷놀이 같은 것도 하고요. 유독 재현이는 여럿이 함께 모여 놀고 맛있는 음식 먹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고등학생이 돼서도 다 같이 놀러 가는 날을 기다렸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지난 11월 김장 때 가족 모임에선 어쩐지 자기 방에서 나오질 않더라고요. 처음이었어요. 재현이 그러는 거.  

 

그러니까 사고 이후 43일간 재현이는 완전히 다른 아이가 되어 있었어요. 얼굴이나 몸은 재현이가 맞는데 하는 짓이 예전의 우리 재현이가 아닌 거예요. 사고 이후로는 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고 그 좋아하던 노래도 안 부르고 밥도 안 먹어서 살도 많이 빠졌고요. 정신과를 꾸준히 다니긴 했는데 그 후로 입을 닫고 말을 안 하니 속을 알 수가 있어야죠. 답답했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에 애 아빠랑 같이 시간을 갖고 기다려 보자 했어요. 그런데 그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거예요.

 

재현이 그렇게 되고 장례식장에 앉아 도대체 이 녀석이 왜 그랬을까, 이 철딱서니가  죽음이 뭔지나 알고 그런 무서운 짓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했어요. 정말 덩치만 컸지 속은 아직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생각한 게 아. 그냥 얘는 뭣도 모르고 죽으면 친구들 만날 수 있어서 그랬나 보다 생각했어요. 애가 계속 죽은 친구들을 보고 싶어 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작가님 (산만 언니/ 삼풍백화점 참사 생존자) 만나서 얘기 듣고 보니 그럴 수 있겠어요. 어린 나이에 사람들이 그렇게 한 순간에 쉽게 죽는 걸 보니까. 죽는 게 별게 아니구나 했을 수 있겠네요.

6. 이중에 셋이 지금은 세상에 없네요

맞아요. 재현이는 친구를 정말 좋아했어요. 왜 그럴 나이잖아요. 고등학교 일 학년이면 한참 친구 좋아할 때죠. 그런데 함께 놀러 간 친구 둘이나 그렇게 되고 보니까. 애가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에요. 아니요. 재현이가 먼저 가자고 한 건 아니에요.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 사이에서 핼러윈 축제에 가자고 말이 나왔고 그래서 따라 간 모양인데. 일이 그렇게 돼 버린 거죠. 그런데 그 일을 도저히 애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봐요.

여긴 재현이가 쓰던 책상이에요. 재현이는 어려서부터 지 방에 안 들어가고 거실에서 공부하고 음악 듣고 그랬어요. 수학을 좋아해서 한 번 수학문제를 풀면 서너 시간도 꼼짝 안 하고 집중해서 풀었어요. 나중에 커서 수학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할 정도였죠. 제가 생각해도 재현이한테 잘 맞을 것 같더라고요. 사촌동생들 돌보는 걸 봐도 그렇고. 자상한 성격도 그렇고.

아빠랑 슬램덩크를 보고 와서는 한참 끄적이더니 이런 걸 그리더라고요. 네 그림을 곧잘 그렸어요.

이건 재현이 친구가 그려준 그림인데, 재현이랑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 모습이래요. 이 중에 셋이 지금은 세상에 없네요. 저건 마포대교예요. 나란히 앉아 한강을 봤던 날을 기록한 거래요.

7. 그저 긴 꿈만 같아요  

재현이 키우면서 첫애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장 가슴 아파요. 제가 엄마 일에 조금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우리 재현이가 좀 덜 고생하며 자랐을 텐데 제가 너무 서툰 사람이어서  아이도 힘들었을까 봐 그게 미안하죠.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재현이와 함께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찬란하고 소중하고 그랬는데 그땐 그걸 몰랐어요. 당연한 줄 알았어요.

 

재현이 그렇게 되고 나서는 잠을 거의 못 자요. 수면제요? 저는 못 먹어요. 왠지 약으로 도망치는 거 같다고 해야 할까. 애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다 갔는데  편하게 못 자는 게 당연하지 생각하면서 그 고통을 오롯이 느껴요. 안 그러고는 도저히.

 

재현이 그러고 나서는 전에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생각 나는 게 하나도 없는 거 있죠. 장례 치르고 나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더라고요. 하다못해 핸드폰 조작법도 생각 안 나더라고요.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오고 뭘 읽지도 못하겠어요. 네 맞아요. 그날 제 영혼이 재현이와 함께 묻혀 버린 거 같아요.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재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장례를 하고 애를 봉안당에 두고 왔는데도 그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재현이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요. 평소에도 장난을 자주 하던 아이여서 그런가, 어느 날 문 열고 들어와서 엄마 미안해 장난이 심했지? 할 거 같아요. 정말이지 우리 재현이가 세상에 더는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더는 내 아이를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이 모든 게 그저 긴 꿈만 같아요.

+재현이 엄마를 만나고 돌아온 얼마 후 아침에 산책을 나가는데 이웃의 한 엄마가 애가 아프다며 달리는 걸 봤다. 아이가 열감기에 걸렸다고 맨발에 슬리퍼도 짝짝이로 신고 병원으로 달리더라. 그 순간 나는 재현이 엄마를 생각했다. 애가 아파도 저러는데 자식을 묻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달려야 할까. 재현 엄마는 아이를 향해 얼마나 달리고 싶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곧 있으면 이태원 참사 1주기다. 재현이를 비롯해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 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곳에선 아픔도 고통도 없이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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