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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as Apr 21. 2023

비와 소녀를 잊지 못하는 소년

비 소녀 소년

비와 소녀를 잊지 못하는 소년20230421

비와 소녀 1        

소년은 버스에 오르며 저 멀리에서 창 밖을 바라보는 소녀를 보자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차창 밖으로 내리는 빗물은 소녀의 머리카락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뒤 이어 오르는 사람들에 밀려 자의 반 타의 반 뒤로, 뒤로 그리고 또 뒤로 가 섰다. 머리 위 손잡이가 흔들리자 버스는 출발했다.

살짝 열린 창 밖은 어두웠다. 저 어둠의 끝 너머는 무엇이 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둠의 먼 허공 하늘 뒤에는 반짝이는 별이 있으리라! 소년은 별을 좋아했다. 아직도 소년 같은 그는 별을 보며 미래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가는 걸 좋아했다.

그가 몸도 소년일 때쯤 그 꿈을 같이 하고픈 소녀를 만났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할까?' 궁금함을 여태까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또래 친구들은 그 첫사랑을 다시 찾은 경험담들을 술잔을 기울이며 말하곤 한다.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그녀를 만났어. 너희도 알잖아! 내가 게 좋아했던 거!'

'그래, 니가 진짜로 좋아했잖아'

'근데 요즘 머리 아프다'

와?

'얼마 전에 이혼했는데 같이 살자 하네 사실은 그때 지도 내 좋아했다고'

그도 안다. 지금 다시 만나봐야 결론은 아프다는 것이다.'같이 살자 하면 머리 아프고, 잘 못살면 가슴 아프고, 잘 살면 배가 아프다'

그래도 그는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죽기 전에 한 번은 보고 싶어 한다. 오늘 친구들을 만나 한 이야기의 핵심이다.

잠시 후 속도를 높이자 빗물에 씻겨 생 그런 바람이 열린 차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시원했다. 무언가 좋은 향이 살짝이랄까 잠시 코끝을 스치는 순간 운전기사 아저씨가 급브레이크 밟았는지 버스가 움찔했다. 학원 수업 후 피곤했는지 손잡이를 놓친 소녀가 중심을 잃었다.

그 소년은 타고 난 순발력으로 지탱하며 버텼다. 아직도 소년임에 분명하다. '어머나' 하는 놀란 감탄사(?)가 소년의 귓볼을 쳤다. 찰나의 순간, 소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소년의 얼굴, 코 끝, 볼을 스치고 그 감탄사와 같이 지나간다.

손잡이를 놓친 소녀의 하얀 손은 어느새 그 소년의 팔뚝을 잡으며 넘어지지 않으려 의지한다. 발개진 볼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라 연거푸 고개를 숙인다. 머릿결이 흔들릴 때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의 샴푸향과 풋풋한 소녀의 체취가 전해졌다.

'발도 밟으셨는데요' 깜짝 놀라는 순간 또 한 번 차가 덜컹거린다. 빗길이라 그런가 보다. 사과하기 바빠 손잡이도 못 잡은 소녀는 두 손으로 소년을 안는 듯 앞으로 상체가 완전히 쏠려 버린다.
그 소년은 외친다. '기사 아저씨 한 번만 더 세게 브레이크요!' 물론 마음속, 입속의 함성이 과연 누구에게 들릴까?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엄사 친 그 소년에게는 꿈이 있었다. 언제나 두 눈은 빛을 발하며 어둠 속 불안을 모두 뚫고서 별에 닿았다. 어쩌면 저 어두운 밤의 허공을 가르고 소년의 눈동자에 닿은 별 빛이 두 눈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어둠을 거의 헤치고 나온 그에게 그 시절 아련한 기억 속에 아린 이야기, 누구에게라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소녀가 지금도 가슴속에 살아 숨 쉰다.

소년은 소녀가 다니는 학원 시간에 맞추어 과목을 선택했다. 수업이 끝나면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기다렸다. 소년은 기다리는 소녀의 뒷모습만 보아도 안다. 소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까까머리의 환하게 웃는, 반짝이는 눈 빛, 소녀를 향해 힘껏 머리 위로 쭉 뻗어 올리는 손만을 볼 수 있었다.

입구는 오가는 또래의 고등학생, 재수생들로 거의 한 시간 단위로 붐비고 혼잡했다. 하지만 소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올 때는 버스 승강장까지 비를 피해 같이 뛰었다. 소년의 책받침으로 소녀의 머리에 비 한 방울 안 떨어지게... 차창 밖은 비가 주룩주룩...
나란히 선 둘 사이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소년이 제아무리 비를 막으려 했어도 소녀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가녀린 하얀 손으로 조심조심 머리카락에 달린 빗방울을 떨어내었다. 그 찰랑 거림은 향기로운 샴푸 향과 함께 소녀만의 체취까지  둘 사이 공간을 적절히 채워고 또 약간은 소년에게 전해주었다.
  
비는 밤을 새워 계속 내릴 듯 쉬지 않았다. 버스 맨 뒷자리에는 재수생처럼 보이는 형, 누나가 서로 손을 잡아가며 팔도 주물러 주고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며 떠들고 있었다.

그 소년은 창에 비친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나 저들처럼...  그래도 재수하면서 저러는 건 아닌 야! 얼른 대학생이 되면 나는 그녀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이 표현할 수 없는 향을 느낄 거야' 라 다짐했다.

소녀는 오늘따라 소년이 이상했다. 창 밖만 보고 한 숨을 쉬는가 하면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애가 왜 이러지? 한 참을 창만 보질 않나? 주변을 두리번거릴 않나? 어디 아픈가? 숨을 가끔 끄게 쉬고... 시험 성적이 안 나온 것도 아닌데...'

이 생각 저 생각을 아무리 해봐도 평소 같지 않았다. 내리면 어디 아픈가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오늘따라 버스가 왜 이리 더디 갈까? 비가 온다고 해도 너무 가다 서다를 반복하네'

소년은 버스가 빗길에 위험하게 너무 빨리 가는 것을 느꼈다. 차도 막히고 앞도 잘 안 보일 건데... 평소에도 너무 과속한다고 느끼던 터였는데... 날씨나 기상을 전혀 고려 안 하는 기사 아저씨가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창에 비친 뒷자리를 힐끔 거릴라, 빗길임에도 과속하는 버스 기사를 노려 볼라,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 체취와 향을 하나도 남김없이 깊이 들이킬라 마음은 바빴다.

안절부절못하며 크고 깊은 호흡을 계속하고 얼굴도 빨개지는 그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말도 안 하고... 기분 나쁘냐 물어도 대답도 안 한다. 뭔가 기분 나쁜 게 있나 보다. 혹 저번에 서울대 의대 다니는 사촌 오빠가 집에 다녀간 이야기할 때 표정이 안 좋던데..  야가 삐졌나?' 내려서 물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집에 빨리 가서 모의고사 준비도 해야 하는데... 요즘은 여자 남자가 어디 있나? 이마에 손대보고 열이 많은지 알아보고 그때 오빠 이야기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비는 주룩주룩 계속 내렸다. 버스는 가다 서다를 계속 반복했다. 어느덧 벌써 둘은 다 같이 내릴 때가 된 것을 알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문세의 <소녀>가 들리기 시작했다. 음치 소년이 큰 용기 내어 가끔 불러 주던 노래였다. 소녀는 가수와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소년이 불러주는 어설프게 정성 들여 마음을 담아 불러주는 곡을 더 좋아했다. 깔깔거리며 소년의 노래를 얼마나 들었던지 이제는 나지막이 본인도 모르게 따라 부른다.

소년의 귀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는다. 그의 심장 박동은 언제부터인가 소녀의 숨소리에 맞춰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마치 세네나 데처럼, 낮게 깔리는 첼로 소리 같았다. 가끔 보이는 새하얀 이 사이로 나오는 노랫가사는 소년의 마음을 대신 노래해 주었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소녀는 지난 시험 기간 중에 엄마 몰래 소년과 통화 중의 일이 떠올렀다. <별이 빛나는 밤에> 노래 참 좋다는 말을 기억한 소년이 좋아하는 노래가 무어냐 물어었다. 이것을 기억한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어른들 깰라 조용히 조심히 이쁘게 정성 들여 불러 주었다. 행복했다. 아직 손 한 번 잡지 않은 사이지만 드라마 속 연인들 흉내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와 소녀 2

소년은 이상했다. 지금 쯤 나올 데가 되었는데... 왜 신청곡이 안 나오지? 별밤지기 이문세는 말도 많다. 역시 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야지! 무슨 DJ를 한다고... 최고의 인기 가수의 가창 실력까지도 의문스러웠다.

이런 머릿속 투덜거림에 저 너머에서 ㅇㅇ의 목소리로 똑같은 노래가 들린다. 아~~~ 이건 뭐지? ㅇㅇ가 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자 라디오에서  전주가 낮게 들리기 시작하며 이문세가 또 말을 한다.

'이번에는 멀리 부산에서 신청하셨네요. 제 노래입니다. 아 이분 학생이신가 봐요. 많이 힘드시죠? 사연은 이렇습니다.

ㅇㅇ야! 매일매일 공부한다고 힘들지? 우리 만나기 시작한 지 며칠 되었는지 알아? 2월 19일에 만났으니 오늘이 딱 100일 째야! 내가 원래 곰처럼 둔했는데 너 만나고 100일째, 사람이 된 것 같아! 우리 같이 힘든 시간 잘 이겨내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가서 이쁘게 사랑하자! 며 지난 학원 수업 후 버스를 승강장으로 같이 걸으며 길가에서 들리는 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 좋아하는 여자친구 분과 같이 듣고 싶다고 신청하셨네요.

잘 듣고 계시죠? 그런데 학원이 늦게까지 하네요? 이 늦은 시간에 어떻게 같이 듣죠?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짓궂었네요. 두 분 열심히 공부하셔서 원하시는 대학 가시고 이쁜 사랑하시길 바라며 함께 듣겠습니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그리움 두고 머나먼 길
그대 무지개를 찾아올 순 없어요

노을 진 창가에 앉아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며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소녀는 얼마 전 소년이 신청해 같이 부르며 듣던 노래를 입으로 따라 부르는 게 그날 이후 습관이 되었다. '애가 왜 이럴까?' 버스가 속도를 줄이자
소녀가 살짝 쳤다. 내리라는 신호였다.
소년의 평소 같지 않은 모습이 계속되었다. 걱정이 되었다. 내릴 생각을 안 하는 것을 보면 뭔가 이상함이 분명하다. '아직도 열이 나는 듯한 얼굴을 보면 확실하다' 다시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돌려 보았다. 맞다!

소녀가 고개를 돌리자 소년에게 그 체취는 더욱 가까이 느껴졌다. 중 3부터 알고는 지냈지만, 최근 학원 시간까지 맞춰가며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에도 예쁘다고 생각은 했지만 갈수록 정말 예뻐진다. 매일 집에 갈 때 같은 버스에서 오늘처럼 보아 왔는데 오늘은 왜 이럴까? 갈수록 정말 예뻐진다.

버스가 서자 소년은 스쳐 지나가는 소녀를 따라 내렸다.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체취가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비는 어떻게 알았는지 딱 시간을 맞추어 그쳤다. 소녀의 뒷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이제는 100m 밖에서 뒤만 보아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비 온 후 밤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부분 밀폐된 버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인도에 말을 내딛자 따라오라는 듯 평소와는 반대방향으로 걷는다. 걸음걸이도 에쁘다. 긴 생머리와 다리가 조화롭게 같이 움직인다. '내 여자친구라는 게 좋다. 자랑스럽다' 사실 친구들도 부러워하기는 한다. 여고생이 아니라 여대생이라 해도 될 듯하다. 누나를 따라 걷는 남동생이 된 것 같다. 저런 누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소녀는 버스에서 내릴 때 말했다. '말할 거 있어, 따라와!' 그리고는 인도에서 살짝 들어간 어두운 곳으로 걸었다. 평소 이쁜 걸음걸이가 아니
었다. 그 이쁜 다리에서 발 끝까지가 화나 있는 듯했다. 몇 발자국을 뗀 다음 팔짱을 끼고 갑자기 돌아 섰다. 생각 없이 따라가다 부딪힐 뻔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눈감고 호흡을 천천히 해볼래' 손을 뻗어 소년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었다. 열이 없었다. '니 어디 아픈데? 아까는 얼굴이 블그스레 하더구먼, 아니면 저번에 사촌 오빠 공부 잘한다고 했더니 삐짓나? 미안하다. 내는 공부만 잘하는 그 오빠 별로다. 눈빛도, 목소리도, 말투도,  그리고 키가 별로다. 니 정도가 딱 내한테 맞잖아! 네가 좀 천천히 걸으면 나는 보통 때처럼 편하게 걸으면 되거든...'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못 본모습이었다. 그동안 하자고 하는 대로 따라만 하더니 완전히 달랐다. 사촌 오빠 때문에 기분 나빴던 거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전혀 모르는 듯하다.
팔짱 긴 모습에, 소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게 처음이었던 것 같다.

언제나 소녀는 눈을 똑바로 못 쳐다보았다. 눈까지 감으라니...  
게다가 그렇게 한 번 잡고 싶어 했던 이쁜 손으로 이마의 열이 있냐며 만 저주기까지...  아프다며 걱정하고 있었구나!
사실 소년은 소녀와 같이 있기만 해도 좋았다.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먹고 하는 등의 사귄다는 의미의 데이트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여자인 친구로만...
지금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절친이 되어 있었다. 그 시작이 있었다면?

비와 소녀  3

미팅이었다. 중 3 때 선도부장을 하라 해서 내키지 않는 감투를 하나 더 썼다. 그것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교문에서 여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이를 계기로 고 1 때 미팅을 하게 되어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좀 특이했다. 소년은 건전한 이성교제, 중고등학생 시절 학업에 도움도 되는 등 모범적인 학생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교회에서만 이성 친구를 알고 지냈다. 인접학교 여학생들이 교회에 보러 오기도 했다. 덕분에 전도(?) 왕이 되기도...

고등학생이 되면 공부하느라 학창 시절을 즐길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중학교가 마지막인데 반장은 남는 거라도 있지...  단 한 번뿐인 중학생 시절인데... 소년은 어쩌면 인생의 긴 밑그림을 이미 그러 놓은 것 같았다.

소년과 소녀는 교문만 다른 학교에 다녔다. 산중턱을 절개하여 반으로 나누고 각각 남녀학교를 만든 곳이다. Y자형 진입로 가 있어 교문 직전까지는 같은 길을 사용했다. 서로의 교실에서 서로의 운동장이 잘 보이는 구조이다. 둘을 갈라놓은 담장은 한쪽은 나지막해서 여러모로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학생들도 가끔 눈에 띄었다.

남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는 담장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체육수업이었다. 클래식, 유행가 등에 맞추어 율동을 하는 무용? 군무? 뭐 그런 시간이었다. 그러나 또래들과 달리 소년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과 방과 후 축구를 하거나 야구를 주로 했다. 가끔 있는 시험에는 졸업하기 전 전교 1등을 한 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범생이었다. 보이스카웃, 청소년연맹(MRI) 활동 등을 과외 수업으로 하는 것이었다. 주말에는 교회에 가서 성가대를 동경하는...

이런 소년에게도 사춘기는 비켜가지 않았다. 선도부장을 하면서도 담장 너머 여학생들과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친구들을 비웃기도 이해하기도 하면서 단속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선생님 심부름을 갔다 교실로 가는 길에 살짝 담장너머 음악소리가 나오는 여중 운동장을 슬쩍 보았다. 그런데 같은 교회 다니는 예쁜 후배가 반바지를 입고 율동을 배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치 TV에 나오는 무용수처럼 큰 키에 가늘고 긴 팔다리, 꼭 끼인 땡탱한 체육복 반바지, 그 아래 이쁜 인형 같은 장딴지 등... 특히, 도드라져 보이는 가슴, 긴 목선 등이 균형 잡힌 곡선 속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주일이면 보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충격이었다. 소년이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교회에서 이성교제를 하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친구들에게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몰아붙이기도 해 오던 터였다. '종교를 빌미로 이성교제를 한다' 이런 것은 그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년은 여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로서는 10대 소녀들이 선망하는 키, 미소년 같은 얼굴, 등굣길 교문에서 엉성한 아이들을 지도하는 모범, 체육시간 인솔해서 운동장을 도는 도두라짐, 선수 못지않은 축구 실력,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엄친아라 불러도 되는 반듯함 그 자체였다.

소녀는 친구들에게 등교시간에 교문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으며 웃고 있었다. 자매 없이 교사인 엄마와 둘 만이 살아서 그런지 동생, 특히 남동생들에 관한 이야기는 귀를 솔깃하게 했다.
한 친구가 등교하는데 동생이 두발이 불량하다며 잡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학교 동창에게 가서 말했더니 동창 머슴아가 그 소년을 보더란다.

잠시 후 동생이 뛰어가고,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자신을 잠시 쳐다보더니 동생을 그냥 가라 했단다. 이 계집애는 그 남학생이 자기를 보고 동생을 보내 주었단다.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걸 텔레파시로 느꼈다고 한다.

이상했다. 말도 한 번 한 적 없는 그 아이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언제인가 오랜 시간을 같이한 듯한 느낌! 이런 기분은 뭐지? 가끔은 담장 너머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쳐다보다 그를 찾고 있는 자신을 알고는 혼자 웃기도 했다.

그에 대해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어떤 아이길래 자꾸 생각나지?

입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건너편 운동장에 시선은 머물렀다.


알고 싶어요     노래 이선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주세요

비와 소녀 4

소녀는 그 남학생에 대해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걸 가끔 들어었다. 방과 후 친구들과 축구하는 것도 보았었다. 하굣길에 즐겁게 웃으며 잠시 돌아보다 눈도 마주친 기억이 있었다.
소년은 여자친구가 없다고 한다. 같은 교회 다닌다는 아이들도 잘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냥 인사만 하고 같이 분식집을 가거나 제과점을 가본 아이들도 없는 것 같다.

국민학교를 같이 다닌 아이들 말로는 여자 아이들과 사귀거나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착한 아이 정도로만 기억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아이가 방송반이란 말을 들었다. 아~~ 그럼 목소리도 좋다는 건가? 자꾸만 환상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드디어 소문의 출처를 알게 되었다. 그 방송반에 남동생을 둔 친구가 있었다. 역시 동생 있는 건 부러운 일이다. 그런데 가아는 이런 걸 말도 안 해주나? 참 나쁜 아아라 생각되었다. 1, 2학년 때 같은 반이기도 했었다. 사랑 앞에서는 우정도 별 의미가 없는 듯했다. 소녀는 이미 짝사랑을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 사서 선생님이 누구랑 통화하셨다. 아마도 옆 학교 사서 선생님인 것 같았다. 요즘 학생들 책 잘 안 읽고... 도서관이 한산하다는...  근데 한 학생은 입학고사가 3학년인데도 꾸준히 책을 읽는다고..   그 아이  중학교 졸업 전 목표 가운데 하나가 학교 도서관에 있는 한국 단편은 다 읽는 거라는 등 대단하다 하셨다. 참 별난 녀석이라 생각되었다. 소녀는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었다. 자기는 건강한 소녀이고 주인공 남자아이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 수다는 계속되었다. 3학년이고 방송반이란다. 귀가 전화 통화를 향해 곤두섰다. 그러면 방송반 동생을 둔 친구는 알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티안네고 알아낼까? 더 이상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나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괜히 엄마에게 화가 난다.

그리 가지 않을 것만 같던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끝났다. 이제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면 그 아이를 볼 수가 없다. 용기를 내어 같은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교회 가고 싶다 말했다. 거기서라도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말도 한 번 해 본 적 없는 아이를 좋아하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을 먹고 나니 일요일이 기다려졌다. 시간이 정말로 더디게 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교회 한 번 갈 걸 하는 후회도 되었다. 왜 갑자기 교회 가려냐고 친구들이 묻는다 고등학교 가서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둘러 대었다. 말을 해 놓고도 어색했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눈 빛이다.

그리 길게만 느껴지던 한 주가 다 지났다. 교회 앞에서 같이 갈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기다렸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저기서 온다. 여러 명이 같이 오는데 유독 눈에 띄윘다. 모두가 쳐다본다.

말이 라도 걸면 뭐라 할까? 애들은 왜 이리 늦는지?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찌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 긴 눈 맞춤! 짧은 눈인사! 그들은 뭐라 하는지 웃으며 지나갔다. 그중에 한 명은 뒤돌아 다시 쳐다본다.

이후 소녀는 한 참을 참았던 긴 숨을 내 쉬었다. 얼굴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덥다. 땀도 나는 것 같았다. 혹 빨개진 얼굴을 보고 비웃는 것은 아닐까?

비와 소녀 5

교회에서의 그는 조용했다.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한 가지 학교 생활과의 공통점은 주변에 항상 친구들이 있다는 정도였다. 예배 후 같은 학년이라며 다른 친구들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는 정도였다. 그 외에는 무심한 시선으로 오가다 마주칠 뿐이었다.

소녀는 친구들과 집으로 가려는데 소년이 멈춰 세웠다. 처음 나온 친구들에게 주는 교회배지인데  지금은 없어서 가지고 있던 것을 준다나!
사실 소년은 그냥 주는 것은 아니었다.

비와 소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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