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8일 차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38 샹그리아 먹다가 밤 9시에 도착한 날 https://brunch.co.kr/@2smming/183/
산티아고 순례길 18일 차
2018. 5. 31. 목요일
사하군(Sahagun) - 렐리고스(Relliegos)
아침에 길을 걷다 갑자기 니콜라를 마주쳤다. 니콜라는 순례길 거의 초반부터 종종 보던 친구인데 어느 새부터 보이지 않아서 궁금했던 친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도 보통 사람들처럼 걷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20~30km를 매일 성실하게 걷는데 비해 나는 미술관을 다녀오려 두 차례나 한 도시에서 2박을 하기도 했고 중간에 버스를 탄 적도 있다. 게다가 어제는 45km를 걸었으니 초반에 같이 걷던 사람들과는 만날 가능성이 없어 기대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기적처럼 갑자기 니꼴라를 마주친 것이다.
우리는 마주치자마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둥켜안았다. 이내 마음속에서 울컥 뭐가 올라오는 마음이 들었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친구를 만나게 되어서의 반가움과, 끝과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는 길의 유한함이 동시에 체감된 까닭이다. 반가움, 행복, 아쉬움, 슬픈 마음이 복합적으로 마음을 괴롭혔다. 어떤 말로 딱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울렁거렸다. 니콜라도 그랬던지 눈이 빨개지더니 눈물을 훔쳤다. 나와 수지도 함께 코를 훌쩍거리며 울었다.
전에 니콜라는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있었는데 이제는 혼자였다. 어느 한 도시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했다. 열심히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침 먹기 좋을 바가 나왔다. 니콜라에게 함께 가겠냐고 물어보니 니콜라는 아침을 이미 먹어서 계속 걷겠다고 했다. 우리는 니콜라가 길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니콜라가 가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길의 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18일 차, 길의 절반을 넘었다. 언제까지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한 친구들의 얼굴이 점점 드문드문해진다. 처음부터 며칠만 걸으려고 이 길에 온 사람들도 있고, 일신상의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친구들도 있다. 오늘 만난 친구를 내일은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당연하고 자명한 것인데 한동안 이를 인지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스쳐 지나갔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얼굴이 애틋해졌다.
한국 산티아고 네이버 카페에서 유명한 식당이 하나 있다. 바로 한국 '봉지 라면'을 직접 끓여주며 햇반까지 함께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라면을 직접 끓여주는 곳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가게 앞에 도착하니 입간판에 반가운 한글로 '라면, 밥'이라는 메뉴가 쓰여있었다. 냉큼 들어가서 라면과 햇반과 맥주를 시켰다.
가게에 있는 직원은 모두 스페인 사람이라서 봉지 라면을 과연 잘 끓일까?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사실 난 지금도 봉지라면의 물 맞추기에 실패하는데 물 조절을 잘할지, 면을 푹 익혀버리는 건 아닐지, 괜히 실망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많았는데 라면 국물을 한 술 뜬 후 그 마음은 깡그리 사라졌다. 한국의 분식집 라면처럼 얼큰+달달했고 면의 익힘도 적당했다. 나보다 훨씬 라면을 잘 끓이셨다.
햇반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점이 킥이었다. 여태까지 순례길에서 햇반 비슷한 걸 먹거나 냄비밥은 먹었어도 햇반을 먹어본 적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햇반을 즐겨 먹지는 않았던 터라 차이가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차가 컸다. 우선 밥알에 윤기가 돌았고 쌀알이 알알이 생동하고 있었다.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산뜻한 백미의 향과 은은한 단맛이 혀를 휘감았다. 식감이 픽하니 날아가지 않고 적당한 찰기를 머금고 있었다. 배가 부를까봐 1개만 시켰는데 그 선택을 후회할 만큼 빠르게 밥이 동났다. CJ제일제당은 괜히 대기업이 아니었다.
아침에 니콜라를 만나고 난 후라서 그런 건지 오늘 걸으면서는 유난히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예전에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 순례길을 걸으면서는 상당 부분 깨지고 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의 내 모습이 살짝씩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어려서부터 곱게 자라온 사람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들과 있으면 나는 말수가 적어진다. 내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나에 대해 그 어떤 정보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주 가끔은 대꾸도 하기 싫은 사람을 만난다.
나는 절대 고정적인 존재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관계의 상대성에 따라 내 모습은 가변적이며 가끔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00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던 게 어느 정도는 내 희망사항이 내재되고 반영되어 있다는 것도 느꼈다.
말이나 행동으로 내게 상처를 줘 아직까지도 미움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가끔 이전의 일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과거의 그 사람과, 지금의 그 사람이 여전히 같은 특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변할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그저 케미가 맞지 않았던 거다. 내게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에게 나쁜 사람인 건 아니다.
하루에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기준이 명확히 생기기도 했다. 명확하게는 달갑지 않은 사람의 기준이 공고해졌다. 내가 가장 참기 힘든 유형의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다.
어떤 날에는 번화한 도시에 있는 중국식 뷔페를 갔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 작은 다리에서 처음 보는 젊은 한국인 무리를 마주했는데 지나치는 우리를 보고 '뭐야 쟤네는 뭔데 인사를 안 해?'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같은 한국인이고 나이가 좀 더 어리면 서로 모르더라도 내가 마땅히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나 보다.
내가 한국어와 영어가 가능한 걸 보고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다음날 출발에 지장이 있는 일처리를 대뜸 해달라는 경우도, 다 같이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서로서로 음식을 나눌 때 숟가락과 포크만 들고 오는 사람도 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을 마음대로 사용한 후 치우지 않고 슬쩍 자리를 떠버린다든지, 같이 걷자고 해서 흔쾌히 OK 했는데 하루종일 사람들의 흉을 보거나, 자신의 자랑만 내내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여럿이 모여서 대화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거나, 자신의 대화만 95% 하는 사람들도 내겐 힘겹다.
이렇게 무례한 사람들을 싫어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나는 애초부터 선(善)한 사람은 아니다. 내가 선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마음을 할애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내게 선은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게 아니라 노력해야 하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좋은 길이니만큼 이런 사람을 이해해보려고도 했는데 이제는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이렇게 무례한 순간을 포착하는 순간 바로 그 관계를 종결시키기. 내가 마음을 써서 대하는 만큼, 내게 그만큼의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은 굳이 대화할 이유가 없다. 이곳은 더군다나 좋은 기억으로만 채우고 싶은 좋은 길이니까.
누군가 우리가 오늘 도착하는 렐리고스에 간장 치킨을 파는 바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듣는 순간 입맛이 싸악 돌았다. 길을 걸으면서 일반적인 치킨도 잘 보지 못했는데 간장 치킨은 아예 본 적이 없다. 보통은 마을에 도착해서 샤워도 하고, 짐도 정리한 후 음식점에 가는 편이지만 간장치킨은 절대 못참치.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입은 옷 그대로 가게로 달려갔다.
그런데 메뉴판을 아무리 봐도 '치킨'을 가리키는 메뉴조차 없었다. 아무리 내가 여기에 오기 전 벼락치기로 시원스쿨 스페인어를 배우긴 했지만 '닭'을 이르는 'pollo'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구글 번역기도 열심히 돌렸다. 하지만 정말 없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메뉴가 없어진 지 꽤 되었다고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알겠다고 하고 다시 메뉴판을 보기 시작했는데 주방장처럼 보이는 분이 우리 테이블로 걸어왔다. 메뉴는 없지만 비슷한 맛을 내보겠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고는 정말 간장으로 맛을 낸 홈메이드 치킨을 만들어주셨다. 흡사 교촌치킨의 초기 간장치킨 맛이 났고 약간은 서투른 맛이지만 최대한 간장 치킨에 가깝게 만드려고 한 맛이었다. 맛도 맛인데 다 떠나서 우리를 위해서 없는 메뉴를 만들어 준 고마움이 정말 컸다. 중간에 슬쩍 봤는데 핸드폰을 보면서 재료를 넣는 걸 봤다. 아마 구글에 'how to make soi sause chicken' 같은 걸 검색해 우리에게 만들어 줬을 거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선이 이 길에서는 자주 마주할 수 있을까. 이 길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우리는 감사인사를 100번쯤 하고 숙소로 돌아가서는 우철오빠와 S 언니를 데리고 와서 두 판의 간장 치킨과 맥주를 더 시켰다. 이렇게 좋은 곳은 열심히 먹어주는 걸로 고마움을 표현해야지!
치킨을 먹고 들어가는 길에 문을 연 자그마한 슈퍼가 있었다. 다양한 와인이 있었지만 눈에 띄었던 건 와인 매대 앞에 놓여있는 여러 병의 라벨 없는 와인들이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마을에서 직접 만든 와인이라고 했다. 길을 걷다 보면 텔레토비 동산처럼 작은 무덤처럼 보이는 것들에 자물쇠가 걸린 문이 있는 것들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와인 창고라고 했다.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레드 한 병을 사서 숙소로 룰루랄라 돌아왔는데 숙소에 잔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이윽고 깨달았다. 와인병으로 돌아가면서 마신다면 분명 흘리는 양도 상당할 테다. 방법이 필요했다. 맛있는 술 앞에선 기지도 빨리 발휘되었다. 내일 먹으려고 아껴둔 물을 한 입에, 아까 먹다 남은 콜라를 한 입에 털어내고 페트병을 비워 잔으로 만들었다. 각자의 잔에 누구 하나 서운하지 않게 정확한 양으로 배분하고 짠-을 했다.
생각했던 것처럼 맛도 기막혔다. 산미가 꽤 도드라진 편이었는데 맛의 균형감이 좋았다. 일반적인 와인보다 도수도 더 높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벌건 얼굴로 오늘 걸었던 길을, 같이 먹었던 치킨을 이야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이다음 도시, 레온에서 함께 에어비앤비를 잡기로 약속했다.
+
피곤할 법도 한데 우철오빠는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앉아 어른 글씨로 일기를 썼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3대 광기가 있다면 아마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 바른 글씨로 일기를 쓰는 사람, 술을 먹고 피곤한데도 일기를 쓰는 사람일 것이다. 우철오빠는 이 세 가지 속성을 모두 갖췄다.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순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