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밍 Mar 20. 2024

[산티아고술례길] 삼계탕 파티

산티아고순례길 20일 차


가장 첫 번째 글 : #1 산티아고'술'례길의 시작  https://brunch.co.kr/@2smming/52/
이전 글 : #40 오늘은 쏘주 까는 날 https://brunch.co.kr/@2smming/185/



산티아고 순례길 20일 차
2018. 6. 2. 토요일
레온(Leon)


꿀 같은 늦잠

아침 알람 한 번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못내 행복한 아침이다. 나는 코를 고는 벌이자 특권으로 온전한 하나의 방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평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내 방문을 똑똑 거리거나, 내가 일어났는지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날에 일어날 수는 없지. 잠깐 깼다가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금방 곯아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열한 시 반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베란다에 나가서 레온의 풍경을 보면서 멍도 때리고, 도시를 느끼기 위해 세포라에 가서 떨어진 화장품을 좀 사며 레온 거리 구경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소파에 누워서 다 같이 뒹굴거렸다. 누구는 일기를 쓰고, 누구는 핸드폰으로 친구들의 밀려있는 소식을 확인했다. 누구는 배낭을 정비하고, 누구는 쪽잠을 청했다. 고요하고 분주했다. 커다란 창문으로 초여름의 바람이 불어오고 아파트 아래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레온 대성당의 정각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이 꼭 휴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수지가 외쳤다.


"파스타 먹고 싶어!"


'파스타'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중요한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도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먹는 파스타.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좀처럼 파스타를 파는 식당을 만나기 어려워 한참 동안 먹지 못했다. 당장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우철오빠와 S 언니는 그렇게 끌리지 않는다고 해서 나와 수지만 파스타를 먹으러 길을 나섰다. 지금 파스타를 먹지 않으면 또 언제 파스타를 먹을지 알 수 없다는 조급함도 한 몫했다.


레온 구경

파스타를 먹으러 나왔지만 오랜만에 도시를 본 우리는 시골쥐처럼 이곳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마사지 샵이 있는 것도, 예쁜 옷가게가 있는 것도, 사람들이 줄을 서있는 빵집을 보는 것도 간만에 보는 풍경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길목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무엇이든 엄청난 행사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서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오늘 어떤 학교의 졸업식이라고 했다. 도대체 무슨 학교길래 도로를 막고 졸업식을 하는 거지? 궁금했지만 이내 저 멀리서 경쾌한 나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관학교의 졸업식이자 가두행진이었다.



군악대가 지나가고 졸업을 맞이하는 생도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행진을 하고 있었다. 군중 속에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생도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가족이 아닌 구경꾼들도 가득 모여 이름 모를 사람들의 졸업을 축하하고 있었다. 청량한 하늘 아래 새로운 시작을 앞둔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고 있고 한쪽길에는 가로수가, 다른 쪽 길에는 온전한 축하를 보내는 사람들이 가득한 분위기에 함께하고 싶었다. 우리도 그 안에 섞여 행렬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마음껏 환호를 보내고 박수를 쳤다.






파스타를 먹으러 들어간 Pizzeria Ragazzi 식당은 체크무늬 식탁보가 있는 정겨운 곳이었다. 까르보나라를 먹고 싶어 구글맵 리뷰를 탈탈 털어 '까르보나라'의 리뷰가 가장 좋은 곳을 찾아낸 만큼 기대도 상당했는데, 거의 한 접시당 2인분은 족히 되어 보이는 파스타 접시 2개를 점원이 들고 왔다. 서가앤쿡의 파스타처럼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포크에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서 한 입 입에 넣으니 딱 우리가 원했던 까르보나라의 맛이었다. 파스타 소스가 면보다 살짝 많으면서도 맛은 또 꾸덕한 치즈맛이 나는, 버섯과 양파도 충실히 들어간 까르보나라. 면보다 베이컨이나 재료가 더 많아 부지런히 먹어야만 하는 혜자 파스타. 여기는 유럽이니까 혹시 이탈리아식 정통 까르보나라가 나올까 걱정했는데 전혀 아니라 다행이었다.


맛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볼로네제도 시켰는데 이것 역시 홈메이드 맛이었다. 정성스럽게 토마토소스를 만들어 내어 치즈가루를 잔뜩 뿌린 맛있는 맛. 처음에 파스타 양이 너무 많아서 절반은 넘게 남기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먹성 좋은 우리는 조금만 남기고 배를 통통 두드리며 가게를 나섰다.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삼계탕 파티

오늘은 좀 더 넓은 에어비앤비로 옮기는 날. 큰 에어비앤비 예약은 우철오빠가 했다. 집 앞에 도착해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다 왔다고 알렸는데 이런, 이 호스트는 영어를 아예 할 수 없고 스페인어만 가능한 호스트였다. 우철오빠가 에어비앤비 메시지로 도착을 알리자 호스트는 전화를 걸어 스페인어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리가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페인어는 몇 개 없었는데, '안녕하세요(Hola)', '부엔 까미노(Buen Camino)', '네(Si)', '감사해요(Gracias)'가 전부였다. 갑작스러운 스페인어 폭격에 아득해진 우철오빠는 우선 알고 있는 스페인어와 어깨너머로 들었던 스페인어, 와중에 섞인 영어를 마구 내뱉다가 갑자기 '씨씨씨 싸싸싸 쎼쎼쎼'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순조롭게 소통이 꼬이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겨 길에 쓰러져서 웃었다. 오빠가 하고 싶은 말은 ‘Si(씨, 네)’였다.


우여곡절 끝에 에어비앤비에 들어간 우리는 에어비앤비라서만 가능한 요리, 삼계탕을 저녁 메뉴로 정했다. 알베르게에서는 여러 명이서 가스레인지를 함께 쓰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걸리는 요리는 절대 할 수 없다. 마트에서 최대한 한국과 비슷한 재료를 찾아 장을 보고, S 언니가 마법처럼 삼계탕을 만들어냈다. 진짜 환상의 맛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깊은 맛이 나는지, 복날에 가던 삼계탕집의 맛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은 육수로는 닭죽까지 야무지게 해냈다. 역시 미친 맛이었다.



오늘은 우리가 만든 샹그리아를 곁들였는데 닭 요리와의 페어링이 엄청났다. 기름기 있는 음식에 샹그리아를 털어 넣으면 요리와 와인의 향이 함께 돋워졌다. 입 안에서 풍미가 살아나면서 부드럽게 조화를 이뤘고, 평소보다 소다수를 더 많이 넣으니 청량감도 있어서 홀짝홀짝 반주로 먹기 좋았다. 완벽했다.



이 길을 걷기 전에는, 정확히는 이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는 순례길을 한식 없이도 걸을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가 요리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양식과 한식의 적절한 조화를 지켜가며 식사를 하고, 풍성한 미식 여행이 되어가는 걸 느낀다. 만약 혼자 걸었더라면 보카디요*나 또르띠야**만 먹느라 분명 입천장도 까지고 음식이 물렸을 거다.


*바게트로 만든 스페인식 샌드위치

**채소를 넣어 만든 스페인식 오믈렛



내일도 레온에서 머물기로 했다. 밤까지 레온에서 머물고 밤 열두 시가 넘어 날을 새며 걸어보기로 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었는데, 이젠 다섯이라 할 수 있다. 벌써 내일이 기다려진다.


오늘도 술람찬 하루, 그리고 사실 여긴 #산티아고순례길



매거진의 이전글 [산티아고술례길] 오늘은 쏘주 까는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