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전남편의 목소리에는 예전과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뭐라고 했는데?"
"지난번 만난 후로 계속 엄마 이야기를 해. 특히 찬이가 심해. 학교에서도 친구들한테 엄마 자랑을 한다고 선생님이 연락 오셨어."
가슴이 뭉클했다. 아이들이 나를 자랑한다니.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는 건 아닐까?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좀 더 자주 만나는 게 어떨까 해. 물론 조건은 여전히 있어야겠지만."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처음 만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너무 경직되게 생각했나 싶어."
며칠 후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에는 놀이공원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으로 전남편이 직접 제안한 장소였다.
놀이공원 입구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
"엄마! 우리 왔어!"
두 아이가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지난번보다 더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오늘은 뭐 타고 싶어?"
"롤러코스터!"
"나는 회전목마!"
아이들의 의견이 갈렸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전남편이 조금 멀리서 따라오며 지켜보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찬이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엄마, 무서워?"
"엄마는 찬이가 옆에 있어서 안 무서워."
"나도! 엄마가 있어서 안 무서워!"
아이와 함께 소리 지르며 웃는 순간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랐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이렇게 소중한 줄 진작 알았다면...
회전목마에서는 환이가 내 옆에 앉았다.
"엄마, 나 이거 제일 좋아해."
"왜?"
"예쁘잖아. 엄마처럼."
아이의 순수한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순간들을 더 많이 만들어주고 싶었다.
점심시간에 푸드코트에 앉아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어?"
"응! 나 반장이야!"
찬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아이는 씩씩하게 자라고 있었다.
"정말? 우리 찬이가 반장이라니!"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상장도 받았어!"
"그래? 다음에 보여줘."
환이도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 좋아하는 선생님 이야기, 배우고 있는 피아노 이야기까지.
"엄마, 나 피아노 칠 줄 알아!"
"정말? 뭐 칠 수 있는데?"
"작은 별! 엘리제를 위하여도 조금!"
아이들의 성장한 모습을 보니 뿌듯하면서도 아쉬웠다. 이런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팠다.
전남편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앉았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네."
"응. 나도 행복해."
"너...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어떻게?"
"표정이 밝아졌어. 예전보다 건강해 보이고."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어. 아이들한테 또 상처를 줄까 봐. 하지만 지금 보니까... 네가 정말 노력하고 있구나 싶어."
"고마워. 정말 많이 달라졌어. 이제는 아이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어."
"책 쓴다는 얘기 들었어. 대단하네."
"아직 시작 단계야. 잘 될지 모르겠어."
"잘 될 거야. 너라면 할 수 있어."
전남편의 격려가 의외였다. 예전 같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대화였다.
놀이공원에서 보낸 하루는 정말 행복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함께 탄 놀이기구, 같이 먹은 솜사탕... 모든 것이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아쉬워했다.
"엄마, 다음에는 언제 만나?"
"곧 또 만나자."
"약속해!"
"응, 약속해."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정말로 희망이 보였다. 조금씩이지만 가족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오늘의 일을 원고에 적기 시작했다. 아이들과의 재회, 변화된 관계, 새로운 희망... 이 모든 것들이 내 책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었다.
며칠 후 할머니가 퇴원하셨다. 많이 좋아지셨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할 상태였다. 집에서 요양하시면서 약물 치료를 지속하기로 했다.
"할머니, 이제 집이 편하시죠?"
"그럼. 역시 집이 최고야."
할머니 집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혼자 계시기에는 아직 위험했고, 대훈이도 직장 때문에 매일 오기 어려웠다.
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원고 작업을 계속했다. 할머니는 내가 쓰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가끔 조언도 해주셨다.
"매화야,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쓰지 마라."
"왜요?"
"사람들이 읽다가 우울해질 수 있어. 웃음도 있어야 해."
할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내 인생에는 슬픈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놀던 즐거운 어린 시절, 사랑했던 남편과의 행복한 시간들, 아이들과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
원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행복했던 기억들도 더 자세히 써 내려갔다. 특히 아이들과 관련된 부분은 읽는 사람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달 후 이수현 부장이 할머니 집으로 찾아왔다. 중간 점검을 위해서였다.
"와, 정말 많이 쓰셨네요!"
"할머니가 계셔서 집중이 잘 돼요."
이수현 부장은 그동안 쓴 원고를 꼼꼼히 읽어봤다. 중간중간 감탄사를 내며 읽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정말 잘 쓰셨어요. 특히 아이들과의 재회 부분은 정말 감동적이에요."
"감사해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을 텐데..."
"아니에요. 문장력도 생각보다 훨씬 좋으시고, 무엇보다 진정성이 느껴져요."
할머니께서도 이수현 부장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 매화 책 만들어주신다면서요? 고맙습니다."
"저야말로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 나올 것 같아요."
그날 저녁 세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책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표지 디자인, 마케팅 방법, 출간 기념 행사까지...
"혹시 사인회도 하게 될까요?"
"당연하죠! 독자들과 만나는 것도 작가의 중요한 일이에요."
사인회라니. 상상만 해도 떨렸다. 정말 내가 작가가 되는 건가?
이수현 부장이 돌아간 후 할머니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매화야, 정말 꿈같지 않니?"
"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할머니는 언제부터 알았는지 모르겠다. 네가 특별한 아이라는 걸."
"할머니..."
"어릴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어. 힘든 일이 있어도 꼭 이겨내는 힘이 있었거든."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그동안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할머니는 나를 믿어주셨구나.
"할머니 덕분이에요. 할머니가 포기하지 말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니야. 네 힘이야. 할머니는 옆에서 지켜본 것뿐이야."
그날 밤 원고를 쓰면서 할머니에 대한 감사함을 더 깊이 담았다. 할머니의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며칠 후 전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매화야, 이번 주말에 아이들이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면 안 될까?"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이었다. 아이들과 하룻밤을 함께 지낸다니!
"정말? 괜찮은 거야?"
"아이들이 할머니도 보고 싶어 하고... 네가 쓰는 책 이야기도 듣고 싶어 해."
"할머니께 물어보고 연락드릴게."
할머니께 말씀드리자 당연히 좋다고 하셨다. 오히려 더 기뻐하셨다.
"우리 증손주들이 온다고? 얼마나 좋아!"
"할머니, 무리하시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 주말,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왔다. 오랜만에 집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엄마가 쓰는 책 어디 있어?"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집 안을 둘러봤다. 내가 원고를 쓰는 책상을 보더니 신기해했다.
"엄마, 이게 다 엄마가 쓴 거야?"
"응. 엄마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고 있어."
"우리 이야기도 나와?"
"당연하지. 찬이랑 환이가 주인공이야."
그날 밤 아이들과 함께 자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들, 미래에 대한 꿈들...
"엄마, 책이 나오면 친구들한테 자랑해도 돼?"
"물론이지. 자랑 많이 해."
"엄마 정말 대단해. 우리 엄마가 작가라니!"
아이들의 순수한 자랑과 사랑을 받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에게 정말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떠나보내면서 약속했다.
"다음에도 또 놀러 와. 그때는 엄마 책이 완성돼 있을 거야."
"정말? 빨리 보고 싶어!"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매화야, 이제 정말 가족 같구나."
"네.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다행이다. 할머니 소원이 이루어지는구나."
할머니의 소원. 우리 가족이 다시 행복해지는 것.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꿈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다.
그날 밤 원고를 마저 쓰면서 확신했다. 이 책은 단순히 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새벽 2시,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서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드디어 초고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수현 부장이었다. 이른 시간의 연락이 걱정스러웠다.
"부장님, 무슨 일이세요?"
"매화씨, 좋은 소식이 있어요. 대형 서점에서 저희 책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