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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행복

19화

by 런던도서관

다음날 아침 일찍 출판사에 도착했을 때 사무실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김진우 대표와 이수현 부장, 그리고 마케팅 팀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모두의 표정이 진지했다.


"매화씨, 앉으세요."


김 대표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책 출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전화로 말씀 드렸지만 KBS에서 연락이 왔어요. 매화씨를 '희망을 찾는 사람들'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싶다고 하네요."


예상과 전혀 다른 소식이었다. KBS는 전국 방송사 중에서도 시청률이 높은 곳이었다.


"방송 출연이요?"

"네. 그런데 이게 보통 인터뷰가 아니에요. 생방송이고, 시청자들과 직접 소통하는 프로그램이거든요."


마케팅 팀장이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매주 화요일 저녁 8시에 방송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이었다. 평균 시청률이 15%를 넘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언제 방송인데요?"

"이번 주 화요일이에요. 시간이 촉박하죠."


사흘 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흔히 오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물론 거절하셔도 돼요."


김 대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전국 방송에 나가서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하지만 동시에 기대도 됐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해보겠어요."

"정말요? 생방송이라서 부담스러우실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진실을 말하는 건데 뭐가 어렵겠어요."


그날부터 방송 준비에 돌입했다. 이수현 부장과 함께 예상 질문들을 정리하고 답변을 준비했다. 특히 어려운 부분은 자살 시도 경험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였다.


"너무 자세히 말하면 자극적일 수 있고, 너무 대충 넘어가면 진정성이 떨어질 수 있어요."

"솔직하게 말할게요.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집에 돌아가서 할머니께 방송 출연 소식을 전했다.


"할머니, 제가 텔레비전에 나가게 됐어요."

"정말? 우리 매화가?"

"네. KBS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이에요."


할머니는 걱정되는 표정과 자랑스러운 표정을 동시에 지으셨다.


"떨리겠구나."

"네. 무서워요."

"괜찮다. 네 이야기로 누군가가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면 용기를 내거라."


할머니의 말씀이 큰 힘이 됐다.

아이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찬이, 환이,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간다."

"정말? 어떤 프로그램이야?"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야."

"와! 우리 엄마가 텔레비전에 나와! 친구들한테 자랑해도 돼?"

"당연하지."


아이들의 순수한 반응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방송 당일.

KBS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화려한 조명들과 여러 대의 카메라가 무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관객석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분장실에서 메이크업을 받으면서도 계속 떨렸다. 손에서는 식은땀이 났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긴장 많이 되시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다정하게 물었다.


"네. 이런 건 처음이라서요."

"괜찮아요. 진정성 있게 말씀하시면 시청자들이 다 알아들어요."


곧 스태프가 와서 대기실로 안내했다. 진행자인 김소라 아나운서가 미리 인사를 하러 왔다.


"안녕하세요, 홍매화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매화님 이야기를 기다리고 계세요. 편하게 하시면 돼요."


김소라 아나운서의 따뜻한 말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드디어 방송이 시작됐다. 스튜디오 불빛이 환하게 켜지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희망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극한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홍매화 작가님입니다."


박수소리와 함께 내가 소개됐다. 무대 위로 걸어가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안녕하세요."


겨우 인사를 건넸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인터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소라 아나운서의 질문들은 예상보다 깊이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특히 아빠와 함께 행복하게 살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니까 너무 억울했어요."


말하는 도중 목이 메었다.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픈 기억이었다.


"그 후에도 많은 시련이 있으셨죠?"

"네. 학대도 당했고, 결혼 생활도 실패했고... 아이들과도 헤어져야 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질문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답하기는 어려웠다.


"아이들을 잃었을 때요. 그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실제로... 실제로 죽으려고 했었어요."


스튜디오가 조용해졌다. 관객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살아계시잖아요. 다시 살아갈 용기는 어디서 나왔나요?"

"할머니요. 할머니가 계셨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카메라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떠세요?"

"행복해요. 정말 행복해요. 아이들과도 다시 만나게 됐고, 할머니도 건강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제 이야기를 책으로 낼 수 있게 됐고요."

"마지막으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한 마디 해주신다면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 너머에 있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지금은 터널 속에 있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거예요. 저처럼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을 거예요."


방송이 끝나자 관객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스태프들도 하나같이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정말 멋진 인터뷰였어요."


김소라 아나운서가 진심으로 말했다.

분장실에서 메이크업을 지우고 있는데 매니저가 뛰어왔다.


"매화씨! 지금 인터넷이 난리예요!"

"무슨 일이에요?"

"실시간 검색어 1위가 홍매화예요! 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마다 매화씨 이야기로 가득해요!"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각종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내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봤다.


"정말 용기 있는 분이시네요. 저도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데 용기를 얻었어요."

"눈물이 멈추지 않네요.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책 꼭 사서 읽을게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많이 공감됐어요."


따뜻한 반응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수현 부장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매화씨! 대박이에요! 방송 끝나고 한 시간 만에 사전주문이 2천 권 돌파했어요!"

"정말요?"

"네! 그리고 각종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어요!"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께 방송을 어떻게 보셨는지 물어봤다.


"매화야, 정말 잘했다. 할머니가 다 울었네."

"할머니..."

"네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을 사람들이 많을 거야."


아이들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엄마! 텔레비전에서 봤어! 친구들이 다 부러워해!"

"정말?"

"응! 우리 엄마가 제일 멋있어!"


아이들의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눈물이 또 났다.

전남편에게서도 문자가 왔다.


'방송 잘 봤어. 정말 대단해. 아이들도 엄마를 자랑스러워해.'


동생 대훈이는 아예 집으로 찾아왔다.


"누나, 정말 대단해. 누나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뭔 소리야."

"진짜야. 방송 보는데 울컥하더라. 우리 누나가 이렇게 힘든 시간을 혼자 견뎠구나 하면서."


그날 밤 늦게까지 온라인 반응들을 확인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유명세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길에서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고, 사생활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며칠 후 출판사에서 또 다른 소식이 왔다.


"매화씨! 정말 기뻐할 소식이 있어요!"


이번에는 어떤 일인가 했더니...


"전국 베스트셀러 차트에 진입했어요! 그리고 대형 출판사에서 전국 순회 북콘서트를 제안했어요!"


정말 꿈만 같았다. 내 인생이 이렇게 극적으로 바뀔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데 그때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해외 출판사였다.


"안녕하세요, 홍매화 작가님. 저희는 일본 출판사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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