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의 희안한 새해 맞이.
재즈를 즐겨 듣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레이블이 Blue Note Records다. 독일 출신의 알프레드 라이온과 맥스 마굴리스에 의해 1939년 설립된 이 재즈 음반사는 John Coltrane – Blue Train, Art Blakey & The Jazz Messengers – Moanin’ 등 재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반들을 세상에 내놓은 대표적인 레이블이다. 그리고 이름은 같지만, 별개의 법인으로 운영되는 Blue Note Jazz Club이 존재한다. 처음에는 블루노트 레코드에서 직접 운영하는 공간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법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꽤나 의외라는 느낌이 들었다. 블루노트 재즈 클럽은 뉴욕을 시작으로 밀라노, 상하이, 도쿄까지 공연장을 확장해 왔다고 한다.
일본은 재즈가 탄생한 미국이나 유럽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재즈를 사랑하는 나라다. 재즈를 들을 수 있는 공간, 즉 재즈 클럽과 재즈 킷사(喫茶)의 밀도와 지속성만 놓고 보면 오히려 본토인 미국보다 한 수 위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아마 아시아권에서 재즈를 가장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연주자들이 가장 많이 공존하는 곳이 일본일 것이다.
나는 2025년, 갑작스럽게 일을 정리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쉬는 김에 일주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 예전부터 이름만 익히 들어왔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도쿄 미나토구의 블루노트 도쿄가 떠올랐다. 그렇게 도쿄 여행 계획은 비교적 단순하게 정해졌다.
재즈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 어디든 여행을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라이브 연주가 있는 재즈 바를 찾는 버릇이 생겼다. 도쿄는 워낙 넓고 재즈 바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역시 블루노트 도쿄일 것이다. 도쿄가 먼저였는지, 블루노트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서로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블루노트 도쿄는 사실 워낙 유명해서 재즈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만화 <블루 자이언트>에서 주인공인 '다이'와 '유키노리', '슌지'가 공연을 하는 것을 꿈꾸는 '쏘 블루'의 원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블루노트 도쿄는 재즈 아티스트들에게는 꿈의 공간일 것이다.
노트북으로 블루노트 도쿄의 공연 일정을 훑어보던 중, 12월 31일에 Bob James quartet의 공연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공연이라는 점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끌었던 것은 22시 타임 공연에서 새해 카운트다운이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트콤인 How I Met Your Mother와 Friends를 떠올리면, 수많은 에피소드 속에서 늘 반복되는 장면이 있다. 친구들과 함께 새해를 카운트다운하며, 막 시작된 새해를 마치 전혀 다른 가능성의 시간인 것처럼 축하하는 순간들. 그 장면들을 볼 때마다, 다음 해에는 정말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비록 미국도 아니고, 곁에 친구들도 없었지만, 타지에서 맞이하는 새해라면 또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이 꽤 부담스러웠음에도, 망설임 없이 카드 정보를 입력해버렸다. 해당 카운트다운 공연은 샴페인 차지가 별도로 포함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가격은 조금 더 올라갔다. 샴페인을 제외하는 선택지는 없는 듯 보였다.
공연은 도쿄에 도착한 당일 밤에 예정되어 있었다. 늦은 시간의 공연이었지만, 하루는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도착하자마자 직장에서 연락이 와 급히 보고서를 수정해야 했고, 호텔에 체크인한 뒤 1~2시간 정도는 노트북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모든 일을 마친 뒤 간단히 저녁을 먹고 공연장으로 향했는데, 거리의 카페들은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아마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 대부분 일찍 영업을 마친 듯했다.
오모테산도 쪽에 스타벅스가 보이긴 했지만, 블루노트 도쿄 근처에도 당연히 카페 하나쯤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지나쳤다. 그러나 공연장 주변에서는 카페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점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패밀리마트에서 산 따뜻한 캔커피를 마시며 혼자 시간을 보냈다.
공연 시간이 되어 블루노트 도쿄에 도착했을 때, 입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블루노트 도쿄의 외관은 예상보다 아담했지만, 길게 솟은 직사각형 형태의 목재 건물에 파란 조명이 띠처럼 둘러져 있어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인상을 주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벽면을 가득 채운 재즈 아티스트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한 공간 안에 재즈의 역사가 겹겹이 축적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직원에게 코트를 맡기고, 오늘 공연과 관련된 굿즈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혼자 방문한 사람은 거의 나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입장 시간이 되자 관객들은 나란히 줄을 서서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예약자 정보를 확인한 뒤 들어선 공연장은 만화이자 영화인 <블루 자이언트>에 등장하는 ‘쏘 블루’를 떠올리게 할 만큼 분위기가 닮아 있었고, 전반적으로 고급스럽고 단정한 인상이었다. 직원 한 분이 직접 자리까지 안내해 주며 음식과 술을 주문하는 방식도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음식은 술의 안주에 그치지 않고, 파스타와 스테이크까지 아우르는 식사 메뉴로도 충분할 만큼 폭넓게 준비되어 있었다. 술 메뉴 중에는 그날 무대에 오르는 아티스트를 연상시키는 칵테일을 매번 ‘스페셜 메뉴’로 선보이는 듯했는데, 음악과 음료를 하나의 경험으로 엮으려는 의도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구매한 티켓에는 샴페인 한 잔이 포함되어 있었고, 크게 허기진 상태는 아니어서 안주로는 모양이 조금 특이한 감자튀김 하나만 주문했다. 맛은 특별할 것 없이, 말 그대로 평범한 감자튀김이었다.
자리에 앉으면 작은 카드 한 장을 건네받는데, 공연이 끝난 뒤 나가기 전에 그 카드를 제출하면 음식과 음료를 한 번에 결제하는 시스템이었다. 혼자 방문한 관객의 경우에는 반드시 합석을 해야 하는 구조였다. 내가 함께 앉게 된 분은 괌에서 일본으로 여행을 온 사람이었는데, 현재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재즈를 무척 좋아해 도쿄 여행을 계획하면서 자연스럽게 블루노트 도쿄를 일정에 넣게 되었다고 했다.
짧은 대화를 나누며 재즈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처음에는 쿨 재즈에 빠지면서 재즈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고, 1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클럽 에반스에도 다녀갔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에는 국적이 없다’는 말이 결코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 위 스크린에는 앞으로 예정된 공연들을 소개하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2024년 내내 정말 많이 들었던 Samara Joy의 공연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로 다음 달에 이곳에서 무대에 오를 예정인 듯 보였다.
공연 시간이 되자 Bob James quartet무대에 올랐다. 1939년생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놀라울 정도로 정정해 보였다. 무엇보다 연주는 음원으로 들을 때보다 라이브에서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다. 체화된 연륜은 더할 나위 없었고,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테크닉은 마치 완벽한 타이밍에 건반을 누르는 법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도사와도 같았다.
Andrey Chmut의 색소폰은 매우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음색으로 곡을 연주했고, Michael Palazzolo와 James Adkins의 연주는 무대를 쉼 없이 함성으로 채웠다. 각자의 테크닉은 돋보였지만, 무엇보다도 이 네 사람이 만들어내는 호흡이 공연 전체를 단단하게 끌고 가고 있었다.
열성적인 연주가 이어지던 중, 무대 뒤 스크린에서 조용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연주와 사람들이 숫자를 외치는 그 순간, 두근거림과 함께 묘한 서글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5… 4… 3… 2… 1.
새해가 되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샴페인과 칵테일 잔을 들고 옆 테이블, 앞 테이블, 뒤 테이블의 낯선 얼굴들과 눈을 마주치며 “Happy New Year”를 외쳤다. 공연이 모두 끝난 뒤에도 관객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고, 잠시 후 무대 위로 다시 돌아온 연주자들은 Auld Lang Syne을 앵콜곡으로 연주했다.
블루노트 도쿄를 나선 뒤에는 새해를 맞아 연장 운행 중이던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냥 걷고 싶어졌다. 그렇게 미나토구에서 시부야까지, 추운 겨울 코트를 꽁꽁 여미고 40분쯤을 걸었다. 도시의 새해는 생각보다 조용했다가, 시부야에 다다르자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문득, 내가 이런 새해를 맞이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과분하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새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