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달 여행 : 빈, 부다페스트

내 생에 가장 길었던 여행

by 이사공

한 달은 길까, 짧을까? 인터넷 세상엔 1년, 2년을 여행만 하며 보내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인다. 어떤 이는 끝을 기약하지 않은 여행을 무한정 다니고 있기도 하다.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는 일 년을 크게 두 가지 일을 하며 보낸다. 여행을 하고 있거나, 여행을 계획하고 있거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상태일 때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여행 영상을 많이 찾아보게 된다. 그러면 한국에 돌아올 계획이 전혀 없어 보이는, 긴긴 여행을 하는 이들만 잔뜩 눈에 띄곤 한다. 부럽다. 우리는 이 한 달의 시간을 내는 데도 1년도 더 전부터 고민하고 준비하고, 그러면서도 정말 이 한 달이 오긴 오는 것인지, 진짜로 진짜인 것인지 비행기를 타고 이국의 공항에 도착해 그 땅을 딛고 설 때까지도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 달은 우리에게는 매우 긴 시간이다.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021.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139.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146.jpg

아니다 한 달은 짧았다. 한 달 치 여행의 첫걸음을 디딜 때부터 나는 애가 탔다. 우리가 걸을 수십만 보의 걸음에서 한 보, 한 보 줄어드는 것이 슬펐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낯선 공기로 숨을 쉬면서도 불현듯 그 슬픈 기분이 스치곤 했다. 끝도 없이 행복한 와중에도 슬픔이 스며들 자리가 있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하긴 나는 원래도 그런 이상한 습성이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에 벅찬 행복감이 느껴질 때면 혹시 꿈은 아닌가 싶어 내 볼을 꼬집어 확인해 보곤 하는 것이다. 그 행동엔 이것이 현실임을 확인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꿈이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깨달아 상처를 덜 받고 싶다는, 실망을 덜 하고 싶다는 방어적인 마음도 얼마간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잔디밭을 뒹굴며 혀를 내밀고 헥헥 대는 저 강아지처럼 그냥 행복하면 되는데, 나는 뭐가 그리도 겁이 나는지 늘 행복의 일부는 그런 걱정들로 인해 유실되어 버리곤 한다.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208.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348.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401.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514.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452.jpg

한 달 여행이 바닥을 보일수록 우리는 점점 더 숙소로 늦게 돌아왔다. 해가 질 때까지 최대한 긴 하루를 보내곤 했다. 맛있는 빵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독특한 메뉴가 있는 식당을 찾아 점심을, 시원한 술이 있는 곳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도 가보고, 지도에 후기도 없는 가게도 들어가 보았다. 하나하나가 다 좋았다. 여행을 가면 불편한 것이 많아 온갖 불만과 불평이 움틀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다행히 체질인지 무엇을 해도 쉽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맛이 없으면 그것으로도 추억을 삼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쉬울 것이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난 후엔 다시 돌아오고 싶은 순간으로 고스란히 남을 걸 아는데 말이다.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612.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633.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641.jpg

모 연예인이 방송에서 여행보다는 일하면서 겪는 게 가장 큰 경험이라고 한 답변이 한동안 인터넷에서 주목을 받았었다. 대책 없이 일을 관두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걱정 어린 마음을 담아 던진 조언일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행은 낭비일까? 취업을 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라는 것을 갖춘 후에야 떠날 수 있는 것이 여행일까? 자리를 잡는다는 것, 그러니까 그 ’안정‘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어려서 아는 것 없이 여행을 가면, 중요 관광지들을 찾아 방문하는 것만이 의무인 양 우선순위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한 채 뻔한 여행으로 마무리 되어버릴 수 있다. 모든 여행에는 조금의 후회는 남기 마련이기에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아쉬운 부분이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여행의 근육이 자라는 과정이다. 언젠가 내가 그 ‘안정’이라는 것을 찾고 드디어 여행을 떠나야 할 때, 나는 그 과정들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수만 가지 경험들로 채워지는 것인데, 늦게 출발할수록 채워갈 시간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906.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0928.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1007.jpg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11016.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0945.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009.jpg

하루는 이날도 여지없이 수만 보의 걸음을 채우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였다. 가정집처럼 생긴 구조에 거실을 공유하는 곳이었는데,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이 거실 테이블에서 휴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그 큰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우리를 보았다고. 덕분에 짐 내려두는 것도 까먹고 잠시 이야길 나누었는데, 우리에게 유럽의 ‘내일로’같은 프로그램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냐 물어왔다. 본인들도 그 패스를 이용 중이라며 반갑게 다가왔다. 알고 보니 그 패스는 학생들만 이용 가능한 것 같았다. 이 친구들은 독일에서 온 고등학생들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쉬는 기간이라고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학기 중 등교를 하지 않는 기간이 몇 달쯤 있어 친한 친구와 둘이 유럽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지금은 한 달째 되었으며, 다음 목적지 정도는 정해뒀지만, 앞으로의 구체적인 여행 계획은 없다고 했다.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043.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146.jpg

고등학생 아이들이 이렇게 긴 여행을 다니는 게, 나는 첫째로 신기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이들과같이 자그마한 가방을 하나씩 둘러메고 긴 시간 여러 나라를 여행 다니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진 않았다. 특히 고등학생은 입시를 앞두고 있어 대부분이 책상 앞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 십 대의 여름에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만 해도 고등학교 땐 학교, 집, 독서실만 반복하다 수능이 끝난 후엔 미술 실기를 준비하느라 다시 한번 전쟁을 치렀다. 그나마 날이 아리게 춥긴 해도, 수능이 끝나면 드디어 숨돌릴 시간이 생기는데 나는 그마저도 없었던 셈이다.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236.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248.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352.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420.jpg

둘째로는 부러웠다. 해가 지고 가게들도 문 닫는 저녁이 오자 그 둘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아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열어둔 창문에서는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시원한 음료를 한 잔씩 옆에 둔 채 게임에 집중하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우리가 1층 현관문을 여는 데 어려움을 겪자 흔쾌히 따라 내려와 잠금장치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 주곤 올라갔다. 마치 이 숙소에 오래 지낸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들도 분명 오늘 도착했는데 말이다. 그들은 이 공간이 익숙한 게 아니라, 여행에 익숙해진 것이겠지. 나는 낯선 숙소에 도착했을 때 느껴지는 그 어색함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처럼 낯선 공간이 편안해지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나보다 한참 고수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하는 것이 쉬워 보이면 그게 고수라고들 하니까.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442.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513.jpg

여행을 가서 꼭 경험을 쌓고, 무언가를 배워 돌아와야 하는 걸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행은 여행을 배우러 가는 것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여행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여행의 경험은 노는 것인데, 노는 데 무슨 기술이냐 하겠지만 이게 그렇지가 않다. 나는 아직도 여행을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잘’이라는 것은 절대평가의 개념은 아니다. 우리는 9년 전 신혼여행으로 유럽에 오기 전까지는 3박 4일이 넘는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짐을 어떻게 싸야 하는지에서부터 가방은 어떤 사이즈, 신발은 무엇을 신고, 숙소는 어느 위치에 잡으며 각각의 날들은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결국 우리는 5월 유럽의 생각지 못한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이미 봄, 여름옷으로 교체된 옷 가게들에서는 겉옷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저찌 겨우 찾은 얇은 겉옷을 한 벌 사서 여행 내내 단벌 신사로 다녔다. 거대한 캐리어를 챙겨왔음에도 유용한 물건은 몇 없었던 것 같다. 유럽의 울퉁불퉁한 돌길과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그 거대한 캐리어의 바퀴는 결국 박살이 났다.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620.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645.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705.jpg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정말 모르는 게 많았다. 여행에서 내가 찍어놓은 사진들을 봐도 느껴진다. 10년 전의 나는 ’나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여행’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블로그와 카페를 뒤적거려 대충 유명하다는 곳들로 계획을 짜고 그곳에 가서 사진을 찍는 것. 그것이 여행이라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여행은 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취미로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낯선 곳에서, 해외에서 내가 해오던 취미를 이어간다는 것이 어떤 즐거움인지 알게 되었다. 자연 암벽을 등반하며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의 즐거움을 배워 여행을 가서도 산이나 바다를 찾았다. 그러면서 점점 내가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알아 갔다. 10년 전의 나는 여행까지 가서 무슨 등산이냐고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면 알게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 다채로운 세상들엔 수많은 사람이 머물며 내가 모르는 행복의 조각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나만 이 세상을 몰랐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 내가 찾지 못한 수많은 세상은 얼마나 무궁무진할까.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556.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803.jpg
스크린샷 2025-12-03 오후 121843.jpg

마침내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여행이 끝났다. 그와 함께 보낸 하루하루가 너무나 완벽했다. 물론 사실은 완벽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순간이 완벽했더라. 다시 첫째 날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다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 ‘다음‘에서 우리는 더 고유한 길을 찾아 걷고 있을 거라 믿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