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를 연 지 5개월 만에 폐업합니다

시드니에서 이태원으로.. 지난 5개월 간의 기록

by 이보


시드니의 바다는 아침에는 윤슬로 반짝이고 밤에는 달빛으로 가득했다. 호주에서의 약 20년, 교량 구조물 설계자로 살아온 나의 삶은, 안정적인 일자리와 해마다 오르는 연봉, 풍족한 통장 잔고, 먹고 싶은 것, 여행하는 것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여유까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온한 이면에는 이민자로서 치러야 할 소리 없는 전쟁이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더디게 느는 영어는 늘 마음의 문을 닫게 했고, 사람과 조직을 매니징하는 역할을 하는 대신 한 분야의 테크니컬 전문가로 커리어를 개발해 나가는 기술자로만 남았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경력을 포함해 25년을 구조설계라는 분야에서 일하며 삶을 설계해 왔다. 하지만 견고해 보이던 삶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내 육체였다.


아직도 기억한다. 2015년 어느날, 평상시와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설계도를 검토하던 중에 갑자기 폐로 산소가 들어오지 않는 공포가 엄습했다.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실수록 가슴에는 날카로운 통증이 박혔다. 바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에는 모니터 앞에 10시간 이상 집중해서 앉아 있다보면 목디스크로 몇 주를 고생하곤 했다. 일하다 가끔 눈이 뻑뻑함을 느끼면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일년에 몇번씩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가 새빨간 눈이 되기도 하였다. 이대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몸이 보내는 신호였다.


나도 아내도 모든 것이 안정적인 그때에 한국에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일해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몇 년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깊은 무료함이었다. 너무나 좋은 환경이면서도 또한 너무나 익숙한 환경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런 좋은 환경이 눈에 전혀들어오지 않고 호주라는 거대한 대륙이 벗어나기 힘든 거대한 섬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고민 끝에 우리는 이 거대한 섬에서 끌어당기는 거대한 중력을 벗어나 한국에서의 삶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내는 한국의 지사에서 바로 일하게 되었고 나는 한국에서 2년동안 원격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2년을 일하면서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지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쉰 살의 나이에 돌아온 한국은 냉혹했다. 약 20년의 글로벌 커리어는 이곳에서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나이가 많으면 정리해고 대상이라는 사회 분위기와 호주에서 가지고 있던 구조기술사 라는 라이센스는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 2년동안 호주 회사일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나의 뒷배가 되어 '여기서 일을 못 구하면 돌아가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 같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직업탐색보다는 등산을 다니고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주말에는 북촌 나들이를 하고 고궁들을 걸으며, 한국에서의 낭만적인 삶을 즐기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일을 가지고 정착하겠다는 목표와는 거리가 먼 이도저도 아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호주회사로 돌아가야하는 시간이 왔을 때, 나는 한국에서 아무것도 일할 것을 찾지 못했다. 결과는 가장 안좋게 내려졌다. 아내를 서울에 두고 나혼자 시드니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시드니로 돌아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없는 하루하루는 우울함의 연속이었고 바다를 낀 그 아름다운 산책길들을 걸으면서 한국에 가기전의 그 무료함과 지루함은 똑같이 느껴졌다. 나무가 오랜시간 뿌리를 내리고 그 땅의 영양분을 모두 빨아들이고 난 다음의 영양분없는 흙의 땅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이상 이곳은 내가 살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카페를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선택을 했다. 다시 한국에 들어가서 같이 카페를 해보기로.




카페를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갑자기 해야할 것들이 책상에 잔뜩 쌓여 있는 기분이었다. 우선 아내와 동업자가 가게를 알아보러 다녔다. 동업자가 사전에 미리 알아본 20평 정도의 크기에 한남동, 성수동, 그리고 이태원동에 있는 매물중에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아내는 이태원동의 발코니가 딸린 주택을 개조해 만든 식물 판매를 하고 있는 가게를 선택했다. 앞에 공원이 있었고 월세도 적절했으며 복잡한 도심의 거리가 아니라 주택가의 골목이라 조금은 릴렉스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월세는 싼 이유가 있었고, 유동인구는 많지 않은 곳이라는 의미였다. 동업자는 찾아오게 하면 된다고 했고, 나와 아내는 우선 주변 사람들을 단골로 만들고 케이터링 서비스등으로 추가 매출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잘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10년을 청담동에서 카페를 해본 동업자의 생각은 나에게 그녀의 실력을 더욱 확신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는 서울의 핫한 동네마다 우리 이름을 건 카페들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까지 품고 있었다.


잔금을 치르고 열쇠를 받는 날, 기존의 식물을 판매하시던 분은 부리나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꼭 파리지옥에서 탈출하는 벌레처럼 느껴졌다. 느낌이 안좋았다. 뭔가 안좋은 것을 떠안은 느낌이었다.




카페의 컨셉을 잡고 이름을 짓고 로고를 만드는 일은 재미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업의 방향성과 이름과 로고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기쁨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남들 뿐만이 아니라 지인들도 하지 말라던, 그리고 옆에서 다른 사람의 동업이 얼마나 파국으로 끝나는 지를 보고서도, 내가 하는 동업은 잘 될거라는 생각을 했다. 동업자는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가끔보던 사이로 오랜시간을 알고 지내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베이커리 실력이 뛰어나고 착하고 성실하고 돈관계 확실해 보이는 나보다 3살 어린 친구였다. 뭘 보고, 그리고 뭘 믿고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분은 정확히 50대 50으로 각자 7,000만 원씩, 총 1억 4,000만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동업자의 성실함과 실력을 철저히 믿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균열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됐다. 배에 선장이 두명이니 조율해야 할 것들이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하나를 주장하면 하나를 양보해야 했고 서로의 의중을 헤아리는데 지치고 피곤해졌다.


인테리어 공사는 공사가 진행될수록 인테리어 사장님으로부터 "이 가격에 뭘 더 바라냐"는 식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연히 포함된 줄 알았던 문손잡이나 수전도 을지로에 있는 가게들을 다니며 내 카드로 직접 긁어야 했다. 그렇게 완성된 빌트인 의자는 누가 봐도 저렴해 보였고, 수차례 요구 끝에 만든 선반은 무거운 것 하나 올리지 못할 만큼 흔들거렸다. 유리벽은 추가 비용을 요구받았고, 약속했던 선반들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내가 본 현장은 엉망이었다. 또한 한 사람의 의향대로 이끌어가지 못하다보니 인테리어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둘의 취향이 반반 섞인 듯 엉성하게 끝나있었다. 또한 동업자는 인테리어와 전기공사 하시분과 트러블을 일으키곤 했다. 내가 아는 그런 동생이 아니었다. 그런 현장을 동업자가 오픈 전에 10일이나 해외여행을 간 사이에 8월의 기록적인 폭염 속에서 아내와 땀 흘려 컨셉에 맞춰 푸릇푸릇하게 꾸몄다. 그런 가게를 그녀는 돌아와서 "시골 카페 같다"고 폄하했다. 숨겨진 '취향의 절벽'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카페 문을 열기 전, 나는 국가가 정한 일련의 행정 의식들을 통과해야 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하루 종일 이어지는 위생교육이었다. 유익한 내용도 분명 있었으나, 효율을 중시하는 내 눈에는 요약하면 한 시간이면 충분할 내용을 온종일 붙들고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의욕 없는 예비군들을 앉혀놓고 시간만 채우는 풍경, 딱 그 느낌이었다. 수료증을 들고 구청으로, 세무서로 발걸음을 옮기며 영업신고와 사업자 등록을 마쳤다. 그 과정에서 가장 경악스러웠던 순간은 보건소에서 마주한 '긴 면봉'이었다. 그것을 몸의 가장 은밀한 곳에 넣었다 가져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생각보다 원초적이었다. 더 허탈한 것은 '영업 점검'이었다. 점검이 나온다는 말에 긴장하며 오픈 날짜에 맞춰 모든 위생 상태를 완벽하게 세팅해두었건만, 구청 공무원은 폐업하는 날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국가의 절차는 때로는 과하게 엄격하고, 때로는 허무할 정도로 느슨했다.


인테리어가 끝나자 개업일을 9월 초로 정하고 메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메뉴는 동업자가 자신 있어하던 샌드위치였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그녀가 만든 샌드위치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사업동료로서 몇달을 가까이 봐오면서 그녀에 대한 신뢰를 많이 잃어온 상태였기 때문에 그녀가 만들 샌드위치 또한 의심이 갔다. 그래서 오픈전에 동업자에게 팔 메뉴에 대해 먼저 먹어보자고 했고 그녀는 자신을 못 믿는 우리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하지만 여름의 어둑한 저녁에 모기에 물리면서 테라스에서 샌드위치를 맛보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비주얼은 파리바게뜨의 평범한 잡곡샌드위치와 별 차이가 없었고 맛도 매우 평범했다. 핫플레이스가 가져야할 시그니처 샌드위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실망이 더해져 그녀를 신뢰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동업자 또한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기색이 컸다. 우리는 시작하기도 전에 서로 마음의 큰 상처를 가지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안다. 샌드위치는 동업하기 전에 먹어봤어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 하지 말았어야 할 동업을 하게 된 것이다.




시드니에서 살던 시절, 내 아침은 언제나 '가브리엘(Gabriel)' 원두와 함께였다. 사무실 밑에 Olio라는 카페겸 레스토랑이 있었다. 거기의 바리스타는 일본인 Sachi였다. 그녀는 내게 처음으로 커피가 맛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바리스타였다. 음산한 날씨에 바람이 차갑게 불던 어느날 아침, 회사근처에서 Sachi를 마주쳤는데 사장이 갑자기 오늘 부터 문을 닫는다고 문자가 왔고 카페에 가보니 문이 잠겨있었다고 한다. 거의 울먹이는 수준으로 내게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하루에 20kg의 원두가 사용된다고 해서 사업이 잘 되는 줄 알았는데 다른 사정이 있었던가 보다. 몇년동안 매일 아침을 드나들었던 곳이었는데 나에게도 적지않은 충격이었다.


그 Gabriel 원두를 시작으로 그때부터 다른 원두의 커피맛을 알아가게 되었다. 시드니에서 한참 잘나가기 시작하던 Pablo & Rusty's의 원두는 부드러운 우유맛이 커피를 덮고 있는 듯해 진한 커피 맛보다는 부드러운 라떼맛이었고, 로제타 라떼 아트로 유명한 Campos 는 진한 커피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또한 Strand Arcade의 Gumption은 강한 산미와 커피의 진한 맛이 잘 어우려져 있었는데 아내는 좋아했지만 내겐 너무 산미가 강하게 느껴져 달콤한 디저트가 없이는 다 마시지 못하였다. 이렇게 시드니 곳곳의 카페를 다니면서 커피맛을 차차 알아가고 즐기게 되었다.


카페를 시작하며 내가 가장 고심했던 것도 바로 그 '커피맛을 알게 해주는 맛있는 커피'의 재현이었다. 여러가지의 샘플을 테스트한 끝에 두 가지 원두를 골랐다. 대중적으로 무난하고 고소한 맛, 그리고 다채로운 풍미가 재미있게 어우러지는 맛. 처음엔 안전하게 고소한 원두를 내놨고, 나중엔 내 취향이 담긴 개성 있는 원두로 과감히 교체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원두를 바꿨는데, 어떠세요?" 나의 조바심 섞인 질문에 손님들은 그저 "이것도 맛있고 저것도 맛있네요"라며 덤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시드니의 단골들이 커피 맛의 미세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취향을 찾아 카페를 유목하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한국의 많은 이들에게 커피는 맛을 음미하는 '취향의 영역'이라기보다, 하루를 버티게 하는 '기능성 음료'에 가까워 보였다. 스타벅스나 메가커피처럼 밋밋하거나 강한 맛에 길들여진 입맛들 사이에서, 맛있는 커피를 내놓겠다는 생각은 행여 나만의 만족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드라마 속, 주인공 여배우가 제주도 해변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침체되어 있던 한적한 카페를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게 의욕적으로 뭔가를 계속 바꿔보려는 장면이 나온다. 그 카페의 여사장이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한잔을 마시며 아르바이트생에게 던진 대사가 가슴에 박힌 적이 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게…." 그 말은 당시 내 진심과 닮아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어 카페가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안온한 휴식처이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손님이 드문드문 들를 때면, 그들을 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정적인 삶에 찾아온 기분 좋은 '작은 이벤트'처럼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뻔했다. 그 뻔한 사람들을 5년, 10년, 20년을 만났다. 사람들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드니에서 만나는 직장동료들이나 친구들은 한국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어느 정도의 선이 있어서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 피상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사무실에서 가깝게 일해서 사적으로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상처를 입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호주에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얻은 기쁨은 거의 없었다. 그 갈망을 해소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아내의 휴식공간이자 아지트로 삼기에 테라스가 딸린 공원앞 골목길의 주택은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테라스에는 바테이블이 있었고 다양한 야외 전구들이 테라스를 아늑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한잔 마시며 책을 읽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가끔 동네 사람들이 들러 사랑방 역할 같은 곳을 하는 장소였으면 좋겠고, 어느날 갑자기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아는 사람이 우연히 방문하거나 연예인이 들르거나 혼자 시간을 조용히 보내다 가는 사람을 위한 편한 장소가 되기를 바랬다.


나의 카페 구상은 시드니의 햇살 아래서 경험했던 그 평화로운 자연주의와 웰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내가 먹는 건강한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하자'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선한 마음이 시작이었다. 그래서 비싼 재료를 쓰는 것은 고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나는 이 사업을 이득을 남겨야 하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즐거운 놀이'로 여겼던 것 같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골목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직접 만든 뽑기를 시켜주던 꼬마 시절의 나. 친구가 뽑기에 성공하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선뜻 상품을 내어주며 즐거워하던 그 아이는, 아직도 내 안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경제관념 없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다 커서도 그 '뽑기 놀이'를 반복하고 있었다. 손님들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에서 수익보다 더 큰 가치를 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그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한번 만끽하기 위해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동업자가 해외여행을 갔다오고 난 후 나는 서둘러 카페를 열었다. 1년중 더운 여름이 지나고 짧은 가을을 지나 겨울초까지가 성수기인 걸 감안해서 마음이 급했다. 샌드위치는 3종류가 준비되었고 음료도 아직은 더우니 여름에 잘나가는 것들로 준비했다.


바리스타들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공기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고 쉬워 보였다. 하지만 막상 내가 머신 앞에 서자 상황은 달라졌다. 동업자가 샌드위치를, 내가 음료를 맡기로 했지만 나는 커피를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었다. 개업 전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유튜브 라떼 아트 동영상을 찾아보고 운전 중에 들으며 우유 수십 팩을 사용하여 라떼아트를 연습했다. 어떤 날은 그럴듯한 모양이 나왔고, 어떤 날은 형편없었다. 손에 익지 않은 기술은 들쑥날쑥 나를 괴롭혔다. 결국 개업 후 3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정적인 하트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개업 초기,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손님도, 적자도 아닌 바로 나의 ‘양심’이었다. 구조 설계라는 일을 해오며 나는 완벽주의자로 살았었다. 하지만 카페 현장은 달랐다. 주문이 한꺼번에 몰리는 피크 타임이면 내 손은 떨렸고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우유 스티밍이 잘못되어 거칠게 거품이 일거나, 에스프레소 추출량이 어긋났을 때 나는 갈등했다. 버리고 다시 만들기엔 뒤에 밀린 주문과 아까운 재료비가 눈에 밟혔다. 고백하건대, 초반 몇 개월은 그렇게 ‘잘못 내려진’ 커피를 그냥 내보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재료가 아까워서, 혹은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싶어서 모른 척 내보낸 잔들이 내 마음속에 무거운 짐으로 남았다. 하지만 숙련도라는 것은 결국 시간과 정직함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숱한 실수를 저지르고 손님들의 냉정한 피드백을 몸으로 받아내며 나는 빠르게 변해갔다. 이제는 주문이 쏟아져도 당황하지 않는다. 설령 실수가 있더라도 '내가 마시는 잔'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미련 없이 버리고 다시 만드는 여유도 생겼다. 이제야 비로소 능숙하게 정성을 담아낼 수 있게 되었는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물러난다. 이 능숙함은 이제 카페가 아닌, 나의 다음 방랑을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처음엔 우왕좌왕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재료를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법도 터득했다. 이른바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 비록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지만, 내 커피 맛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들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첫날의 긴장감이란..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팔아보는 경험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완벽하게 시작하려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 같다. 배워간다는 자세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성장하는 것 같다.


개업은 개업인가 보다. 지인들이 방문하고 개업축하 화분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인사를 전하고 손님들이 방문하지 않아도 분주했다. 손님들은 주로 동네에 사는 외국인들과 동네의 에어비앤비에 머무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주말에는 어디에서 나타나서 이 뒷골목까지 오는 지 외지인 커플들이 방문하곤 했다. 손님들이 없으면 테라스에 나가 책을 읽고 가게 운영에 관련된 작업들을 했다. 지금 겨울에 비하면 잘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런 카페는 전혀 아니었다. 첫 한달이 지나고 지인들이 오지 않게 되자 카페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메뉴는 6가지로 늘렸고 음료메뉴도 34가지로 늘리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하면 잘될까 많은 고민을 했던것 같다.




직접 운영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아니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던 단점들이 개업 후에야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낭만적인 발코니에는 이따금 햄버거 패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출처를 찾아보니 50미터쯤 아래에 최근 유명세를 탄 '흑백요리사' 출연자의 햄버거집이 있었다. 여유로운 커피 향을 기대하며 앉은 손님들은 원치 않는 고기 기름 냄새를 온종일 견뎌야 했다. 게다가 옆 건물 틈새에서는 지하 배관을 갓 뚫고 올라온 듯한 하수구 냄새가 수시로 치밀어 올랐다. 가게 앞 공원은 낭만적인 천연 환경을 제공해주었지만, 그 대가로 어마무시한 독종 모기들을 보냈다. 내 다리는 시골에서 갓 올라온 사람마냥 일곱여덟 방씩 물리기 일쑤였고, 물린 자리는 거무칙칙하게 변해 흉터처럼 남았다. 이 지독한 모기들은 매장 안까지 침범해 손님들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무려 12월 말까지 살아남아 기승을 부렸다. 이런것들은 미리 알기 힘들고 지내봐야 아는 것들이다.


카페 창업을 앞두고 가장 두려웠던 것 중 하나는 이른바 ‘진상 손님’에 대한 공포였다. 유튜브나 뉴스는 연일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 역시 잔뜩 긴장한 채 문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입바른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아직 무례한 손님은 만나보지 못했다. 가끔 경계심이 드는 손님이 있어도 대개는 인사성 밝고 매너 있는 이들이었다. 이태원 뒷골목이라는 특성상 외국인 손님이 많았는데, 20년 호주 생활 덕분에 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은 내게 쉬운 일이었다. 서구권의 수평적인 관계에서 주문을 받고 서빙하는 문화가 내 몸에 배어 있었고, 그런 여유로운 태도가 한국 손님들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달된 것 같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의 풍경은 조금 달랐다. 화장실은 가끔 엉망이 되곤 했다. 하지만 내게 남의 오물을 치우는 일은 그리 큰 고역이 아니었다. 내게는 군대 시절의 강렬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자대 배치 첫날, 저녁 화장실 청소를 하던 신병인 내게 고참은 작은 플라스틱 대야와 비누 하나를 던져주며 말했다. "닦아". 내 앞에는 체모와 오물이 묻은 소변기가 있었다.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비누 칠을 하며 변기를 닦아야 했던 그 시절. 그 ‘바닥’의 경험은 내 인생의 내성을 길러주었다. 결혼 후 집 화장실을 맨손으로 닦는 나를 보며 아내는 경악했지만, 내게 가족의 오물은 더러운 것이 아니었다. 카페에서 남의 오물을 처리하는 것이 역겹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바닥을 경험해봐야 견딜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법이다. 25년의 화이트칼라 생활 뒤에 숨겨진 나의 이 무던한 근성은, 어쩌면 이 척박한 카페 운영을 5개월간 버티게 한 숨은 지지대였을지도 모른다.




이태원이라는 동네는 참으로 기묘하다. 가끔 온몸에 문신을 하거나 무서운 인상을 풍기는 손님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가 있다. 20년 호주 생활 덕에 문신이나 피어싱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주택가 골목에서 이런 풍경을 마주한다는 사실은 매번 새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들은 대개 누구보다 인사성이 밝았고 정중했다. 편견은 언제나 내 안에서만 꿈틀댈 뿐, 세상은 늘 그 너머의 진심을 보여주었다. 가게 앞 어린이 놀이터는 우리 카페의 전경이자 일상의 배경이었다. 그곳은 외국인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늘 북적였다. 가끔 백인이나 흑인 아이들이 뛰어놀며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들으면 묘한 괴리감이 느껴져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에게 이곳은 어린 시절의 소중한 고향이겠구나.' 호주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나의 20년이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안온했듯, 한국의 이 작은 골목에서 자라나는 저 아이들에게도 이곳이 좋은 추억, 그리운 장소, 그리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길 바란다. 나 역시 5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곳에서 실패의 쓴맛을 보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섞인 그 풍경만큼은 내 기억에 남겨두고 싶다.


카페 테이블 위에는 시대의 변화가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우리 카페에는 유독 국적이 다른 커플들이 많이 찾아온다. 한국인 여성과 외국인 남성, 혹은 그 반대의 조합들이 낯설지 않게 어우러진다. 과거 농촌 총각들의 결혼 문제로 시작된 ‘다문화’라는 담론이, 이제 대도시에서는 자연스러운 문화적 흐름이자 일상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호주에서 이방인으로 지내온 내게, 이들의 모습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회통합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들이 한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우리의 문화적 성숙에 기여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품어야 한다. 다양한 색이 섞여야 더 풍성한 그림이 그려지듯, 이태원의 작은 골목에서 마주한 이 국경 없는 인연들이 한국의 새로운 활력이 되길 기대해 본다. 내가 내린 커피 한 잔이 그들의 한국 생활에 작은 온기가 되었길 바란다.




우리 카페에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하나 있었다. 아늑하고 어두운 조명이 드리워진, 마치 비밀 기지 같은 작은 홀이다.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둔 공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직원실로 가기 위해서는 이 작은 룸을 가로질러야만 했다. 어느 날이었다. 비품을 챙기기 위해 직원실로 향하던 중, 나는 그 작은 룸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곳엔 젊은 커플이 앉아 있었는데, 여자는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고 두 사람은 세상에 오직 둘뿐인 듯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애써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지만, 옆통수에 눈이 달린 듯 그들의 뜨거운 공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참 동안이나 그들만의 섬에 머물다 나간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당황스럽다"는 마음보다는 "다채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어딜 가든 둘이 좋아 죽고, 세상의 시선 따위는 보이지 않던 그 뜨거운 계절. 카페라는 공간이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을 넘어 누군가의 가장 뜨거운 기억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는 것은 꽤나 근사한 일이었다. 차가운 철근과 콘크리트 사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사람의 온기가 빚어내는 가장 무질서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태원은 반려견들의 천국이다. 골목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이들이 넘쳐났고, 우리 카페 역시 기꺼이 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하지만 강아지의 귀여움 뒤에는 사장만이 감당해야 할 몫이 숨어 있었다. 매일 아침, 어린 딸과 함께 커다란 하얀색 라브라도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시는 단골분이 있었다. 나는 그 강아지를 무척 좋아했지만, 절대 만지지는 않았다. 그 녀석이 머문 자리에는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얀 털들이 수북이 쌓였기 때문이다. '저 정도면 탈모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털이 빠지는데, 눈치 없는 다른 손님이 귀엽다며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는 날엔 그야말로 '참사' 수준이었다. 공중으로 흩날리는 하얀 털들을 보며 나는 조용히 창고에서 밀대를 꺼냈다. 평소엔 잘 사용하지 않던 밀대가 그날만큼은 바쁘게 움직였다. 하얀 털로 뒤덮인 바닥을 닦는 수고로움조차 이제는 이태원 골목이 내게 준 정겨운 풍경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카페 옆집에 사는 외국인 가족이 있다. 어머니와 어린 딸들이 가끔 들러 커피와 케이크를 주문하곤 하는데, 나는 그들이 머무는 시간을 바라보며 작은 기쁨을 얻곤 했다. 엄마는 아이들과 마주 앉아 색칠 놀이를 하거나, 아이들이 들려주는 사소한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교육의 표본 같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주문하는 순간이다. 엄마는 아이가 스스로 메뉴를 결정할 수 있도록 뒤에서 묵묵히 기다려준다. 아이가 고민 끝에 고른 메뉴를 내게 직접 말하고 결제하는 과정까지, 엄마는 결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아이의 뒤에서 기다려준다. 아이가 울며 투정을 부리며 들어올 때도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곤조곤하다. 마법 같은 대화가 끝나면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은 얼굴로 어린이공원을 향해 뛰어 나간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기다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나는 이 작은 카페에서 배웠다. 나 역시 지금 인생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서툴게 다음 메뉴를 고르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 외국인 어머니처럼, 나 스스로에게도 "괜찮다, 천천히 골라보라"며 기다려줄 시간이 필요한 때임을 이 가족을 보며 깨닫는다.


카페가 놀이터가 되면 재미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나와 얘기하고 내가 정성들여 만든 음료를 마시고 웃고 떠드는 소리나 진지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흐뭇하다. 발코니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지개를 켜고 바깥 풍경과 숨을 들이마시며 날씨를 즐기는 모습들을 보면 내가 다 행복했다. 연인들이 와서 그림 같은 배경에 나누는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그 순간 그들만의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눈치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날 카페를 나서는 연인이 우산이 없는 듯 하여 가게에 있던 우산 둘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내가 우산을 주기전 남자가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접는 우산을 꺼내려다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며 “아, 내가 실수했구나.”했다. 분명 남자가 꺼낸 작은 우산을 둘이 쓰고 가면서 더 큰 사랑을 키웠을텐데 말이다.




손님이 없으면, 사실 거의 매일이 그런 적막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발코니로 이어지는 넓은 유리문 너머 공원을 생각 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보면 유독 시선이 머무는 풍경이 있다. 특정 시간대에 핸드폰을 보며 공원을 대여섯 바퀴를 뱅글뱅글 도는 작가인 듯한 안경낀 사람이 있고, 개 열마리 정도를 한꺼번에 산책시키며 지나가는 차가 경적이라도 울리면 영어로 욕을 해대는 사람이 있고, 오후 네다섯시쯤 잘록한 허리에 늘 달라붙는 상의와 풍성하게 퍼지는 치마를 입고 어린 딸아이의 손을 잡고 공원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분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눈에 안 띌수가 없다. 그 분들을 보며 '저분들은 우리 카페에 언제 한 번 안 오시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계단을 내려오던 여자분만 아이와 함께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순간의 반가움이란! 하지만 인연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 후로 딱 한 번 더 발걸음을 했을 뿐, 겨울의 추위 때문인지 그들의 모습은 더이상 보이질 않았다.


개업 초기, 나는 모든 음식을 직접 서빙했다. 호주 생활에서 몸에 밴 '안부 인사와 소소한 대화'는 내게 너무나 당연한 서비스였다. 손님이 음식을 먹는 도중이나 마친 후에 "맛은 어떠신가요?"라고 묻는 것은 손님에게 다가가 경험을 공유하고 싶었던 나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날 무렵부터 나는 진동벨을 집어 들기 시작했다. 초심이 사라진 탓일까? 아니면 이곳의 공기에 익숙해진 탓일까? 20~30대 젊은 남녀 손님들에게 아저씨의 살가운 접근이 혹여 '불필요한 간섭'이나 '부담'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한국식 미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씩 거리두기를 시작했다. 음식 맛을 묻는 횟수도 줄이고 진동벨을 건네며 카운터 뒤로 물러났다. "이게 과연 한국 정서에 맞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내가 한국 사회의 세대적 위치를 자각하며 선택한 씁쓸한 배려이기도 했다.




우리 카페에는 15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근사한 발코니 공간이 있었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봄과 가을, 그곳에 앉아 음료를 마시는 여유는 그 자체로 평화였다. 아마도 그 풍경에 홀려 이 자리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은 1년 중 4개월이 지독히 덥고, 4개월은 지독히 춥다. 결국 1년 중 발코니를 제대로 쓸 수 있는 날은 고작 4개월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전체 좌석의 절반이 넘는 바깥 자리가 1년의 3분의 2 동안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이태원이라는 특성상 외국인 손님들은 늘 야외석을 선호했지만, 겨울이 오자 매출이 3분의 1로 급락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발코니를 쓸 수 있는 그 짧은 4개월 동안 1년 치 적자를 메워야 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카페는 객단가가 낮고 회전율이 느리다. 한 번 앉으면 기본 1시간, 길게는 2~3시간씩 자리를 지키는 손님들 사이에서 골목 카페가 살아남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치열한 대로변이나 오피스 상권에서 줄을 세우지 않는 한, 우리가 택한 '골목의 안정'은 곧 '수입의 실종'을 의미했다.

가게 위층에는 다른 카페가 있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우리 발코니에서 빤히 보였다. 폭염이 쏟아지는 여름날, 나는 멍하니 앉아 저 위로 누가 올라가나 지켜보곤 했다. 하지만 온종일 올라가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불친절해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담배를 피러 내려오거나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전화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들어온다는 소식에 위층 주인은 건물주와 크게 다퉜다고 했다. 내게도 싫은 소리를 하는 그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분도 나도, 이 적막한 골목에서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그분처럼 패배를 인정하고 문을 닫는다.




우리 카페를 중심으로 위쪽엔 두 개, 아래쪽엔 네 개의 카페가 포진해 있다. 카페를 시작한 뒤로 자연스레 주변 매장의 손님 숫자를 헤아리곤 했다. 유독 손님이 없는 날, 무거운 마음으로 마감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고통스러운 확인의 과정이다. 아래쪽 네 개의 카페를 차례로 지나며 유리창 너머를 훔쳐본다. 우리 매장은 텅 비어 있었는데, 다른 카페에 사람들이 가득 찬 모습을 보면 숨이 턱 막힌다. '우리 카페에는 왜 손님이 없을까?'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반대로 다른 카페들도 텅 비어 있는 날엔, 찰나의 위안을 얻는다. '아, 오늘은 그냥 거리에 사람이 없는 날이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로변과 조금 더 가까운 아래쪽 골목 카페들은 밤늦도록 북적였고, 그들의 시그니처 메뉴와 화려한 조명은 퇴근길 나의 초라함을 더욱 부추겼다. 어느 날은 우리 가게의 단골손님이라고 생각했던 분이 다른 카페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분이 민망하시지 않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얼른 고개를 돌렸다. 남의 성공이 나의 결핍으로 직결되는 이 좁은 골목에서, 나는 비정한 상권의 법칙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창업 준비 기간, 나는 정보 수집 겸 근처 카페를 드나들었다. 그곳 사장님은 유독 손님들과 사교적이었고, 나는 혹시 모를 민감한 반응이 우려되어 인근에 카페를 열 계획이라는 말은 아껴두었다. 마침내 우리 가게 문을 열었을 때, 사장님은 서운한 기색을 비치기도 했지만, 곧 우리는 '동네 사장님'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재설정되었다.

지나가며 안부를 묻고 운영의 고충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 사장님이 우리 매장 안을 슬쩍 살피며 지나갈 때면, 퇴근길에 남의 매장 테이블을 세어보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카페 사장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종의 '직업병' 같은 것이리라.

어느 날, 그 사장님은 씁쓸하게 고백했다.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나의 머릿속 계산기는 이미 답을 내놓고 있었다. 매장의 크기, 직원 수, 회전율을 종합해볼 때 그곳의 수입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쟁자이기 전에 같은 파도를 넘고 있는 동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경쟁심은 사라지고 묵직한 동병상련이 그 자리를 채웠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골목 카페들이 실은 저마다의 적자를 버텨내고 있다는 비정한 진실을,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만으로도 공유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찾아온 지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이런 구석진 골목에서 뭐 하는 거예요? 장사하려면 대로변으로 나가 피 튀기게 경쟁하며 돈을 벌어야지!" 그 말은 퇴근길 내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나를 괴롭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신이 없었다. 시장을 휘어잡을 압도적인 무기도 없었고, 음료 제조부터 손님 응대까지 모든 게 처음인 내게 대로변의 정글은 너무나 두려운 곳이었다. 한적한 골목에서 실력을 먼저 키운 뒤 세상 밖으로 나가겠다는 생각은, 나름의 '안전 설계'였던 셈이다. 폐업을 결정한 지금, 나는 그때의 그 소심했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만약 지인의 말대로 무리하게 사업자금을 투자하고 비싼 월세를 감당하며 대로변으로 치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쯤 나는 억 단위의 손실로 절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인의 눈에는 '도전 정신의 부족'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내게 그것은 '최소한의 생존 본능'이었다. 정글로 뛰어들기엔 체력이 부족함을 알았던 나의 겸손이, 역설적으로 나를 더 깊은 나락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가게를 운영하다 보면 사소하지만 신경을 긁는 일들이 있다. 우리 매장 발코니 밑에는 걸터앉을 수 있는 작은 턱이 있는데, 아침마다 그곳은 누군가의 무책임한 흔적들로 가득했다. 담배꽁초와 일회용 컵은 예사고, 심지어 어느 날은 반려견의 배설물을 담은 검은 봉투까지 버젓이 놓여 있었다.

쓰레기가 모이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곳에 버릴까 염려되어 보이자마자 치웠다. 정중하게 '금연'과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사인을 붙여두기도 했다. 하지만 비웃기라도 하듯 잊을만하면 또 버리고 갔다. 정성껏 붙인 사인마저 떼어갔다. 결국 나는 '포기'를 선택했다. 아니, 정확히는 '방치'라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아침에 와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쓰레기가 쌓여 더러워진 그곳에는 더 이상 새로운 음료 컵이 추가되지 않았다. 무단 투기를 일삼던 그 사람조차, 자신이 만든 더러운 곳에서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이 골목길의 쓰레기 전쟁을 통해, 때로는 정답보다 '방치'가 더 강력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인생의 역설을 배웠다.




나는 동업자가 진짜 '기술자'인 줄 알았다. 사워도우부터 바게트까지, 가게 안을 고소한 빵 냄새로 가득 채워줄 베이커리 전문가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대형 오븐을 들이기로 한 결정적인 순간, 그는 고백하듯 털어놓았다. "사워도우나 바게트는 사실 자신 없어요." 눈앞이 아찔했다. 그럼 구움과자나 케이크는 어떠냐는 물음에도 그는 비주얼이 평범한 결과물을 내놓거나 핑계를 대며 회피하기 급급했다. 시작부터 내 신뢰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내가 꿈꿨던 '빵 굽는 카페'는 그 자리에서 찢겨 나갔다. 결단이 필요했다. 오븐 계약금 100만 원을 과감히 포기했다. 오븐 설치를 위해 무려 400만 원이나 들여 진행했던 전기 승압 공사 비용도 허공으로 날아갔다. 빵을 굽지 않으니 그가 요구하던 인력 충원도 무산시켰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조기 파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폐업을 결정한 날, 그녀는 내게 제안했다. "부동산에서 물어보면 서로 잘 안맞았다고 말을 맞춰요." 나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것은 핑계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였다. 이 동업은 시작되지 말았어야 했다.


동업자와의 마찰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우선 그녀는 전문가다운 실력도 책임감도 없었다. 부스스한 머리, 옷차림, 심지어 가끔 느껴지는 몸 냄새까지. 손님을 맞이하는 프로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주일에 이틀을 쉬자고 하는 것부터 힘들다고 오후 3시에 퇴근했다. 나중에는 2시에 퇴근했다. 샌드위치 카페인데 주방 담당이 없으니, 그 이후에 오는 손님들에게는 샌드위치를 팔 수가 없었다. 메뉴판에 엄연히 존재하는 음식을 "지금은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창피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샌드위치 레시피까지 직접 외워야 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케이터링 서비스였다. 상권이 죽은 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 간식 제공을 제안했지만, 그녀가 만들어온 샘플 박스는 참담했다. 다른 케이터링 업체들의 샘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몸이 힘들다, 자신이 없다", "이거 다 내가 만들어서 파는 거 아니냐"며 화를 낼 때는,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사업 파트너가 아님을 깨달았다. 설레던 아내와의 아지트는 어느덧 동업자를 마주하기 싫은 공간이 되어버렸다.




나는 평생 사람과의 관계가 최소화된 일을 해왔다. 아니, 어쩌면 그런 일이 내 성격에 맞았기에 25년을 버텼는지도 모른다. 직업은 때로 성격의 핑계가 되기도 하니까. 동업자와의 갈등을 겪으며 나는 나의 가장 뾰족한 민낯을 마주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극 T(이성적)'형 인간이었고, 효율과 논리만을 앞세워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많았다. 칭찬과 설득으로 조화롭게 이끌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타협과 신뢰보다는 상대의 안 좋은 점을 먼저 보았고 존중을 잃었다. 직선적인 말들은 화살이 되어 관계를 무너뜨렸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인가?"라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성격에 맞는 일을 찾아 숨어야 할지, 아니면 이제라도 이 서툰 관계의 공법을 새로 배워야 할지 자문해 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나의 문제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개선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거친 성격을 조금씩 깎아내고 다듬어보려 한다. 이 카페라는 5개월의 짧은 현장은, 내게 커피 만드는 법보다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 곳이었다.


현실의 카페 운영은 낭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손님이 없어 자유로운 시간이 길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카페라는 유기체의 수명은 야위어 갔다. 고요함이 주는 평화는 곧 경영의 압박이라는 독으로 돌아왔다.

재미있는 것은 나의 반응이었다. 조용한 휴식을 동경하면서도, 정작 매장이 손님들로 북적이고 활기가 넘칠 때면 나는 마치 생명수를 마신 것처럼 살아 움직였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가동하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리듬을 맞추며 일하는 그 순간, 나는 내가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낭만을 꿈꾸며 도망쳐온 이곳에서, 나는 결국 타인의 온기와 북적임 속에서만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 지독한 모순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업만 빼면 이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손님을 맞이하고, 내가 내린 음료를 제공하는 과정은 신기했다. 회사원 시절 만났던 클라이언트들과는 전혀 다른, 이름 모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흥미로웠다. 가끔 연예인이 다녀갈 때면 그 광경은 신기하게 다가왔다. 주말이면 풋풋한 연인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웠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찾는 남자분, 공부방처럼 이용하는 외국인 석사생, 내 사업에 도움을 주겠다며 스탬프를 거부하는 외국인.. 내가 이들과 만날 일이 있었을까? 평일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두고 몇 시간씩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이들을 보며 '저들은 어떻게 수익을 낼까' 궁금해하기도 하고, 음료 레시피를 손에 익히며 바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찰나의 환희를 주었다.

만약 적자가 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동업이라는 가시밭길을 걷지 않았다면 나는 이 일을 오래도록 사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페는 취미 공동체가 아닌 '비즈니스'였다. 사업에서는 파트너와의 신뢰와 실력이라는 기초가 흔들리면 전체가 무너지는 법이다. 나는 동업자라는 기둥이 썩어가는 것을 발견했고, 적자라는 하중을 견디지 못해 결국 폐업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폐업을 결정하고 동업 관계를 정리하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위험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차라리 내가 인수해서 혼자 해볼까?' 하지만 그 속삭임을 현실 위에 올려놓자마자 금방 허점이 드러났다. 동업자가 하던 샌드위치와 케이크가 빠지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음료뿐이었다. 베이커리 완제품을 납품받아 파는 시도도 미리 해보았지만, 낮은 마진과 재고 폐기 비용을 따져보니 구색 맞추기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유동 인구가 적은 이 외진 골목 상권에서, 오로지 커피와 음료만으로 임대료와 고정비를 감당하며 이익을 낸다? 계산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두드려볼수록 돌아오는 답은 '불가능'이었다. "혼자서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마음속 울림은, 비정한 현실과 이성 앞에서는 한낱 뜬구름 같은 허상에 불과했다. 아팠다. 하지만 그 아픔을 견디고 나는 가위를 들었다. 감정의 미련이 현실의 생존을 갉아먹기 전에 스스로 이 판을 끝내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책임감 있는 행동이었다.

5개월동안 아무것도 안가져가고 적자 200만원이 적자 150만원으로 줄어드는 것이 다였다. 이것은 내가 동업자에게 지분을 떼어주고 혼자할 생각을 접게 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물론 혼자하면 재료관리도 잘되고 카페의 방향성도 좋아질 것이고 잘되든 안되든 꾸준히 개선해 가면서 나아가면 된다. 하지만 계속 적자를 만든다면 그 누적된 적자는 시간이 감에따라 눈덩이가 될것이고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계속하는 것은 의미를 넘어 해서는 안될 것이었다.




누군가 내게 다시 카페를 하겠느냐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단호하다. "아니,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해보고 싶었던 것을 충분히 해보았고, 커피를 내리는 기술과 카페의 생로병사를 온몸으로 통과했다. 내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카페라는 틀 안에서 더 이상의 경험을 쌓고 싶은 미련은 남지 않았다. 내 가게는 내 마음에 먼저 들어야 정이 붙고, 그래야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만약 누군가 다시 창업한다면, 나는 감히 조언하겠다. 절대로 동업하지 말고, 자신의 컨셉을 확고히 잡으라고.


폐업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무엇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추상적인 고민을 넘어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25년 동안 회사의 울타리 안에서 한 우물만 파온 나였다. 그 전문성의 도구들을 내려놓고 나니, 나는 그저 특별한 기술 없이 사회로 던져진 이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단순 노동, 배달, 지식 공유, 유튜브, 책 쓰기... 돈이 될 만한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닥치는 대로 리스트에 올리고 타당성을 검토했다. 당장 지하철 요금을 내고, 가끔은 내 돈으로 식당에 들어가 밥한끼 주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소득'이 간절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눈빛에도 불안이 서리기 시작했다. 평소 그토록 착하던 아내도 현실이 두려웠던지 에어비앤비 사업을 제안하고, AI 캠프를 알려주고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기 시작했다. 어느덧 아내의 수입에 온전히 기대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자, 아내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 앞에서 눈에 띄게 기가 죽고 순종적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 열정 하나로 세상에 도전하던 그 당당하던 청년은 어디로 갔을까?




폐업을 단 며칠 앞둔 시점까지도 동업자와의 갈등은 평행선을 달렸다. 쟁점은 ‘마지막 재고 관리’였다. 동업자는 재료가 떨어지면 그대로 메뉴를 품절시키고 조용히 문을 닫자는 현실적인 입장이었다. 남지도 않을 장사에 새로 재료를 들이는 것은 낭비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문을 닫는 그 날, 그 시각까지 우리는 원래 제공하던 메뉴를 온전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고집이었다. 재료비를 계산해보니 마진은커녕 손해를 보는 장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료를 새로 주문했다.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돈'이 아니라 '가치'였다. 샌드위치 카페가 샌드위치 없이 운영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꿈꿨던 카페의 이미지가 단 하루를 남겨두었을지라도 훼손되지 않기를 바랐다. 마지막 손님에게 건네는 한 잔의 음료와 한 접시의 샌드위치만큼은 개업 첫날의 그것과 같아야 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 카페를 찾아준 골목의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예의였다.


카페 사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지독한 창피함이 몰려올 때가 있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다른 카페들의 화려한 디저트 라인업,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베이커리 메뉴들을 볼 때면 내 안의 자부심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모던하고 깨끗한 인테리어, 그 공간에 딱 맞아떨어지는 시그니처 메뉴들을 갖춘 카페들을 보면 주눅이 들다 못해 비참해지기까지 했다. '우리는 왜 저런 컨셉을 갖지 못했을까?', '왜 저들처럼 압도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못할까?' 설계 전문가로서 나는 언제나 최고를 보고, 최고의 품질을 구현하려 노력해 왔다. 그런 나의 높은 안목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이웃 매장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카페가 가진 경쟁력의 상실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먼저, 가장 처절하게 읽어버린 것이다. 타인의 부러운 공간과 나의 초라한 현실 사이의 간극. 그 압도적인 격차를 확인하는 순간마다 나는 무너졌고, 결국 그 상실감은 가게를 접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경쟁력 없는 평범함이 주는 부끄러움을 견디기에,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프로'의 세계에 살았던 모양이다.




막상 폐업을 하려니 억울한 마음이 명치 끝을 친다. 가을부터 애지중지 키우던 허브에 자꾸 눈이 가고, 가게 구석구석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인테리어 소품들, 심지어 숟가락과 포크 하나까지 보고 있으면 어느새 눈물이 차오른다. 현실은 냉혹했다. 내가 '사장'이라는 직함에 안주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내가 힘들게 벌어온 돈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돈을 버는 길이었고, 월 100만 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가계에 더 보탬이 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물론 카페는 단순한 돈 이상의 의미였다. 우리의 아늑한 아지트였고, 직업을 구하러 떠돌지 않아도 되는 나의 작은 울타리였다. 하지만 생계가 아닌 취미로 돈을 까먹으며 카페를 유지하기엔, 내게는 아직 열심히 살아야 의무가 있다. 열심히 산다고 해서 반드시 돈을 버는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일분일초를 고민하며 노트북에 생각만 잔뜩 늘어놓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1~2년 후에도 계속될까 봐 심히 두렵다. 내가 꿈꾸는 1~2년 후의 모습은 명확하다.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시간이 모자라고, 내일 아침이 기대되는 활동적인 삶. 열정 넘치고 밝은 하루하루를 살며, 내가 일하는 만큼 정당한 가치를 벌어들이는 그런 모습. 그 간절한 미래를 위해, 나는 오늘 눈물 어린 포크를 내려놓고 이 울타리를 부수기로 결심한다.


10년 후의 삶을 원한다면 10년 전에 준비했어야 했다. 나는 당장의 편안함에 안주했고, 그 대가로 4,000만 원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엇이 두려운가?" 20대 졸업반 시절의 나는 젊음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의 나는 지식과 기술, 경험, 그리고 실패를 통해 얻은 시장의 생존법까지 가졌다. 젊음 빼고는 모든 것이 더 많아진 쉰 살의 나이, 나는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카페의 불은 꺼지지만, 나의 다음 인생 설계도에는 더 밝은 빛이 드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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