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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gram Jun 27. 2023

[Opinion] 영화 <엘리멘탈>

우리가 함께 무지개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서로 다르기 때문이야



어두컴컴하고 흐린 하늘 속 여러 짐을 손에 든 채 걸어오는 부부가 있다. 불의 원소인 ‘버니’와 ‘신더’부부는 불의 원소만이 모여 살던 고향인 파이어 랜드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향한다. 광활한 바다를 가로질러 도달한 어느 낯선 마을. 그곳의 안내원은 이렇게 말한다.

“엘리멘탈 시티에 온 것을 환영해요.”



부부가 도착한 엘리멘탈 도시는 물과 흙, 공기 원소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들 원소는 같은 지역에 살지만, 불의 원소는 파이어 타운에 거주하게 된다. 물과 흙, 공기는 모두 상생 관계에 있지만, 불은 특성상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물을 만나면 그 화력을 잃게 되는 불에게 물 원소들은 기피 대상이며 만져서도 안 되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원소들에게 불의 존재 역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특징으로 인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경계대상이다.

그래서인지 불 원소가 거처를 정하고 생계를 꾸리기까지의 과정은 만만치 않다. 도시 내에서 별다른 편의시설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살 곳을 찾아다닌다. 이때 다른 원소들의 외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로 인해 이들은 힘들게 집을 찾고 허름한 집을 손수 고쳐 식료품 가게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서서히 이곳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진다.


다혈질 불 ‘엠버’, 온화한 물 ‘웨이드’


부부 사이에 태어난 딸인 ‘엠버’는 욱하는 성격을 가진 다혈질이다. 손님과 작은 마찰이라도 생기면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화를 참지 못해 거대한 불꽃을 내뿜는다. 가계의 후계자가 될 엠버에게 아버지 버니는 늘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후 행동하라고 조언하지만 쉽지 않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웨이드’. 그날도 손님과의 마찰 때문에 분을 참지 못하고 거대한 불을 내뿜는 엠버 탓에 가게의 파이프가 망가져 물이 새게 된다. 이때 누수를 점검하던 시청 공무원 웨이드는 그 파이프 사이로 빨려 들어와 엠버를 만나게 된다.

웨이드는 엠버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 만남 때 엠버의 눈에 비친 웨이드는 울고 있다. 이유는 우연히 보게 된 엠버의 가족사진에 너무 감동받아서. 재미있는 건 웨이드만 눈물이 많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웨이드의 집에 놀러간 엠버는 사소한 일에도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식사 후 하는 게임은 ‘눈물 게임’. 그것도 누가 눈물을 빨리 흘리느냐가 아닌 누가 더 오래 눈물을 참느냐이다.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는 엠버에게 이런 웨이드 가족의 모습은 신기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웨이드가 눈물만 잘 흘리는 것은 아니다. 이 눈물의 근원은 진심에서 비롯된 공감 능력이다. 그는 공기 원소들이 참여하는 에어볼 경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러츠’에게 감정 이입하며 대신 마음 아파한다. 이후 관중들의 동조를 유도하여 러츠를 향한 열렬한 응원으로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다름은 공존의 원인이 되기도 해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함께하게 된 이유는 엠버 아버지의 가게 폐업을 막기 위해서다. 엠버의 실수에서 비롯된 폐업으로 인해 그 상황을 책임지고자 그녀는 시청의 상관을 찾아간다. 마침 도시의 계속되는 누수 원인을 추적하여 이번 주까지 해결한다면 폐업을 철회하겠다는 상관의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그 원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누수 원인을 찾는 것이 본래 목적이지만 그것을 핑계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후에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엠버를 웨이드는 부러워한다. 하고 싶은 것이 명확한 것에 대한 부러움이다. 하지만 엠버는 단 한순간도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재능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는 후계자 이야기는 그녀를 세뇌시켰고 아버지의 희생으로 일궈온 가게를 물려받는 것은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했을 터. 그녀는 아버지가 희생한 만큼 자신도 아버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꿈인 가게를 저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재능을 찾아준 건 웨이드다. 서로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엠버가 가진 불의 특성을 언제나 장점으로 내세운 것도 웨이드였다. 그로 인해 엠버는 불을 이용해 유리구슬을 만들기도, 깨진 유리도 아름다운 모양으로 재창조해낸다. 이런 재능을 인정받아 유리 디자인 인턴직을 제안받는다. 더 나아가 그녀의 재능으로 누수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한다.

정반대의 특성으로 인해 서로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만나는 것조차 편히 만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그 차이에서 발현되는 장점을 부각해주었다. 이는 곧 이들이 다름을 완전히 받아들이며 용기를 얻는 데도 한몫한다. 서로를 만질 수조차 없었던 이들은 용기를 내 손을 맞댄다. 그 결과가 융합이 될지 재앙이 될지는 늘 미지수였기 때문에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결과는 융합이었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가진다면 향후 방향성 역시 긍정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엠버와 웨이드의 관계는 우리 곳곳에서 차별과 편견으로 점철된 모습을 반성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비비스테리아: 어떤 상황에서도 피는 꽃


영화 소재로 등장하는 비비스테리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어릴 때 이 꽃을 보고 싶어 전시장에 간 엠버와 그의 아버지는 입구에서 제지당한다. 불은 피해를 줄 것이 뻔하기에 출입할 수 없다는 것. 사실 전시회장의 특성상 이들이 주는 직접적 피해는 없지만 엠버 가족은 편견에 부딪혀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린다.

시간이 지나 이 전시장은 물에 잠겨 폐허가 됐지만, 엠버는 웨이드로 인해 비비스테리아를 볼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이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여러 명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에 잠긴 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숨 쉬는 공간을 만들어준 공기, 꽃을 보기 위해 깊은 곳으로 잠수한 엠버를 끌어준 물의 원소 웨이드까지. 이들은 서로 다른 성격의 원소이지만 활용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상생 관계로 서로를 이끌 수 있다.



이렇듯 비비스테리아는 양면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처음에 엠버 가족은 비비스테리아로 인해 자신이 차별받는 존재임을 뚜렷하게 인지한다. 그러나 전시장이 물에 잠겨 폐허가 되었지만, 이 꽃만큼은 꿋꿋이 피어있다. 이는 차별과 편견으로 점철된 세상일지라도 그 속에서의 공존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누군가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며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비록 그러한 사람들이 소수일지라도 그들로 인해 또렷했던 차별의 형태가 점차 옅어지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웨이드는 엠버가 자신의 꿈 앞에서 용기를 잃어갈 때마다 비비스테리아를 상기시킨다. 비비스테리아를 본 후 엠버는 불꽃을 통해 그 꽃이 들어간 유리구슬을 만든다. 그 후 엠버가 자신의 꿈과 아버지의 꿈 사이에서 갈등할 때 웨이드는 그 구슬을 건넸고,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도 웨이드는 이 구슬을 선뜻 버리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둘 사이의 추억이 들어간 물건이기에 그럴 수 있겠지만, 솔직한 선택으로 인해 무너질 것 같은 관계나 상황일지라도 언제나 꽃은 다시 핀다는 것과 더불어 비비스테리아를 볼 수 있었던 건 큰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불 원소가 꽃을 보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큰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기를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하라는 함의가 들어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늘 환하게 피어있는 비비스테리아처럼.


디쇽: 영원한 빛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해야 해


극의 중반부 엠버는 웨이드에게 불의 언어 중 하나인 ‘디쇽’의 의미를 알려준다. ‘영원한 빛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해라.’라는 의미이다. 엠버가 알려준 단어지만 극의 후반부 엠버는 이 단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먼저 엠버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한다. 가게를 유지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꿈을 저버릴 수 없어 꿈을 포기하고자 했으나, 웨이드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가게를 물려받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 그동안 아버지를 실망시킬까봐 또는 아버지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자신의 재능을 애써 외면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말하고자 결심한다.

엠버는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한다. 가게를 물려받는 건 자신의 꿈이 아니라는 것과 웨이드를 사랑한 것. 부모님의 희생을 갚기 위해 자신도 똑같이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인턴직을 고민했고, 물과 불은 절대 함께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애써 웨이드를 밀어냈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솔직한 마음을 부모님께 전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기회는 늘 지금이라는 디쇽의 의미처럼 엠버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잡고자 노력한다.

이때 자신의 감정을 전하며 엠버가 흘린 눈물은 엠버가 웨이드를 통해 변화한 모습을 방증한다. 너무 자주 우는 웨이드를 이해하지 못하며 눈물을 흘리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했던 엠버에게 눈물은 약해서 우는 것이 아닌, 웨이드가 그동안 전해준 따뜻함을 비롯한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그리고 이내 자신의 꿈을 응원받는 것의 뭉클함이 모두 결합한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이 모든 감정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매개체는 눈물로 작용했다. 타인의 상황과 처지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 항상 눈물을 보인 웨이드처럼 앞으로의 엠버 역시 누군가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공감을 통해 성장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모두가 예상했듯이 해피 앤딩이다. 엠버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인턴직에 도전했고 그 과정을 웨이드와 함께한다. 부모님의 응원과 격려도 듬뿍 받는다. 무엇보다 불의 원소로만 가득했던 파이어 타운에는 이제 물, 공기, 흙과 같은 모든 원소가 어우러져 살아간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장을 보며 만난 사람과 취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버니와 신더 부부가 처음 엘리멘탈 시티에 왔을 때는 불의 원소를 제외한 나머지 원소들만 함께 어우러져 생활하고 있었다. 안내원이 하는 환영 인사 역시 형식적인 말에 불과했다. 실제 있는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같이 불 원소는 이민자로서의 선입견이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엘리멘탈에서 살아갈 또 다른 이민자들은 편견 없는 공존을 통해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말이 아닌 진심 어린 말과 함께.

“엘리멘탈 시티에 온 것을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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