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된 자아를 지닌 것은 다른 인격이 공존하는 것이며 흔히 이런 상황을 병적상태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자아분열은 소설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이기에 우리는 이를 통해 한 인물의 삶과 관련된 혼란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자아분열을 지닌 한 인물에게만 치중하여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완전한 해결을 얻기 어렵다. 그 인물을 둘러싼 환경과 사람 그리고 상황까지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세상은 단 한 명의 선택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여러 상황과 만남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연극 <너츠>는 분열된 자아를 가진 한 남자의 행적을 따라가며 그에 얽힌 사건을 풀어가는 이야기다. 지난 8월 2일부터 오는 18일까지 혜화역 더굿씨어터에서 공연을 진행한다.
<너츠>는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밝히기 위해 경찰인 ‘새미’와 그의 파트너 ‘레온’이 사건의 실마리를 맞춰가는 이야기다. 연쇄살인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에 관한 시체와 신문기사를 찾으며 고군분투하는 새미와 레온은 그 과정에서 세 명의 용의자를 만난다.
전기수리 기사인 ‘토드’, 분장사인 ‘잭’, 그리고 성직자 ‘다이머’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자신이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자신들은 모두 친밀한 관계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반복한다. 설령 범인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범인이라고 핏대를 세우며 주장하는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에 새미는 한 명씩 그들의 행적을 조사한다.
세 용의자는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수리기사 토드는 가족에게 폭행을 당한 아픔이 있다. 크리스마스에 그는 마을에 사는 ‘오르테가’라는 인물을 죽인 후 전깃줄에 매달아 자살로 위장한다. 오르테가가 자신을 무시하고 누군가를 버린 것이 그 이유라고 말하며 그는 항상 외로웠다고 주장한다. 그가 죽인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분장사 잭은 한 여자에게 화장을 해주겠다며 접근한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한 행위는 아름다운 화장이 아닌 괴상한 분장이었다. 그녀는 잭의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남자를 좋아한다는 잭의 비밀을 남에게 발설했다. 이후 잭은 폭행을 당했고 지울 수 없는 상처도 입었다. 결국, 그는 그 여자에게 뜨거운 물을 부어 화상을 입힌 후 칼로 베어 죽인다. 일종의 복수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성직자인 다이머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연설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최면을 걸어 기차역으로 인도하고 그들이 선로로 뛰어들게 만든다.
인물의 행적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모두 제각각 다른 이유로 특정 인물을 죽인 건 사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정말 범인은 세 명인가. 조명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질 때 새미는 잠시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다. 옆에는 자신의 파트너인 레온이 있지만,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고분고분한 레온의 모습은 없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싸늘한 말투로 언성을 높인다.
알고 보니 이 사건과 공간은 모두 새미의 기억 속 가상 공간이며 자신을 용의자라고 주장하는 세 인물 모두 새미의 분열된 자아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특정 인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죽인 인물은 새미 단 한 명이며 그가 경찰이 그토록 찾는 연쇄살인마라는 것이었다. 레온 역시 살해당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러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인가. 보통의 경우 범죄자보다는 피해자에게 시선을 집중해 안타까움을 알린다. 현실적인 상황에서라면 이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사건의 초점이 자칫 범죄자의 동정 여론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에 염려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연극에서 초점을 맞추는 인물과 그 인물에 대한 이해가 극의 몰입을 더욱 돕기에 새미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왜 연쇄살인마가 되었을까. 그는 자신의 아버지 오르테가가 본인을 버리고 또 다른 행복을 찾은 것,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폭행한 사람들, 자신의 범죄 행위를 알았음에도 방조한 어머니에 의한 상처와 무관심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불완전한 가정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신뢰할 사람도, 비밀을 마음껏 이야기하며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모두 가슴 한편에 상처로 숨긴 채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왔을 것이다.
연극은 살인과 용의자에 초점을 맞춰 사건을 전개해 나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이 내용은 가족과 그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남들과 다른 비밀을 들어주며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고, 온전한 정서를 갖추고 나아갈 수 있도록 품어줄 수 있는 가족의 형태는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힘든 일을 도와주며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친구의 모습은 무엇일까. 과연 개인의 행복과 성장을 돕는 진정한 가족과 친구의 의미는 무엇인지 숙고하게 만드는 것이 이 극의 본질이라고 여겨진다.
낳았다고 다 부모가 아니고 나이가 같다고 전부 친구가 아니듯이, 혼자서 모든 아픔을 짊어지고 삶의 파멸까지 다다른 새미는 마지막까지도 혼자다. 그를 몰아세우는 분열된 자아와 엄마의 무력함 사이에서 결국 자살하는 비극적 결말에는 한 인물의 인생에 대한 씁쓸함이 남아있다.
기억의 분열된 조각을 만들어내는 건 오롯이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이 개인의 길목을 시원하게 터놓기도, 부정적으로 막아서기도 한다. 그러므로 새미가 있는 곳을 ‘네가 만든 세상’이라 말하며 모든 사명을 전가하기가 망설여진다. 한 가정에 책임감을 느끼고 다름을 가진 이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그럼 적어도 벼랑 끝 상황에서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어쩔 줄 모르는 개인의 모습을 보는 것도, 두려워하다 결국 타살과 같은 자살을 선택하는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