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말 Sep 07. 2023

날씨 좋다

날씨 좋다          


  아아, 정말이지 날씨가 너무 좋다. 눈을 뜨자마자 ‘심상치 않은걸'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가 떠오른 시각도 평소보다 이르고, 새벽의 한기가 물러가는 속도도 빠르다. 아침을 먹고 밖에 나왔더니 반팔 셔츠에 얇은 외투만 걸쳐도 좋을 정도로 기온도 따뜻하다. 내리쬐는 햇볕도 깔끔하고 정직하다. 어떠한 왜곡이나 비유도 의도나 암시도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빛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가감없이 내려올 뿐이다. 마치 태양빛이 우주에서 지구까지 오는 중에 그 무엇도 거치지 않고 손실없이 도달하여 모든 물체에 그대로 내려 앉은 듯한, 정직하고 적나라함이 느껴진다. 마치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당당한 어른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무척 근사한 기분이 든다. 퐁실한 구름이라도 몇 조각 떠 있다면 완벽했을 텐데, 오늘의 하늘은 단지 높다랗고 하늘빛이고(당연한가?) 깔끔하다.     


  이렇게 화창한 주말에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숨어 있으면 어쩐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벌금을 내라고 할 것만 같다. 똑똑똑. 누구세요. 위반하셨습니다. 하고 벌점을 먹이고 딱지를 끊어 갈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런 날씨에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면 벌금쯤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나도 짐을 챙겨서 밖으로 후다닥 나왔다. 뭐든지 벌금을 내는 것은 질색이니까.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옆에 좁은 천변을 둘러 싸고 풀밭이 덩그마니 놓여 있다. 평소에는 황량해서 눈길도 주지 않던 곳으로, 주로 노인들이 한낮에 산책로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물의 털처럼 푸석푸석하게 나있는 풀들이 오늘따라 나른하고 한층 권태로워 보인다. 언젠가 할리우드 컨추리 무비에서 본 듯한 장면이다. 흐음, 나도 글 따위는 내팽개쳐버리고 풀처럼 누워서 언제까지고 노래를 들으면서 맥주나 마시고 싶다. 이런 날씨에는 정말로 풀로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걸. 이렇게 평소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던 것들이 이런 날씨 아래에서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찬란하게 느껴진다. 10분이면 도착했어야 할 거리를 자꾸 멈춰서서 주변을 둘러보느라 족히 20분은 넘기게 된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도 자꾸만 샛길로 빠져서 멍청하니 바라보게 된다. 마치 신의 축복을 목도한 신도처럼.     


  역시 축복이란 ‘위에서 내려지는 무엇’이라는 실감이 몸속의 깊은 곳에서 부터, 마치 변온동물이 바깥의 온도와 동화되듯, 따뜻하게 채워진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우와, 실은 아반떼의 디자인도 무척 훌륭했구나. 꽃봉오리란 참 많은 상념을 품고 있군. 먼나무의 잎은 반짝반짝 하는구나. 담배 냄새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뛰어노는 아이들이란 모두 귀여운 거구나. 모닝은 여전히 못생겼네. 흐음, 역시 안 되는건 안 되는거다. 이런 적나라한 날씨 아래에서는 아름다운 것들은 한층 아름답게, 추한 것들은 한층 그 추함이 더 두드러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오늘 같은 날은 되도록 거울은 보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고 카페 창가에 앉아서 시원한 커피를 두 잔째 마시며 타닥타닥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1년 내내 이런 날씨라면 결국엔 이것 또한 지루한 일상이 되어 버릴까. 적어도 나는 이런 날씨라면 매일 매일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와이 사람들이 천국같은 지역 기후를 지겨워 한다는 소리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어쨌든 오늘은 그곳이 하와이건 칸쿤이건 보라카이건 간에 하나도 부럽지 않다. 우리나라도 이렇게나 멋진 날씨를 일년에 며칠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만우절이다.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속여도 괜찮은, 세상이 마치 하나의 소설처럼 거짓말로 뒤덮이는 날이다. 어쩌면 만우절의 기원은 날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제까지만 해도 두터운 외투깃을 여미게 했던 혹독한 날씨가, 말 그대로 ‘거짓말처럼' 이토록 완벽한 풍경으로 바뀌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 자체가 이렇게 거짓말 같은데 우리가 하는 거짓말 쯤이야'하는 심정으로 만우절을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고대 인류는 이런 날씨를 마주하면 이런 생각을 했겠지. 아아, 겨울을 버티고 살아남기를 참 잘했다. 날씨 참 좋다. 라고.           


작가의 이전글 콩깍지 속에 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