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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Sep 08. 2023

누군가의 누군가

바도

누군가의 누군가          


  단골 미용실에 머리를 자르러 갔는데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잡지를 보며 기다리게 됐다. 마침 손님이 별로 없는 한산한 날이라 사장님은 빈 시간대를 이용해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커다란 미용 의자에 앉아서 ‘손님’처럼 커트보를 두르고 있는 미용사를 마주하니 어쩐지 희한한 광경을 보는 기분에 계속 쳐다보게 된다. ’미용사의 미용사‘라.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말은 있지만, 미용사도 역시 스스로 머리는 자르지 못하는구나. 때로는 미용사도 그저 미용을 받는 손님일 뿐이구나. 하는 어색한 기류의 인식이 흘러 들어왔다. 왠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다.     


  그것은 어쩌면 영화의 미장아빔의 구조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이질감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언가의 무언가’ 라는 동어 반복같은 관계를 만나고, 마치 세계관의 충돌을 목도하듯 특수한 유리감을 느낀다. 흔한 예로, 엄마의 엄마를 만나는 일. 아빠의 아빠를 만나는 일이 있다. 뭐,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새삼 복잡하게 하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불쑥 할머니가 ’엄마의 엄마‘구나 라는 것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하, 우리 엄마도 나처럼 갓난쟁이를 거쳐 이렇게 나이 들어 왔구나.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누군가의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그것은 특수한 관계성 사이에 주관적 개념이 겹쳐질 때 발생한다. 예컨대, 나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분명 단순 명사지만, 나의 주관적인 세계에서는 언제나 단 한사람의 고유어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개념이 나의 삶에 겹쳐지는 순간. 그 단순하던 고유명사의 개념은 뜬금없이 무한히 확장한다. 이세상에는 참으로 무수의 아버지가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컴퓨터의 언어가 0 혹은 1 인 것처럼, 그것은 오직 하나로 존재하거나 무한히 존재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엄청난 격차의 확장을 실감하고 아득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치 광막한 우주에서 먼지보다 하잘것 없는 우리의 존재를 가끔씩 인지하는 것처럼.     


  가끔 친한 동생이 또 다른 자신의 동생을 소개해주는 자리는 언제나 무척 흥미롭다. 그런 자리에서 그는 그저 동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형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일종의 관계 역전을 경험한다. 아하 이 친구는 형일 때는 이런 모습이군. 하면서 나와 그 친구 사이의 관계성을 재파악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다중적인 관점에서, ‘누군가의 누군가’를 만나고 관찰하는 일은 되려 ‘그와 나’의 관계성을 종합적이고 보편적인 눈으로 성찰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왜곡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는듯한 어색하면서 친숙한 감정이 드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저작 ‘선악의 저편‘에서 그 유명한 ‘노예 도덕론’을 논하기 전에 흥미로운 분석 하나를 제의한다. 주인과 노예 관계에서의 ‘위상 역전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인 주인과 노예는 수직적 종속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수직 관계는 ‘서로의'엄밀한 규율을 통해 성립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처음 관계에서 주인은 질서를 만들고 노예는 그것을 따른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질서는 점차 일방적인 것에서 상호적인 것으로 연결되어 간다. 결국 주인의 고귀한 삶은 노예의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 할 수 있게 된다. 착취 계급의 영달과 안위는 결국 피착취계급인 노예로부터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종작에는 노예가 결국 주인을, 물리적 혹은 정신적으로, 종속시키게 된다는 것. 주인은 되려 두려움에 쫒기는 ‘예속되는 자’로, 노예는 원한 감정을 근원적 동인으로 하여 쫒아가는 ‘예속하는 자’로 전위된다. 주인은 ‘부끄러운 자’ 노예는 ‘당당한 자’가 된다. 바로 이것이 주인과 노예의 위상 역전 현상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노예의 노예’란 바로 주인을 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가끔 서비스 센터나 구청에 전화할 일이 생기면 ‘지금 고객님을 응대하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라는 안내말이 흘러 나온다. 자못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구나. 누군가는 누군가의 가족일테지. 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도 매일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열심히 응대하고 있다. 한 명의 가족이자, 가족의 가족으로서. 그렇지만 때때로 어떤 이들은 스스로 손님이 아니라 마치 주인인양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노예 근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미 그들은 스스로 ‘노예의 노예’ 임을 자처하고 사는 것이다. 올바르고 합리적인 존재들은 그런 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노예성과 주인성 사이를 끝없이 가다듬고 고뇌하며 산다. 복합적으로 자신이 낮아지지 않기 위해서. 역시 ‘누군가의 누군가’ 라는 것은 결국 언제나 ‘자신’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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