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책(30) : 에스파냐편

붉은 토양의 에스파냐와 팀 마샬의 <지리의 힘>

by 향지소피아






지도 위의 인간, 『지리의 힘』과 함께


에스파냐로 떠나기 전, 독서회에서 읽은 책이 (지리의 힘)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분쟁,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는 갈등을 분석하며 이 책은 한 가지 냉정한 사실을 말한다. 국가는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도 위의 조건, 산맥과 평야, 바다와 해협이 역사의 방향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며 나는 이미 그 사실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소아시아에서 유럽의 기원을 듣고, 안탈리아 해안에서 아프리카를 상상했던 순간처럼, 세계는 지도 위에서 서로 맞닿아 있었다. 어디에 태어났는가, 어떤 지형을 배경으로 살아가는가에 따라 삶의 방식은 달라진다. 국경은 바뀌어도 산맥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바다는 문명과 문명을 이어주기도, 갈라놓기도 한다. 지리는 인간의 선택 이전에 존재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뒤 남은 감정은 전략적 통찰이 아니라 묘한 연민이었다. 지구라는 별 위에서 어느 좌표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기도 하고, 평화로운 휴양지의 해변을 걷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서로 다른 조건 속에 놓인 인간들. 그 지점에서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지구인의 운명이라는 사실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콧등이 시큰해졌다.


트로이를 발굴한 슐리만도, 에우로페를 바다 건너 보낸 신화도, 결국은 하나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인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디로 가는가. 지리는 우리를 묶지만, 동시에 서로를 향해 열어 둔다. 세계는 단절된 대륙의 집합이 아니라 연결된 구조였다. 여행을 통해 확인한 것은 풍경이 아니라 이 사실이었다.

이제 시리즈의 끝에서 다시 지도 위를 바라본다. 선으로 나뉜 대륙들, 색으로 구분된 국가들. 그러나 그 위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분쟁의 경계선에서도, 평화로운 해안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얼굴들. 결국 회귀한 것은 인간이었다.


여행의 출발점은 늘 책이었다. 읽은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 문장 속에 존재하던 공간이 실제로 어떻게 놓여 있는지 보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길 위로 이끌었다. 괴테를 따라 도시를 걷고, 단테를 떠올리며 다리를 건너고, 셰익스피어의 무대를 상상하며 광장에 서 있었다.


초기의 여행은 그래서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 관념의 검증에 가까웠다. 나는 공간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미 읽은 기억과 대조하며 확인하려 했다. 풍경은 해석의 대상이었고, 도시는 하나의 텍스트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여행이 거듭되면서 시선은 조금씩 이동했다. 누군가는 여행에서 무엇을 가장 중시하느냐고 묻는다. 사람을 보느냐, 음식을 보느냐, 자연을 보느냐고. 나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나는 공간을 본다고. 새로운 공간을 얻는 일이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공간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이나 경관을 감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공간이 어떤 구조 위에 놓여 있는지, 왜 그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묻는 일에 가깝다. 도시의 배치는 우연이 아니고, 문화의 형성 또한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반복적으로 이동하다 보니, 공간은 점차 지형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어떤 땅 위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람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평야에서는 이동이 쉽고, 이동이 쉬운 곳에서는 침입 또한 잦다. 산맥은 방어선을 형성하고, 바다는 동시에 장벽이자 통로가 된다. 강은 도시를 가르지만 동시에 문명을 연결한다. 이러한 단순한 사실이 실제 현장에서 확인될 때, 공간은 추상이 아니라 구조로 다가온다.


2024년 겨울, 에스파니아에 도착했을 때 그 인식은 더욱 선명해졌다. 붉은 테라로사 토양이 넓게 펼쳐진 지역에서의 주황색 기와 지붕은 단순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지질학적 조건의 결과였다. 토양의 색과 재료의 선택, 건축의 색채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지면이 곧 문화의 일부였다. 마치 다른 행성에 도착한 듯한 감각은 낯설음 때문이 아니라, 지형이 만들어낸 질서가 한국의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때 떠오른 책이 바로 『지리의 힘』이다.


지리의 힘은 한마디로, 국제 정치와 세계 질서를 ‘지형’이라는 구조적 조건으로 해석하는 지정학 입문서이다.

이 책은 국가의 선택과 갈등, 동맹과 전쟁이 지도자 개인의 의지나 이념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산맥·평야·해안선·자원 분포 같은 지리적 조건에 의해 장기적으로 제약된다는 점을 설명한다. 저자 팀 마샬은 여러 지역 사례를 통해 “국가는 지리의 조건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따라서 『지리의 힘』은 뉴스를 사건 중심이 아니라 구조 중심으로 읽게 만드는 책이며, 세계화 시대에도 지리는 여전히 결정적 변수임을 상기시키는 현대 지정학 교양서라고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그의 논의는 주로 지정학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내가 현장에서 체감한 ‘지리’는 보다 일상적이고 문화적인 층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두 관점은 근본에서 만난다. 지리는 배경이 아니라 조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 선택은 언제나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리의 힘』이 갖는 오늘날의 의미 지리의 힘은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관점을 지리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책이다.


오늘날 이 책이 갖는 첫 번째 의미는 국제 정세를 사건이 아니라 구조로 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뉴스는 전쟁과 분쟁을 특정 인물이나 정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지만, 『지리의 힘』은 그러한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공간적 조건에 주목한다. 러시아의 남하 전략, 중국의 해양 진출, 중동의 지속적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지형적 제약과 전략적 위치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국제 문제를 단기적 현상이 아닌 장기적 패턴으로 이해하게 한다.


두 번째 의미는 국가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통념을 수정한다는 데 있다.

국제 정치 담론에서는 종종 국가가 합리적 판단에 따라 전략을 수립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 책은 내륙국가의 한계, 평야 지형의 방어 취약성, 항구 확보의 필요성 등과 같은 물리적 조건이 국가의 선택 범위를 결정한다고 본다. 지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전략의 범위를 설정하는 구조적 조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세 번째로, 이 책은 세계화 시대에도 지리의 영향력이 약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통신 기술과 교통 수단의 발달로 세계가 평평해졌다는 인식이 존재했지만, 실제 갈등은 여전히 해협, 국경선, 항로, 에너지 자원이 위치한 지역에서 발생한다. 해상 통제권, 전략적 항구, 육상 완충지대와 같은 개념은 여전히 국제 정치에서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이는 기술 발전이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지리의 힘』은 정치 영역을 넘어 문화와 정체성 이해에도 확장 가능성을 지닌다.

특정 지형에서 반복된 역사적 경험은 집단 기억을 형성하고, 이는 곧 국가적·문화적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지리는 단순한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역사와 기억을 매개하는 토대라는 점에서 인간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기초 조건으로 기능한다.


요컨대 『지리의 힘』의 오늘날의 의미는 국제 정세를 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는 데 있다. 국가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행위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래 지속되어 온 지형적 조건 속에서 전략을 선택한다. 이 책은 지도 위의 선과 면이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역사와 권력의 방향을 규정하는 요소임을 환기시킨다.


유럽을 횡단하며 만났던 장면들이 다시 배열된다. 폴란드의 넓은 평야, 알프스의 거대한 장벽, 다뉴브 강을 따라 형성된 도시들, 산중턱에 자리한 고대의 신전들. 그곳에서 태어난 문학과 사상, 예술 역시 완전히 독립적인 산물이 아니었다. 환경은 사고의 방향을 은밀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처음의 여행이 텍스트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면, 지금의 여행은 공간을 읽는 작업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공간은 다시 지형 위에 놓여 있다. 인간을 이해하려면 그가 딛고 선 땅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지도를 펼쳐 본다. 도시의 이름들 사이를 잇는 나의 이동 경로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길 위를 따라간 것에 불과하다. 산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강은 여전히 흐르며, 평야는 여전히 열려 있다. 그 위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이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공간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지형을 통해 역사를 읽는 작업이다. 30편에 이르러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도시를 여행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지리를 배우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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