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따라 하는 지브리는 '지브리'가 아니다
1. 똑같은 '지브리'들
'와, 이 사람도 이거 해? 이게 그렇게 좋은가?' 인스타그램부터 카카오톡까지... 어느 순간부터 익숙한 그림체가 SNS를 지배하고 있다. 몽글몽글하고도 복고적인, 그러나 화사한 그림체. 잠시 잊고 살았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영화관에서 양손에 팝콘과 콜라 하나씩 들고 배슬거렸던 시절, 관람석에 마음 편히 앉아 소중한 이들과 함께 봤던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그건 누구나 가슴속에 깊이 묻어 둔 아련한 노스탤지어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한 번쯤 관람한 이들이라면 본 순간 행복한 추억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AI가 만들어 낸 추억을 되돌아본 필자는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AI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인공지능과 관련된 기술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애플, 삼성 등 유수의 대기업뿐 아니라, 일상 속의 개인들도 쉬이 AI를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AI 그림, AI 보이스 등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미 대중의 주목받은 바 있다. 충분한 학습량만 보장해 준다면, 누구나 본인이 선망하던 작가의 그림체를 구현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구미가 당기는 게 있을까. 이러한 생성형 AI는 금세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다. 챗GPT에서 유행한 지브리풍의 그림체 또한 그러한 유행의 일환이다. 역시 유행이 괜히 유행이 아닌 모양이다. 누구에게나 큰 호불호 없이 각광받는 지브리답게, 유행이 번진 3월 말 이래로 1주 만에 7억 장을 넘어섰다고 한다.
해당 지표는 지브리가 얼마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이로써 사람들이 지브리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점쳐 볼 수 있겠다. 똑같은 과정을 거쳐 창조된 7억 장의 그림이, 정말 '지브리'로서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2. '작가들을 사랑한다면!'
지브리풍 이미지 유행 이전에도 이미 생성형 AI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수차례 오간 바 있다. '동일한 스타일의 작품을 수도 없이 학습하여 창출한 결과물이, 과연 저작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생성형 AI 학습에는 타인의 창작물 수집이 반드시 수반되며, 그 과정에서 소유자의 허락은 대부분 누락되기 때문이다. 학습에 활용되는 상당수의 데이터가 누군가의 저작물임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창작물로부터 비롯된 생성형 그림이 저작권으로부터 자유롭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저작권 논쟁은 생성형 AI 그림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주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AI 그림이 유행함으로써, 한창 활동 중인 예술가들이 동기를 잃어버릴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AI 그림이 일정 수준의 질과 속도를 보장해 줌에 따라, 진로를 위해 노력한 이들이 박탈감을 느껴 포기할 여지가 높다는 뜻이다. 예술계의 전체적인 허들이 높아진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예술의 준거가 오직 질과 속도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개성도 분명 예술의 기준일 터인데, AI 그림이 유행하는 현시점에서는 질과 속도가 최우선으로 대우받는 중이다. 그리 된다면, 개성적인 작품은 자연스레 경쟁에서 밀려나고, 시장에는 AI로 형성된 그림만이 남게 된다. 결국 AI로 학습된, 일관된 그림만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그 기준에 떨어진 작가는 꿈을 포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이처럼 여러 논쟁이 불거지고 있음에도, 현재 무분별한 생성형 AI 사용에 제재를 가하는 법률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이 발달한 기술이기에 재빠른 대처가 불가능한 까닭도 있지만, 책임 소재를 물을 대상이 애매한 탓이 제일 크다. AI가 생성한 그림이 원작자의 저작권을 침해한다면, 누구에게 소송을 걸어야 하며, 기준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정해야 하는가? 모든 게 너무나도 불분명하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 법은 가해자를 벌주지 못한다.
위의 세 가지 논점이 맞물려, 예술계 내부에서는 일찍이 생성형 AI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2023년 6월 경, 네이버 웹툰의 '도전 만화' 코너에서는 아마추어 작가와 독자층을 중심으로 AI 웹툰 보이콧 운동이 일어난 바 있다. AI가 만든 창작물은 창작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AI 그림은 화두에 올랐다. 지난 2월, 세계적인 경매 회사인 크리스티스(Christie's)가 AI로만 생성된 미술품 경매를 개최하자, 많은 예술가들의 비판이 빗발쳤다. 이미지 기반 AI 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 카를라 오르티즈(Karla Ortiz)를 선두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AI 그림 경매에 반발했으며, 그중 수천 명은 항의 편지에 서명하기도 했다.
이는 비단 예술가들의 입장에만 국한되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타당하며, 예술계가 아닌 우리도 생각해 봐야 할 주제다. 앞서 살펴봤듯이, 생성형 AI가 여러 도의적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예술에 대한 작가의 권리는 경제적 가치를 넘어 표현의 자유와 맞닿아 있다.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한다면 정상적인 민주 국가로서의 설득력을 잃어버리기에, 우리는 반드시 생성형 AI의 저작권 문제를 고민해야만 한다.
그럼 머리를 맞댄 고민 끝에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다면, 우리는 생성형 AI와 지브리 그림체를 마음 놓고 써도 될까? 아니, 개인의 개성으로 이해해도 될까?
3. 지브리(?)로 정의되는 개인
생성형 AI에 의해 흔들리는 저작권 개념 및 법적 대안도 중대한 문제지만, 필자가 진정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다. AI에 의해 창조된 모조품이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모습, 이게 정녕 건강한 현상일까?
물론, 유행이니까 한 번쯤 발 좀 담가볼 수는 있다. 간단한 조작으로 본인의 모습을 만화 캐릭터처럼 바꿔준다는데, 그 누가 꺼려하겠는가? 더 군다니 지브리다. 모두의 향수를 품고 있는, 그 지브리 말이다. 바로 그 지브리가 나만의 세상에 펼쳐진다면? 내가 어릴 적 꿈꾸던 이상향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 그 감정을 쉽사리 마다할 수 있는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다만, 개인의 기억 속 지브리가 정말 '나만의', 그리고 '지브리'일까?
잠깐 필자가 생각하는 개성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 보겠다. 개성이란 단순히 남과 다르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가 아니다. 개성은 나 자신의 행동 지침이며, 스스로의 언행에 설득력을 부여해 주는 요소다. 우리는 법과 제도가 항상 합리적이고, 사람들이 입맛에 맞게 자기를 대해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가 아닌가. 규율이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는 모순, 타인이 본인을 마음대로 곡해하는 슬픔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 요컨대, 사회는 절대적이고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성이 필요하다. 절대적인 목표와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게 왜 합리적인지, 개성은 이유를 덧붙여준다.
나 자신을 지켜주는 개성의 크기는 저마다 제각각이다. 작게는 말투, 크게는 예술로 발현된다. 그렇게 본다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은 큰 의미의 개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지브리의 작품과 그림체는 그들이 창조한 그들 자신의 개성인 셈이다. 그런데 타인의 개성인 지브리, 심지어 인공지능이 모방한 지브리가 나를 대변한다니. 하물며 인간도 아닌, 개성이 결여된 인공지능이. 진짜 본모습과 괴리가 있을뿐더러,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반쪽짜리 개성이다. 남의 개성에서 영감과 감흥을 건져낼 수는 있겠지만, 나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유행을 따라 하든 말든, 그건 내 사정 아닌가요? 옷도 유행 따라 마음대로 입는데, 왜 이거는 안 되는 건가요?'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터넷상에서의 우리는 프로필 사진, 단 하나로 정의 당한다.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수단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옷은 물론이며 안경·귀고리·가방 등의 장신구, 표정, 걸음걸이, 헤어 스타일 등, 거리를 걷다 보면 똑같은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은가. 하지만 SNS를 켜서 지브리 풍의 프로필 사진들을 본다면? 원본의 외형이 약간의 차이를 보장해 주긴 하겠지만, 그림체 탓에 남들과 비교해 봤을 때 별로 특이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모습이 과연 나를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유행에 의해 뒤덮인 개성은 개인을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개성을 저버리고 유행만 좇는 개인이 늘어나는데, 사회가 더욱 나아질 리도 없다. 다양성이 보증된 사회에서 창의적인 창작물이 나오고, 허를 찌르는 해결책이 나오는 법이다. 똑같은 방향성만 추구하는 구성원들로만 이뤄진 사회에서 어떻게 개선이 이루어지겠는가? 그러면서 왜 사회가 자신을 존중해 주길 원하고, 올바르게 변하길 바라는가? 그러기 전에, 먼저 본인에게 맞는 옷을 찾아야 한다.
4. 나에게로
필자가 대학교에 입학한 후 6년 동안, 유행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파도에 편승한 지브리풍 그림체도 마찬가지다. 항상 그랬듯 맹렬하게 타오르고, 급속도로 식어버릴 예정이다. 그리고 필자는 매일마다 유행의 흐름을 체감한다. 유행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음에도. 그 정도로 현 한국 사회는 유행에 민감하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속으로 되뇐다. '조금 둔감해도 될 거 같은데...?'
한 달 전부터 입방아에 오른 이래로, 지브리풍 그림체는 뜨거운 감자였다. 지브리 그림체의 저작권 문제와 예술계의 악순환, 그리고 미비한 법안은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과 함께 뒤따라왔다. 도의적 측면에서 옳지 않다는 의견이 종종 제기되었으나, 그럼에도 이 추억의 그림체는 적지 않은 이들의 프로필 사진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도덕과 법률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더라도, 지브리 유행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유행이 개성으로 둔갑하는 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유행을 따르면 꽤나 세련되고, 매력 있어 보인다. 동시에 유행과 내가 한 몸이 된 듯한 감상을 받는다. 하지만, 언젠가 진정한 자신을 마주해야 할 순간이 온다. 그때마저도 유행을 쫓아가기엔 너무 지치고 고달프다. 나이를 먹어 자연스레 유행에 뒤처진다면, 그때는 어쩔 셈인가?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우리는 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따라쟁이의 손에 맡긴 지브리는 '지브리'가 아니다. 그런 지브리로 자신을 치장한다 한들, 진정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지금 가짜 추억에 홀려, 정말 소중한 나를 뒤편으로 미루고 있는 건 아닐까?
지브리를 포기해라. 유행에 목매달지 마라. 그러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당신일 때 가장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