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인문학 시리즈 1

내가 한 일이 맞나요?

by 조병근


얼마 전, 회사의 재무 상황이 눈에 띄게 나빠지고 있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다. 그냥 인프라 비용 추이를 보다가, 이건 줄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인프라 비용 절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나는 AI에게 전체 인프라 사용 패턴을 분석해달라고 했다. 어떤 자원이 과하게 쓰이고 있는지, 사용량 대비 비효율적인 자원은 뭔지, 얼마나 더 아낄 수 있는지 — AI가 수백 개의 자원을 분석하고, 최적화 포인트를 정리해줬다. 나는 그 분석 결과를 검토하고, 서비스 안정성에 영향이 없는 선에서 판단을 내린 뒤, 실제로 인프라 자원을 수정했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월 비용이 20% 정도로 유의미하게 줄었고, 팀 내에서 평가도 매우 긍정적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 직후,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찜찜함, 불안함,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 일을 "내"가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분석도, 초안도 AI가 만들었다. 나는 그걸 검토하고 승인하고 메신저에 자랑을 했을 뿐이다. 만약 AI 없이 같은 프로젝트를 했다면, 이 정도 수준의 목표 달성은커녕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거다.


성과는 원래 어떻게 만들어졌나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일의 구조는 비교적 명확했다. 내가 공부하고, 내가 고민하고, 내가 쓰고, 내가 발표한다. 그 과정이 힘들수록, 결과물의 무게도 달랐다. 밤새 코드를 짜서 버그를 잡으면 그건 분명히 내 성과였다. 3개월 동안 매달린 논문이 통과되면 그건 의심할 여지 없이 내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 구조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었다.

노력하면 -> 결과가 나오고 -> 인정받고 -> 성장한다

내가 힘들게 해낸 것은 나의 것이 되고, 그 인정은 내가 받을 자격이 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성장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이 공식을 따라 살아왔다.


그런데 AI가 이 공식에 빈틈을 만들어버렸다. "노력"의 상당 부분을 AI가 대신하게 되면서, 나머지 항들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과는 좋은데, 그게 정말 나의 것인지. 인정을 받아도 되는 건지. 이 과정에서 내가 정말 성장하고 있는 건지.


성취란 무엇인가


철학자들은 이 불편함에 이름을 붙였다. 성취 격차(Achievement Gap)라는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성취는 이렇게 정의된다 — 어떤 주체가, 상당한 어려움을 극복하여, 능력 있게 결과를 이끌어낸 것. 여기서 핵심은 어려움의 극복이다. 쉽게 얻은 것은 성취라고 부르지 않는다. 복권에 당첨된 것을 성취라고 하지 않듯이.


AI는 바로 이 어려움을 제거한다. 수백 개의 인프라 자원을 분석하는 게 몇 분이면 끝난다. 수천 줄의 코드를 짜는 게 몇 시간이면 끝난다. 결과물의 품질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난이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려간다. 더 이상 결과까지 다다르는 과정이 성취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찜찜한 거다. 우리의 무의식은 이미 이 공식을 알고 있으니까. '이건 너무 쉬웠어. 이게 진짜 내 성과일 리가 없어.' 이 감각은 거짓말이 아니다. 진짜로 뭔가가 바뀐 거다.


공식은 참이었던 것인가


우리가 불편한 이유는 노력 = 가치라는 등식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등식은 정말 참이었던 것인가.이미 이 등식에 예외는 많이 있어왔다.


세탁기가 나왔을 때, "손빨래를 안 하면 진짜 빨래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계산기가 나왔을 때, "암산을 안 하면 진짜 수학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자동차가 나왔을 때, "걸어가지 않으면 진짜 여행이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


도구가 노력을 줄여줄 때마다, 인간은 처음에는 불안해하고, 결국 받아들였다. 그리고 줄어든 노력만큼, 더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세탁기가 해방시킨 시간으로 책을 읽고, 계산기가 해방시킨 에너지로 더 복잡한 문제를 풀었다.


즉, 노력의 양이 줄었다고 해서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가치의 원천이 달라지는 거다.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이 시리즈의 출발점이다. AI가 노력을 대신하고, 과정을 단축하고, 결과를 만들어줄 때 — 인간에게 남는 건 뭘까? "내가 한 일"이라는 감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라는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 질문들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철학자들이 다른 형태로 물어왔던 것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AI는 이 질문들을 새롭게 만든 게 아니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앞으로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이 질문들을 하나씩 풀어볼 거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 나는 오히려 이 불편함이 우리를 더 본질적인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만큼은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편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다음편: "확장된 자아, 그리고 도구와 함께 진화한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