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남의 일에 밝다. 타인의 실수와 허점은 놀랍도록 선명하게 보이는데, 막상 그 일이 나에게로 건너오는 순간 시야는 흐려진다. 누군가는 불의를 지적하고, 누군가는 도덕을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이 되는 때는 이상하게도 정해져 있다. 내가 그 불의의 가장자리에서 베이거나, 내 곁에 선 이들이 같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을 때. 그제야 우리는 “이건 옳지 않다”라고 확신을 갖고 말한다. 그 전까지의 ‘옳음’은 어딘가 공중에 떠 있는 선언처럼, 누구에게도 닿지 않은 말풍선처럼 배회한다.
나는 그 공중의 말풍선을 오래 붙잡고 살았다.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나도”라는 태도는 편리했다. 안전했고, 무엇보다도 조용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주문은 하루의 끝을 매끄럽게 닫아주었다. 그러나 매끄러운 표면은 언제나 얇다. 한 번의 스침에도 긁히고, 그 작은 흠집 사이로 내가 미뤄두었던 것들이 스며 나왔다.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변화는 왜 시작되지 않는가, 왜 우리는 늘 누군가의 실패에 더 익숙한가. 나는 대답 대신 침묵을 골랐다. 침묵이 나를 지켜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사회는 거대한 풍향계처럼 보인다.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다수가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우리는 안심하거나 분노한다. 그러나 풍향계를 돌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바람을 핑계 삼는 우리의 마음이다. 책임을 미룰수록 불평은 늘어난다. 불평이 늘어날수록 무력감은 자란다. 무력감은 다시 책임을 미루게 한다. 이렇게 조용한 순환이 쌓일 때, 공동체는 소리 없이 퇴보한다. 그리고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늦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조차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늦음을 피해보려는 마음으로, 아무도 없는 곳을 택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누군가에게는 도피로 보일지 모른다. 나에게는 도피이자 전환이었다. 익숙한 말과 길, 계산 가능한 관계와 규칙으로 짜인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순간, 나는 겨우 나에게서 시작하는 질문들을 배웠다. 외로움은 처음엔 불편했고, 곧 스승이 되었다. 외로움의 시간 속에서 나는 관심과 관조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관심이 타인을 재단하려는 충동으로 흐를 때, 관조는 나를 낮추어 타인의 자리에 잠시 머무르게 했다. 타인의 불행을 가늠하며 내 안도의 높이를 올리는 대신, 그 불행의 온도를 내 손바닥에 대보는 일. 그게 관조가 가르쳐 준 첫 번째 예의였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화려하지 않았다. 언어의 어긋남은 곧 자존심의 어긋남이 되었고, 익숙한 반응을 기대할 수 없는 일상은 매번 작은 시행착오를 요구했다. 그러나 시행착오는 나에게 새로운 근육을 길렀다. 설명 대신 기다림을 배우고, 정답 대신 이해의 범위를 넓히는 힘. 나는 그 힘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아마 나는 여전히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쁜 일과와 눈치로 기워진 대화들 사이에서, 나는 불평으로 나를 방어하고, 방어로 내 삶을 옹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행복을 말하는 이들을 속으로 가볍게 조롱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나의 성격이 그렇다. 그래서 떠났다. 떠났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떠남은 적어도 나를 나에게 데려왔다.
이 낯선 곳에서 나는 기이한 평안을 얻었다. 평안은 상황이 좋아져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황은 여전히 계산이 어려웠고, 때로는 불편했다. 그런데도 평안이 가능했던 이유는, 타인의 시선을 중심에 두지 않는 하루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결핍을 숨기느라 바쁘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서툰 발음으로 의사를 전하다가 서로 웃을 수 있었다. 그 웃음은 나를 작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작아지는 연습은 나를 단단하게 했다. 단단함은 소리를 높이는 데서 생기지 않았다. 내 자리를 알고, 타인의 자리를 인정하는 느린 호흡에서 생겨났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문장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두려움은 항상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시작한다. 가족과 동료, 친구와 이웃. 우리는 그들을 지키고 싶어서 침묵하고, 그 침묵이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잊는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착하고 싶었고, 착하다는 평판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착함이란 무엇인가. 타인의 불편을 피하려는 기민함인가, 아니면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옳다고 믿는 자리를 택하는 느린 용기인가. 나는 오랫동안 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쌓인 자리에서, 나는 내 삶의 중심이 비어 있음을 보았다.
용기는 성격이 아니다. 성격을 이유로 용기를 포기하는 일은 생활을 이유로 사랑을 미루는 것과 닮았다. 용기는 습관이다. 아주 작은 결심을 되풀이하는 습관. 오늘은 불평을 먼저 삼키는 대신 사실을 먼저 확인하는 습관, 내 편의만 따지기 전에 상대의 사정을 한 번 더 묻는 습관, ‘모두가 그렇다’는 문장을 입에 올리기 전에 정말 모두가 그런지 돌아보는 습관. 습관은 매일의 근육이다. 근육은 쓰지 않으면 줄어들고, 쓰면 자란다. 그러니 공동체의 근육도 같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작은 결심이 다음 사람의 작은 결심과 닿을 때, 그 연결이 곧 방향이 된다. 풍향계는 바람이 아니라 사람이 돌린다.
나는 내 이야기만 할 수 있다. 내 선택이 누구에게나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떠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들을 이제는 조금 안다. 관계의 가장자리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 소속이 약할 때도 존엄은 지킬 수 있다는 사실. 불안이 가라앉는 자리는 승리가 아니라 이해라는 사실. 이해는 상대방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나를 바꾼다. 그리고 그 변화가 쌓일 때, 조용한 용기는 주변으로 번진다. 누군가가 먼저 사과하고, 누군가가 먼저 물러서고, 누군가가 먼저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 한 번의 선행이 다음의 선행을 부른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앞으로 간다.
사람들의 관심은 정의로 포장된 생존 본능일 때가 많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특히 사십을 넘기며 나는 그 포장을 벗겨보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관심이 때로는 통제의 이름일 수 있고, 도덕이 때로는 안전욕구의 다른 얼굴일 수 있음을 본다. 그 깨달음이 나를 냉소로 데려가지 않기를 바란다. 냉소는 생각의 끝이면서 삶의 시작이 아니다. 삶은 끝내 누군가의 편이 되어주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 편들어 줌이 편파가 아니라 연대가 되려면, 우리는 먼저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 두려움 때문에 누구를 침묵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그 침묵으로부터 누가 이익을 얻는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행복’이라는 말을 호사로 여기며 여전히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바쁨은 위로가 된다. 바쁘면 생각은 잠시 뒤로 밀린다. 그러나 생각이 밀릴수록 감정은 둔해지고, 둔해진 감정 위로 불평이 쌓인다. 불평은 우리를 현실과 화해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가난하게 만든다. 나는 그 가난을 늦게 알았고, 늦게 알았기에 떠났다. 떠남은 책임을 피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책임의 시작이었다. 누구의 기준에 기대지 않고, 내가 옳다고 믿는 자리를 내 발로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확인은 때로 외로웠고, 가끔 우스웠으며, 종종 보람찼다. 그 모든 감정의 합이 내가 말하는 평안이다.
이제 나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한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번엔 내가 먼저.” 먼저 묻고, 먼저 사과하고, 먼저 멈춘다. 작은 선행은 대단한 신념보다 오래간다. 오래가는 것만이 세상을 조금 움직인다. 변화는 거대한 구호가 아니라, 작은 반복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미 그 사실을 안다. 다만 아는 것을 사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 시간이 길어지지 않게, 오늘의 습관을 내일로 미루지 않기 위해, 나는 다시 중국의 작은 골목을 걷는다. 낯선 표정과 익숙해진 풍경 사이에서, 나는 매일의 용기를 연습한다.
이 글을 마치며, 나는 내게 묻는다. 관심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타인의 실수인가, 타인의 자리인가. 내가 배운 답은 후자다. 타인의 자리에 잠시 머무르려는 마음, 그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잃었던 인간의 온기를 되찾는 첫걸음이다. 그 첫걸음을 반복하는 일이 곧 용기의 순서다. 우리는 누구나 그 순서를 배울 수 있다. 늦게라도 배운다는 것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 앞으로의 방향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서 돌아서, 서로가 조금씩 괜찮아지는 쪽으로 발을 옮기는 것. 그 사소한 이동이 우리의 내일을 바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