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 연말 환승의 생각들

카톡을 보며 걷는 열 개의 발걸음

by leolee

연말 퇴근 시간, 2호선 신도림역 환승 통로.


수천 개의 알림과 발소리가 겹치는 사이,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군중 속에서 각기 다른 신호가 깜박인다.




김태섭(52, 제조 중견기업 영업부장)


환승 통로의 곡선이 사람을 밀어낸다. 카톡 상단에 사장단 방이 또 깜박인다. “성과급 가이드라인 최종.” 손가락이 망설이는 순간, 앞사람의 백팩이 내 팔꿈치를 스친다. 수치가 눈에 들어온다. A그룹 110%, B그룹 85%. 문자로만 보면 아무 일도 아니다. 하지만 85% 뒤에는 사람 얼굴이 붙어 있다. 올해 실적이 나쁘지 않았는데 환율과 채권, 못 받은 외상 매출이 다 깎아먹었다. 팀 단톡에선 벌써 회식 날짜를 잡자고 한다. 어떻게 말할까. “올해는 회사가 어려워서…” 이 문장은 이미 모든 부장이 지겨울 만큼 썼다. 다른 말이 필요하다. “내년엔 당신들 이름이 먼저 박힌 전략을 하자.” 계단으로 내려가며, 닫던 카톡을 다시 연다. 태섭 부장님, 성과급 루머 사실인가요? 젊은 대리의 메시지. 답장을 쓰다 지운다. 결국 짧게. “공식 발표 전까진 추측하지 말자. 대신 내일 30분만 빌려라. 우리가 내년 판을 먼저 짜자.”




이다해(29, 스타트업 마케터)


신도림의 에스컬레이터는 늘 한 칸 비워 서기를 잊게 만든다. 바삐 오른쪽 줄로 올라가며 카톡 알림을 훑는다. ‘연말 리마인드 캠페인’ 채널에 대표가 밤 9시에 회의를 박았다. “이번 주말까지 성장률 12% 끌어올릴 방안.” 주말? 손가락이 잠깐 멈춘다. 개인 채팅으로 연인이 보낸 카톡이 바로 위에 뜬다. “이번 주말엔 너 시간 어때?” 똑같이 빨간 동그란 원위에 하얗게 쓰여있는 "1" 사이에서 가슴이 작게 당긴다. 나는 업무방에 먼저 답한다. “리퍼럴 코드에 커뮤니티 얼라이언스 얹겠습니다. 오프라인 제휴처 3곳 후보 올릴게요.” 그리고 연인에게도 쓴다. “토 오후 3시. 네가 정한 카페.” 스크린 광고판이 번쩍이며 연말 콘서트를 돌려보낸다. 내 손목의 시계가 진동한다. 팀장이 “좋아. 다해가 총대.”라고 쓴다. 내년엔 총대를 칼로 바꾸고 싶다. 칼같이 퇴근하는 습관으로.




정유진(24, 상급종합병원 신규 간호사)


달리는 사람의 발소리는 맥박처럼 붙어온다. 카톡 가족방이 웅성거린다. “유진아, 설에 시골 올 수 있니?” 야간 인계표 사진을 찍어 올리려다 말았다. 슬쩍 스크롤을 내리니 동기방에 사진이 쏟아진다. 회식, 케이크, 수료증. 나는 오늘 새벽 4시에 DNR 설명을 했고, 오후엔 링거 속도가 자꾸 어긋나는 환자 곁을 서성였다. ‘연말’은 병동에서 달력을 넘길 뿐이다. 엄마에게 “상황 보고 결정할게요”라고 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답장을 보낸다. 괜찮아, 올해는 견뎠다. 환승 계단을 내려서며 카톡을 다시 연다. 환자 보호자가 감사하다고 남긴 짧은 메시지. “오늘 진짜 덕분이었어요.” 한 줄의 말이 12시간의 허기를 채운다. 나도 답한다. “새벽엔 더 추우니 꼭 따뜻하게 주무세요.”




최상우(41, 게임 개발자—클라이언트 파트 리드)


환풍구에서 찬 공기가 올라온다. 디스코드 알림이 미친 듯 울려도, 오늘은 카톡이 더 무겁다. 퍼블리셔 단톡에 새 빌드가 승인 보류. 프레임 드랍, 셧다운 이슈 재현. 팀 채팅은 “핫픽스 밤샘?”으로 기울고 있다. 연말엔 늘 크런치가 당연하다는 듯 달력에 박힌다. 내 아들 사진이 위젯에서 웃는다. 학예회에 못 갔던 지난주가 떠오른다. 슬쩍 사내방에 적는다. “오늘은 리프로듀서만 남고 나머진 내일 아침 7시부터. 재현 영상 내가 지금 찍어 올림.” 걷는 속도가 느려진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카톡에 ‘좋아요’가 붙고, QA가 “고맙다 리드”를 남긴다. 나는 속으로만 답한다. 내년엔 일정이 사람을 먹지 않게 하자.




하은미(47, 초등학교 담임교사)


단체방 두 개가 동시에 울린다. 학부모회, 학급 공지. “겨울방학 생활계획표 파일 깨져요.” “방학식 선물은 얼마까지?” “아침지도 도와줄 분?” 나는 환승 보드 옆으로 붙어 천천히 쓴다. “파일 재업로드했어요. 선물은 강요 금지, 자율입니다. 대신 편지 한 장 써 주시면 아이들이 더 좋아해요.” 카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또 다른 메시지. “선생님, 우리 민재가 요즘 자꾸 울어요.” 어젯밤 적어둔 메모를 떠올린다. 민재의 자리 옆에 달력 스티커 붙여주기, 쉬는 시간마다 “오늘 잘한 한 가지” 적기. 신도림의 인파 속에서, 나는 오늘의 민재를 떠올리며 걷는다. 선생님이 할 수 있는 건 대단한 지도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조정임을, 다시 되새기면서.




오지후(18, 고3—정시 준비생)


이어폰 줄이 흔들린다. 단톡방 이름이 ‘N수 고려중’으로 바뀌어 있다. 누군가 합격 스티커를 붙였고, 누군가는 “보류”를 달았다. 엄마는 “새해부터 학원 상담 잡자”라고 보냈다. 화면 위쪽에서 연인이 보낸 메시지가 미안하게 반짝인다. “오늘만 보고 답해줘.” 나는 썼다 지운다. 지금은 수학 밖에 없어. 하지만 사실은 이 더 크다. 실패의 재시도 버튼을 다시 누르는 손의 떨림. 환승 계단에서 숨이 차오른다. 나는 단톡에 짧게 쓴다. “이번 주는 기출만 파요. 카톡 잠깐 뮤트.” 그리고 연인에게는 솔직하게 보낸다. “미안. 네가 싫어서가 아니야. 나는 지금 나를 붙잡아야 돼.” 손에 땀이 배어 화면이 미끄럽다. 그래도 보냈다. 오늘은 내 편을 내가 한다.




김해솔(33, 대리운전 기사—퇴근 러시 대기 이동)


환승 통로의 공기가 소주 냄새와 겨울 냄새를 섞어 보낸다. 기사방에서 호출 알림이 폭죽처럼 튄다. “구로—광진 13만.” “신도림—분당 9만 협상 가능.” 평일인데 요금이 치솟았다. 연말이니까. 카톡에 아내가 사진을 보냈다. 아이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민다. 장난감 별이 약간 비뚤다. 나는 이모티콘 대신 글자를 쓴다. “오늘은 2콜만 타고 1시에 들어갈게.” 기사방에선 “형님 오늘은 골든데이인데요?”가 붙는다. 하지만 골든데이가 집엔 종종 블랙데이다. 나는 호출을 눌렀다가 취소한다. 첫 콜은 짧은 거리로, 몸을 풀자. 돈도 체력도 페이스 조절이 있어야 오래 간다.




윤소정(38, 프리랜서 번역가—법/IT 전공)


플랫폼 채팅에서 계약이 넘어왔다. “연말 특집 기획서 번역—내일까지.” 카톡으로는 세무사님이 “종소세 서류 빠진 것 확인”을 보냈다. 손이 차가워진다. 프리랜서는 나 혼자 회계팀이고, 나 혼자 영업팀이다. 의자에 앉고 싶지만, 신도림에는 앉을 데가 없다. 멈추면 사람 흐름이 화를 낸다. 나는 카톡에 쓴다. “내일 18시 납품, NDA 서명 완료. 용어집 공유 부탁.” 그리고 세무사님에겐 스캔 파일을 보낸다. “지금 역이라 와이파이 끊기면 다시 전송할게요.” 환승계단 입구에 서서 폰을 잠깐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 신호가 돌아온다. 일이 들어오면 늘 짧은 기쁨과 긴 마감이 함께 온다. 그래도 선택했다. 내 이름으로 벌고, 내 이름으로 책임지는 일.




장명철(62, 은퇴 앞둔 정보시스템 관리자)


퇴직금 안내문서가 회사방에 올라왔다. 클릭을 두 번 했다가 닫는다. 같은 시절을 보낸 동기들의 카톡방에는 여행 계획이 쏟아진다. “후쿠오카 3박 4일 어때?” 나는 지하에 내려가며, 내 오랜 습관처럼 장애 알림을 먼저 찾았다. 이 직업은 늘 무언가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회사가 잠들 때도 서버는 깨어 있고, 나는 종종 그 곁을 지켰다. 이제 내려놓을 때가 온다. 아내가 보낸 카톡을 연다. “당신, 내년엔 당신 스케줄표를 나도 몰라서 좋겠다.” 농담이 섞인 따뜻함. 나는 답한다. “그럼 내년 1월 첫째 주, 당신 스케줄에 나도 등록.” 신도림 환승의 굽은 통로 너머로, 내 다음 페이지가 쓸만한 빈칸으로 보여 온다.




배수아(27, 인디 뮤지션/영상 편집 알바)


D-Cube 광고판에 화려한 무대가 반짝인다. 하지만 내 카톡은 조용히 떨린다. 공연 섭외가 취소됐다. “연말 라인업 조정.” 대신 편집 알바는 밤샘 요청. 브로셔 대신 타임라인을 펼칠 밤이 시작된다. 단톡에 밴드 친구들이 보내는 위로가 따뜻하다. “우리 버스킹 할까?” “연말에 역 근처는 단속 빡세.” 나는 짧게 “괜찮아. 곡 쓰자.”고 보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카톡을 쓴다. 오늘은 관객이 없어도, 네가 듣는다. 환승 벽면의 거울 같은 유리에 스치는 내 얼굴이 잠깐 낯설다. 그래도 목을 가볍게 푼다. 통로 끝 공기의 잔향을 훔쳐 한 소절 흥얼거린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드럼, 광고판이 신스, 내 걸음이 베이스가 된다. 오늘의 무대는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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