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Jordan)은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하였으며, 현재의 수도인 암만(Amman) 남부 지역에서 BC 7,000년 전의 촌락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이 암몬, 모압, 에돔 왕국을 세우고 이스라엘 왕국과 대립하였으며, 바빌론과 앗시리아 등 중동의 제국들과 교역하며 발전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헬레니즘) 문화가 요르단 지역에 전파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는 요르단 남부에서 아랍계인 나바티안 사람들이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하였다. 나바티안 사람들은 아라비아반도와 지중해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장악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나바티안 문명의 수도인 페트라는 오늘날 요르단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유명하다.
로마제국에 정복된 이후에 요르단은 아라비아반도와 지중해 사이 무역로로서 번창했으며, 지진으로 파괴된 페트라를 대신해 오늘날의 암만 지역이 중심부로 성장했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지정한 뒤에는 요르단 각지에 교회가 건설되었다. AD 7세기에 아랍 모슬렘이 요르단을 점령하면서 이슬람 시대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요르단 인근 다마스쿠스(Damascus)를 수도로 삼고 왕조의 칼리프들은 요르단 사막 지역에 건설된 궁전에 기거하였다, 아랍 모슬렘의 지배 아래 요르단의 기독교도들은 점차 모슬렘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지배자가 바뀌고 현재 이라크의 바그다드(Baghdad)를 수도로 삼으며 요르단 지역은 정치·경제적 중심지에서 밀려나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양한 모슬렘 왕조가 요르단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12세기 중동을 침공한 십자군들이 요르단 지역에 성채를 건설하기도 했다. 십자군이 건설한 대표적인 성채로 카락(Karak) 성채가 있다. 요르단 지역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요르단 지역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권력과 치안 공백 상황에서 베두인족의 농촌 약탈과 부족 간 내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요르단 지역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현대 요르단 왕국은 1921년 영국의 신탁통치 아래에서 독립하여 요르단에 자치국을 건설하며 성립되었다. 압둘라 국왕을 거쳐 1952년 후세인이 권좌에 47년간 있다가 죽고 지금은 그의 아들 압둘라가 왕위를 이어받아 통치하고 있다. 요르단은 여러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시리아, 동쪽으로는 이라크, 서쪽으로는 이스라엘,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요르단은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 이 지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산(Bashan), 암몬(Ammon), 모압(Moab), 에돔(Edom)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네 지역은 요단강의 중요 지류들인 야르묵강, 얍복강, 아르논강, 세렛강을 중심으로 나뉜다. 이렇게 나뉘게 된 데는 이 지역의 지형적 특색 때문이다. 각 지역 사이에는 수백 미터 깊이의 협곡이 존재하고 그 바닥에 강들이 흐른다. 이러한 깊은 협곡이 각 지역을 고립시키고 자연적인 방어망을 구축하게 하였다.
최북단의 바산은 오늘날 골란고원으로서 야르묵강의 북부지역을 말한다. 이곳은 시리아에 속해 있었지만 1967년 ‘6일 전쟁’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암몬은 야르묵강에서 아르논 강에 이르는 길르앗 산지를 말한다. 얍복강을 중심으로 상부 길르앗 산지와 하부 길르앗 산지로 구분된다. 이곳의 지형은 대체로 높고 물이 풍부해서 나무가 많이 자라고 포도와 올리브의 주요 산지이다. 모압 지역은 아르논강과 세렛강 사이를 지칭한다. 이곳은 테이블 형태의 고원지대로서 그 높이는 해발 900m이다. 사해의 수면이 해저 400m인 점을 고려하면 이곳은 사해로부터 1,300m나 높은 지역이다. 겨울철의 풍부한 습기가 포도 재배 등 농사에 적합하며, 목축에 적합한 목초지로 유명하다. 구약 성경의 열왕기하(2 Kings) 3장 4절에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에 매년 많은 양의 털을 바쳐 ‘양치는 자’로 호칭하고 있다. 룻기(Ruth)에 의하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의 가족이 기근을 피하여 이곳 모압 지역으로 이주한 적도 있었다.
에돔은 세렛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구약 시대, 에돔 지역에 요단강 동편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존재하였으며, 요새와 같은 지역적 특성 때문에 도피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험준한 지역을 벗어나면 넓은 초지를 형성하고 있다. 더 동쪽으로 가면 사막지대로 건조하다. 구약 성경 창세기 36장에 의하면, 에돔의 시조는 이삭과 리브가의 쌍둥이 아들로 장자요 야곱의 형인 에서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는 혈연적인 관계였으나 역사적으로 둘은 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둘의 첫 번째 접촉은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의 요르단 지역을 통하여 가나안 지역으로 북상할 때이다. 에돔은 자기 지역을 통과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모세 일행은 다른 길을 택하여 에돔과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둘의 갈등은 이 사건을 통하여 더욱 깊어졌다.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왕정을 도입한 사울은 에돔과 전쟁을 벌였으며 그 뒤의 다윗은 에돔 지역을 처음으로 점령한 이스라엘 왕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에돔은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 그 뒤에 이를 토벌하려는 이스라엘과 이를 저지하려는 에돔과 엎치락뒤치락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군대에 함락될 때, 에돔은 크게 기뻐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적대감이 더욱 커졌다. BC 6세기에 에돔도 바벨론에게 점령을 당하면서 점차 쇠퇴하고 결국은 에돔의 원주민들은 서쪽의 네게브 지역으로 이주하고 그리스(헬라)인들은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이두메’라고 불렀다.
구약 시대 말경에 토착 아랍인인 나바티안인들이 에돔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새로운 문화와 전통이 생겨났다. 나바티안 왕국의 수도는 페트라였다. 페트라는 성경에 나오는 ‘셀라’와 같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페트라와 셀라 모두가 ‘바위’ 혹은 ‘반석’이라는 의미의 헬라어와 히브리어 단어이다. 이들은 BC 580년경에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그 후 AD 106년경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고 자신들의 문명을 크게 꽃 피웠다. 나바티안 사람들은 페트라 지역에 거대한 바위 계곡을 깎아 놀라운 바위 도시를 건설하였다. 바위산의 길이는 1,379m, 폭은 225~450m나 된다. 이곳은 해발이 1,000m 이상 되는 높은 산지이다. 역사적으로 분명하지 않지만, 로마 점령 이후 이곳에 큰 지진이 발생하면서 무너져 폐허화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1812년에 젊은 유럽 탐험가가 찾아내어 유럽인들에게 페트라의 존재가 알려졌다. 페트라 입구의 폭이 3m가 채 안 되어 발견이 쉽지 않았나 보다. 그 뒤에 일련의 발굴 작업을 거쳐서 일반 여행자에게 공개되었다. 위 사진은 페트라 안에 있는 바위 속에 새겨진 유적지의 하나이다.
케락(Kerak)은 3면이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지역으로 한때는 모압 왕국의 수도였고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에 도시가 번창하였다. 1132년 십자군 시대에 모슬렘의 세력을 막기 위한 요새가 건설되었다. 현재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Amman)은 그 역사가 BC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도시이다. 오늘날의 암만은 해발 850m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곳곳에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성채와 유적들이 간직되어 있다.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데 있는 메드바(Medaba)는 주변에 비옥한 토양의 고원지대가 있어서 이스라엘과 모압이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였던 지역이었는데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중요한 도시로 부각(浮刻)되었다. 메드바에 있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건물 바닥에서 옛날의 팔레스타인 지도가 그려진 모자이크 장식이 1897년에 발굴되었다. 이 모자이크 지도는 당시 인근 지역의 지형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느보산(Mount Nebo)은 메드바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져 있다. 이곳은 해발 800m 높이의 산이다. 구약 신명기(Deuteronomy) 34장에 의하면 이집트를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40여 년 동안 광야 생활을 이끈 모세가 여리고(Jericho)의 맞은편에 있는 느보산의 비스가(Pisgah) 봉우리에 올라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현재 느보산에는 놋뱀 기념물, 기념교회, 옛날 순례객들을 위한 이정표와 현재 주변 지역의 방향표와 지명 등이 있다. 다음날에는 버스를 타고 알렌비 다리를 건너 이스라엘에 입국하게 된다. 알렌비(Edmund H. Allenby, 1861~1936)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전선을 지휘한 영국군 사령관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