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반도체 소자는 1947년 미국의 벨 전화 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ies)에서 게르마늄 점 접합 트랜지스터(point-contact transistor)를 세 사람의 과학자 바딘(John Bardeen, 1908~1991), 쇼클리(William B. Shockley, 1910~1989), 브래튼(Walter H. Brattain, 1902~1987)이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트랜지스터는 transfer와 resistor의 합성어이다. 이들은 이 발명의 공로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벨 전화 연구소는 1925년 AT&T(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 회사에서 설립하였는데 원래는 AT&T의 제조담당 방계회사인 웨스턴 일렉트릭(Western Electric)의 연구 부문이었다. 벨 전화 연구소는 전화교환기에 필요한 기술에서부터 전화선 피복, 트랜지스터에 이르는 각종 제품을 개발해 냈다.
AT&T 주식회사는 미국의 다국적 복합 지주회사로 세계 최대 통신 기업이다. 오늘날 미국의 최대 유선전화 서비스와 제2위의 이동전화 서비스 제공자이다. 전화기의 발명자인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에 의해 1885년 뉴욕에서 세워진 미국전화및전신회사(AT&T Corporation)를 전신으로 한다. 20세기 초엽 미국 정부와 협상의 결과 전화 사업의 독점권을 확보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독점적 상태를 용인할 수 없다는 취지로 1970년대 초 반독점 소송의 결과로 회사의 해체를 명령하여 8개의 지역 벨 전화회사와 연구 개발 부문 회사로 분리되고, AT&T는 장거리 전화 서비스만 담당하는 회사가 되었다. 이때 미국 뉴저지주 머레이 힐에 있는 벨 전화 연구소는 이름이 벨 연구소(Bell Laboratories)로 바뀌고, 독립법인이 되었다. 1996년에는 알카텔-루슨트에 매각되었다. 그러다 2016년에 노키아가 알카텔-루슨트를 인수하여 현재는 핀란드의 다국적 통신회사인 노키아의 자회사가 되고 이름도 노키아 벨 연구소(Nokia Bell Labs)로 바뀌었다. 벨 연구소는 창의적인 연구를 위한 순수 연구소이다. 통신에 필요한 재료, 하드웨어, 공정뿐만 아니라 유닉스, C, 모뎀 명령어 등 컴퓨터 소프트웨어, 천문학 분야의 기술도 개발하였다.
쇼클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는 미국인이었고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자랐다. 1932년 칼테크(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CALTECH)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1936년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의 지도교수는 고체물리학 분야에서 유명한 교수인 슬레이터(John C. Slater, 1900~1976)였고, 박사학위 논문의 제목은 ‘염화나트륨 결정에서 전자 파동함수의 계산(Calculation of Electron Wave Functions in Sodium Chloride Crystals)’이었다. 쇼클리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바로 벨 전화 연구소에 합류하여 전자 회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데이비슨(Clinton J. Davisson) 밑으로 가서 진공관 개발 그룹에 들어갔다. 그리고 1940년대에 바딘과 브래튼이 속해 있는 쇼클리 그룹은 진공관을 대체할 소자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는데, 앰프에 사용되는 부품인 진공관이 쉽게 깨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쇼클리는 바딘과 브래튼을 각자 연구하도록 내버려 두고 혼자 연구를 진행하며, 가끔 그들의 연구를 지도하러 들렀다고 한다.
바딘은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Madison)에서 태어났다. 바딘은 일찍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928년에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전기공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후 1929년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는 석유 기업 걸프에 입사하여 연구원으로 근무한 후에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박사 과정에 지원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고 193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8년부터 미네소타 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1941~45년에는 워싱턴의 해군 병기연구소(Naval Research Lab)의 물리학자로 임관되고, 1945년에 벨 전화 연구소에 들어가 1947년 쇼클리 등과 트랜지스터를 개발해 냈다. 1951년 쇼클리와의 관계 악화로 벨 전화 연구소를 그만두고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캠퍼스(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의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후 반도체와 금속에서의 전기전도, 반도체의 표면 현상 등을 연구했으며, 1957년에는 초전도 이론을 발표했다. 1957년 쿠퍼(Leon N. Cooper, 1930~ ), 슈리퍼(John R. Schrieffer, 1931~2019)와 함께 초전도 표준이론을 발표한 업적으로 1972년 두 번째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노벨상을 2번 수상한 4명의 수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한편 세 사람 중에 가장 연장자인 브래튼은 1902년 중국에서 태어났으며, 영아 시절에 미국으로 돌아와 서북부에 있는 주에서 성장하였다. 워싱턴 주에 있는 위트먼 대학(Whitman College)에서 물리와 수학으로 학사학위를 받고, 1926년 오리건 대학교(University of Oregon)에서 석사학위(Master of Arts)를 받고, 미네소타 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에서 재료공학을 연구하고 1929년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벨 전화 연구소에 들어가 반도체 연구에 종사하였다. 고체 표면의 성질을 연구하고, 텅스텐의 열이온 방출로부터 반도체 표면의 정류 성질과 광전효과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7년 12월에 바딘과 브래튼이 점 접합 트랜지스터를 만들어 냈다. 쇼클리는 팀의 연구가 전기장 효과를 이용하자는 자기 아이디어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자신이 특허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허를 자신의 이름만 써서 출원하려 했으며 이런 생각을 바딘과 브래튼에게 말했다. 동시에 그는 몰래 다른 형태의 트랜지스터인 접합 트랜지스터(junction transistor)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접합 트랜지스터가 더 상업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벨 전화 연구소의 특허 담당 변호사는 쇼클리의 전기장 효과(field effect) 원리가 1930년에 이미 릴리언펠드(Julius E. Lilienfeld, 1882~1963)에 의해 특허 출원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특허가 거부될 위험성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롭게 출원하려는 특허를 바딘-브래튼 디자인에만 한정적으로 적용하였다. 따라서 쇼클리의 이름은 그 발명의 특허에서 빠져 있다.
그동안 쇼클리는 전자의 유동(drift), 확산(diffusion)에 대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고체의 결정에서 전자 흐름을 결정하는 미분 방정식을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또한 소수 캐리어 주입(minority carrier injection)의 가능성을 생각해 내었다. 이 생각은 몇 주 후에 샌드위치 트랜지스터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이를 1951년 쇼클리는 바이폴라 접합 트랜지스터(Bipolar Junction Transistor; BJT)로 명하고, 이 발명에 대한 특허권을 갖게 되었다. 새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쇼클리는 여론의 큰 관심을 얻게 되었다. 쇼클리의 연설과 강연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바딘과 브래튼에게 공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대중매체들은 그들의 공을 축소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은 바딘과 브래튼을 더욱 소외시켰고, 쇼클리는 두 사람을 접합 트랜지스터 연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바딘은 결국 사직하였고, 브래튼은 쇼클리와 함께 일하기를 거부하였다. 그의 다소 괴팍한 지도 스타일은 벨 전화 연구소에서 경영진으로 승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는 연구자, 이론가로서만 평가받았다. 쇼클리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권력과 이득을 원했으며, 그는 벨 전화 연구소를 1953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 고향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