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머물다 간, 낭도
물결 소리에 섞인 새벽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깊 은 잠에서 깼는지, 아니면 꿈이 현실로 밀려들었는지 모를 경계에서 눈을 떴다. 세상의 빛이 채 오르기 전, 아직은 희뿌연 어둠 속에서 나와 하루가 동시에 깨어났다. 여수에서의 마지막 아침. 이 여행의 끝자락이 아니라, 다시 시작될 일상의 들머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기억조차 희미한 꿈을 더듬다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이미 깨어버린 정신은 더는 잠들지 않았다. 여행 일주일째, 몸과 마음에 누적된 피로가 조금씩 본색을 드러냈다.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설렘보다 익숙한 환경에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젯밤에 삼일로 계획했던 고흥 일정을 급히 하루로 줄였다. 아픈 남편을 생각하면 멈추는 게 맞았다. 아쉬움보다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여행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멀리 가는 일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일임을 받아들였다.
나이들어 간다는 건 단지 시간을 한 층 한 층 쌓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었다. 젊을 땐 멈춤이 불안했지만 이제는 멈춤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한다. 서로의 속도를 맞추고, 다름을 받아들이며, 유연한 마음으로 하루를 건너는 것, 그것이 나이 듦의 품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더 천천히, 그리고 더 다정하게 시작하기로 했다. 전라남도 10대 명섬 중 하나인 낭도를 거쳐 고흥으로 향하는 길, 그 길 위에서 다시 한 번 ‘함께’의 소중함을 배우고 싶었다.
유난히 고요한 아침이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말없이 눈빛으로 오늘 하루를 조율했다. 그렇게 마음을 맞춘 뒤, 잔잔한 설렘을 안고 길을 나섰다.
조발대교를 시작으로 둔병대교, 낭도대교를 건너 약 한 시간 만에 낭도에 도착했다. 작고 소박한 어촌 마을, 도시의 분주함과는 결이 다른 이곳에는 낭도만의 숨결이 느껴졌다. 첫인상은 단연 ‘고요함’이었다. 사람들의 발걸음보다 바람 소리가 먼저 들리고, 자동차 소음 대신 갈매기 울음이 먼저 다가왔다. 시간이 멈춘 듯, 평온한 정적이 섬 전체에 감돌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낭도 둘레길 1코스를 걷기로 했다. 50분쯤 소요되는 길이었지만, 우리는 시간보다 마음의 속도를 따르기로 했다. 바람이 스치는 대로, 눈길이 닿는 대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담벼락에 걸린 ‘갱번 미술길’이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담벼락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묻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 투박함 속에 따스한 정겨움이 묻어났다. 거창한 예술이 아니라 일상의 숨결을 담은 이야기들이었다. 바람에 색이 바래고, 비에 조금씩 닳아가면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언젠간 우리도 세월의 풍상 속에서 바래고 닳아가겠지만, 그럼에도 제 빛을 잃지 않고 서로의 곁에서 오래도록 남기를 바랐다.
길모퉁이에서 유모차를 밀고 노인정으로 향하던 여자 어르신 을 만났다. 낯선 이임을 단박에 알아보시고는,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건네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토록 마음을 쏟아주시다니, 짧은 한마디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 곳에서 오래전 돌아가신 엄마를 만난듯했다.
파키슨과 알츠하이머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가면서도 끝까지 자식 걱정만 하던 엄마, 어르신의 따뜻한 말투 속에 엄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어르신의 유모차와 굽은 등, 잔잔한 말투 하나까지 그리움의 결로 다가왔다. 익숙한 풍경 속 낯선 인연이 불쑥 코끝을 찌르며 잊고 있던 그리움을 살포시 건드렸다.
마을 어귀에서 한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 어르신을 만났다. 남녀 노인정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신기해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정겨운 사투리 한 마디에 웃음이 났다. 낯선 길이 순식간에 친근한 동네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여자 어르신이 유모차를 밀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연이어 마주한 풍경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여자 어르신들은 하나같이 유모차를 밀고, 남자 어르신들은 지팡이를 짚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엄마가 밀던 유모차에는 단순한 보조 기구가 아니었다. 장에서 사 온 채소와 과일, 생선과 고기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엄마의 하루와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수레 같았지만, 사실은 엄마의 삶을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멈출 수 없었던 나날들, 그 유모차는 엄마의 두 다리이자 의지였고,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함께 견뎌온 동반자였다.
흔들리는 어르신의 걸음걸이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드리웠다. 천천히 지나가는 작은 바퀴와 그 안에 실린 삶의 흔적을 바라보며, 나는 엄마의 손길과 그 삶의 깊이를 다시 보았다. 유모차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세월과 사랑, 그리고 한 사람의 고단하지만, 단단했던 삶의 무게였다.
낭도 둘레길 1코스에 접어들었다. 발걸음마다 시원한 바람이 함께 했고 길게 뻗은 해안선과 푸른 바다가 눈앞에 넘실거렸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길은 자연스럽게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고, 몸과 마음이 서서히 호흡을 맞추는 느낌이었다.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순간,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바람에 실린 바다 향기와 파도 소리가 뒤섞이며, 내 안의 생각들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길은 험하지 않았지만, 오래 걷자,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왔다. 그때 남편이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왔다. 앞쪽은 그가 잡고 뒤쪽은 내가 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나뭇가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 걸었다. 서로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 작은 나뭇가지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처럼 느껴졌고, 그 덕분에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어느새 숨도 고르게 가라앉고, 무겁던 다리도 한결 가벼워졌다.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그 고단함을 덮어 준 듯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앞에서 이끌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지탱해 주며 여기까지 걸어왔다. 때로는 내가 먼저 걷기도 했고, 때로는 그가 나를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속도를 맞춰가며, 서로의 무게를 나눠지며 함께 걸어왔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잡고, 그렇게 서로를 지탱해 온 시간이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뿌리 내리게 했다. 그 길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함께라면 어떤 일이라도 두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상절리까지 3분 남았다는 표지판을 만났다.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지만 이후로도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결국, 15분쯤 지나서야 주상절리와 신선대로 내려가는 계단에 다다랐다. 이름처럼 신선이 머물 만큼 아름답다는 그곳은, 기대 이상으로 장엄했다. 깊고 짙은 바다 위로 층층이 쌓인 주상절리는 거대한 조각품처럼 바다를 이불 삼아 드리워져 있었다. 오랜 세월의 숨결이 결을 따라 새겨져 있었고, 바람과 파도가 만들어 내는 소리는 그 위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거칠면서도 묵직한 파도 소리와 주상절리의 위엄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자연은 말 없는 언어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일깨우곤 한다. 발길을 돌리는 순간까지도 그 장면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파도처럼 일렁였다.
‘원조’라는 빨간색 간판이 유난히 눈에 띄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식당 안에도 테이블이며 의자, 주인의 복장까지 온통 붉은색이었다. 모자도, 옷도, 앞치마도 하나같이 빨갛게 빛나 그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한적한 평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처음 맛보는 서대회무침은 기대 이상이었다. 매콤새콤한 양념이 신선한 서대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바다의 향이 퍼졌다. 그때 넉살 좋은 남편이 음식을 내온 주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묻지도 않은 남편과 아들 자랑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 엄마도 우리를 저렇게 자랑스러워했을까. 어디선가 밝은 얼굴로 나를, 우리 형제들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을까. 아니 정말 자랑할 만한 자식이었을까. 그 생각이 스치자,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낯선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남편은 택시 안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언제나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런 그의 모습은 소극적이고 수줍음 많은 나에게는 늘 부럽고 신기한 풍경이었다. 그날 낯선 섬마을에서 오간 이야기들도, 그의 손을 거치자 낯설지 않았다. 말은 그가 건넸지만, 그 따뜻한 온기는 내게도 다가와 머물렀다.
정성껏 버무려 낸 서대회무침은 입맛을 사로잡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마음을 채운 것은 낭도의 푸근한 정과 정다운 이야기였다. 음식의 맛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사람의 온기와 마음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좋은 음식은 입안에, 좋은 사람은 마음에 남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낭도의 소박한 웃음과 따스한 손길은, 잊고 있던 내 마음의 온도를 다시 덥혀 주었다.
여행은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데우는 일이라는 것을, 그날 낭도에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