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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예지 and Yeji Son Aug 30. 2024

모든 미루기는 두려움이다.

허접한 완벽주의자가 인생을 사랑하는 법

모든 미루기가 두려움이라는 말이 낚시성 발언처럼 들리겠지만, 미루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미루기는 두려움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바빠서 지금 하지 못하고 다른 시간대로 옮기는 것은 미루기가 아니라 사실은 '시간 관리'이다. 다른 결로, 어떤 일이 중요하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은 '에너지 관리'이다. 하지만 미루기는 중요한 일 그리고 급한 일을 해야 할 때 하지 않는 상태이다.


심리학자인 나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다. 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수한 훈련 끝에 얻어낸 나의 스킬이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 솔직한 감정과 마주하다 보면, 나에게 필요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또 실천으로 옮기게 되는 경험을 나는 무수히 해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자주 미룬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원인도 나의 미루기를 오늘 경험했기 때문이다. 미국 심리학 트레이닝 과정인 레지던시를 마치는 중인 나는 많은 환자 종료 노트를 써야 한다. 나는 이걸 무조건 써야 함을 알면서도 자꾸만 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저녁에 해야지, 저녁에는 그다음 날 해야지 하면서 미루고 또 미뤘다. 물론 주말 동안 감기도 걸려서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인턴십 종료 3일 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된 시점에 나는 릴스를 봐도 집중이 안 되고 유튜브를 봐도 즐겁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가 즐겁지 않은 이유가 불안하기 때문이고, 불안한 이유는 내가 할 일을 마치지 못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이 나에게 온 이상, 난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게 되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오래되고 무거운 메디컬 레코드 소프트웨어인 "Titanium"을 켜면서, 내가 이걸 켤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어서 이걸 켜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노트를 쓰기 시작하자 내가 어떻게 환자들을 대해왔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들여다보는 게 무서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내 모든 노력과 열정들이 이 노트를 얼마나 잘 썼는지에 따라 달려있다는 '생각'을 내가 하고, 그에 따른 두려운 감정들이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두려운 감정을 내가 어쩌면 생각보다 잘 못한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또 내가 존경하는 슈퍼바이저가 눈치챌 수도 있다는 '임포스터 신드롬'(imposter syndrome). 즉, 내가 내 레지던시를 마칠 만한 실력이 안 된다는 게 속된 말로 '뽀록'이 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항상 내 환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두려움은 직면하는 순간 많은 부분들이 햇빛 아래의 눈처럼 녹아 사라져버린다. 내 두려움 역시 그랬다. 노트를 쓰다 보니 내가 환자들과 해왔던 일들이 좀 더 또렷하게 보이고, 또 끝까지 치료를 마치지 못한 환자들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통찰력도 조금 더 생겼다. 무엇보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나에게서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두려움이란 이런 것이다.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루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자신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두려움을 걸어서 햇볕으로 나오게 하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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