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나의 첫번째 영웅

영웅의 낡아빠진 신발

by 해온


작은 나무 책상들이 빼곡히 들어찬 국민학교 교실. 칠판 앞에는 큼직한 나무 교탁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분필 가루가 희미하게 떠다니는 칠판 아래로 하얀 종이 한 장이 조용히 돌려졌다.


“존경하는 사람을 쓰세요.”


그녀는 익숙한 질문 앞에서 항상 주저 없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이름을 또박또박 정성스레 써내려갔다.

나의 아버지.


지도가 없던 시절 그녀의 눈에 담은 아버지는 어디든 잘 찾아갔고, 무슨 일이든 척척 해결했다.

가족 여행의 길잡이였고, 낡은 텐트 안에선 이야기꾼이었다. 빗소리가 텐트 지붕을 두드리던 밤,

공포 이야기에 숨을 죽이던 그녀는 누구보다 믿음직한 아버지의 곁에 꼭 붙어 있었다.

그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안심이 되던 사람, 어린 그녀에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바다가 무서웠던 어느 여름날, 검정 튜브 하나에 매달려 흔들리던 작은 몸은 아버지의 손을 더 꼭 붙들었다.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건 몸집보다 큰 튜브도 아니고 수영도 아닌, 아버지의 손이었다. 바다가 무서운 그녀가 깊은곳까지 갈 수 있다면 그건 단지 아버지가 가기 때문이였다.


영어도, 일본어도 혼자 책을 펴고 따라 읽으며 익히던 사람.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모습은 어린 그녀의 눈엔 마치 커다란 산처럼 든든해 보였다. 그땐 몰랐다.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아버지가 가난을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는 걸. 성인이 되고 나서야, 기억의 틈새로 오래 묵은 진실들이 스며들었다.


네 식구가 겨우 몸을 누일 수 있었던 주인집 작은 방 한 칸.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하루 종일 추위에 떨던 방 안에서 부모님의 대화가 들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전기장판은 하나 사자.”


참고 또 참다가, 결국 꺼내 든 결심이었다. 다들 이불 속에서 하루 종일 참고 참다가 그 작은 방에 전기장판이 깔리던 날, 네 식구는 다닥다닥 붙어 누웠고 “따뜻하다”는 말에 웃음이 흘렀다.

엄마는 늘 잠들기 전 양동이에 물을 담아 방 한켠에 조심스레 두었다. 겨울 방 안이 너무 건조할까 봐,

아이들의 숨결이 텁텁할까 봐, 무심한 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어느 날, 주인집에 도둑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방은, 도둑도 거들떠보지 않아 간밤에 도둑이 든지도 몰랐다. 방 한켠, 구석에 놓인 다 낡아빠진 아버지의 신발 한 켤레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주인 눈치를 보느라 방 밖으로 나가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그 작은 방이 그녀의 전부였던 세계였다. 어린 그녀와 가족은 전국을 떠돌며 늘 ‘방 한 칸’이라는 세계에서만 살아왔다. 그 시절은 작고, 어두웠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다닥다닥 붙은 체온, 낡은 신발, 그리고 무서운 바다보다 더 믿음직했던 손.


어쩌면 그녀가 아버지를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전부를 가진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전부가 없어도 지키려 했던 것을 지켜낸 소중한 순간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5. 꿈의 파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