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척 어른의 장례가 있었다. 어릴 적 나를 많이 예뻐해 주던 분이었는데, 성인이 된 후론 거의 뵙지 못했다. 간간이 건강이 많이 쇠하셨다고, 기억도 흐려지셔서 결국 요양병원에 가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고가 전해져 왔다. 이상하게도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살아계셔도 멀리 있고 바빠서 뵙지 못한 것과, 돌아가셔서 이제 완전히 뵐 수 없는 건 분명 다른 일인데도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이제 돌아가셨지만, 어쩐지 그분을 잃은 건 훨씬 오래 전인 것 같았다. 기억이 흐려지셔서 이젠 나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들었던 그때부터였을까.
몇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랐다. 맏손주인 나를 그렇게도 아끼셨었는데, 치매로 기억이 사라지고, 돌아가시기까지의 10여 년 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살아있지만 함께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다면, 그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죽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스스로가 너무 냉정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 걸까. 죽음이라는 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삶의 '밖'이 아닌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안개 낀 날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내 발 앞 1미터쯤에 이미 다가와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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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가까운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꿈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꿈은 그냥 꿈이지.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런 거 아니야?”
친구는 정말로 죽는 꿈같은 건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가장 가까운 친구가 죽는다는 상상 자체를 애초에 하고 싶지 않은 건지, 그런 이야기를 애써 부정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좀 달랐어. 보통 꿈이랑은.”
내 태도가 가볍지 않다는 걸 느낀 친구는 조금 진지해졌다.
“…그런 거라면, '살 방법'을 찾으라는 걸지도 몰라.”
“살 방법?”
그 말이 괜히 가슴속에 와서 박혔다.
“그렇잖아? 그냥 죽을 거였으면, 굳이 꿈으로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죽을 준비나 해라’고 말하려는 거라면 그 꿈이라는 수단이 너무 낭비되는 것 같지 않아?”
그 말은 생각할수록 그럴듯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친구의 말에 기대서 일말의 희망을 가져보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그 말, '살 방법'이라는 말이 가슴속에 묵직하게 남았다. 정말 그게 살 방법을 찾으라는 계시였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꿈처럼 그렇게 일찍 죽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정말 찾고 싶었다. 삶에 대한 욕구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만약 그 꿈이 정말로, 살 방법을 찾으라는 경고였다면? 의욕이 샘솟으면서도 막막함이 밀려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답답했다. 방법도 모른 채 일상이 째깍째깍 흘러가는 게 무섭고, 아쉬웠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어디론가 잠시 떠나기로 결심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정말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