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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3)

by 삼오십

휴가를 냈다. 대충 짐을 챙겨 곧장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꿈에서 본 내 죽음이 당장은 아닐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차를 운전해 멀리 가는 건 어딘가 찜찜했다. 그나마 마음이 편한 교통수단은 기차였다. 사실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 않았다. 현장에 가서 마음 가는 대로 표를 끊을 생각이었다. 청량리역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서울역이나 용산역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기차역은 몇 년 만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차역 특유의 공기가 풍겼다. 예정된 열차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덕분일까. 바빠 보이는 듯하면서도 느긋하고, 느긋한 듯하면서도 바빠 보이는 분위기. 한산할 줄 알고 선택한 청량리역은 예전보다 훨씬 더 붐볐다. 너무 오래전 기억만 믿고 온 셈이었다. 청량리역에 오면 어디로 갈지 저절로 정해질 줄 알았던 어설픈 기대는 빗나갔다. 행선지와 시간표를 보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카페인이 당겼다. 얼음을 가득 담은 커피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뒤편에서 백발의 노인이 들어와 주문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차림새며 분위기만 봐도 전통차를 시킬 것 같았는데, 능숙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요"라고 말하는 게 왠지 모르게 신기했다. 그런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노인이 지나가며 말했다.


“왜요, 늙은이가 아메리카노 시키니까 놀랍습니까?”

“네? 하하, 아니요.”


너무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니기는.”


서울말에 살짝 얹힌 경상도 억양. 툭툭 던지는 말투였지만, 어딘가 위트가 있었다. 카페 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어디 갑니까?”


노인이 몸을 돌려 힐끗 나를 보며 물었다.


“저요? 아직 못 정했어요.”

“허허, 젊은 양반이 뭔 걱정이 있나 봅니다. 갈 곳도 정하지 않고 기차를 타러 오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커피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시간을 벌고 싶었다. 그에게 묻고 싶었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안동 가봤습니까? 안 가봤으면 한번 가 보세요.”

“안동이요? 아직...”

“가보세요. 좋을 겁니다. 왜 진작 안 가봤나 싶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면 어차피 마음 가는 대로 기차를 탈 계획이었다. 안동. 한번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럴까요?”

“좋은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여기도 한번 들러보시고. 가서 서울에 있는 허 선생이 알려줘서 왔다고 하세요.”


노인이 명함 같은 종이를 내밀었다. 하회탈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그걸 들여다보는 사이,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얼른 손을 맞잡았다.


“잘 다녀오시고, 좋은 구경 많이 하고 오세요. 내가 알려준 데 꼭 가보시고.”

“네, 감사합니다.”


노인은 모자를 챙겨 쓰고 일어설 채비를 했다. 나도 자리를 정리하고, 그와 동시에 일어났다. 노인은 손을 들어 인사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죽고 사는 것, 큰 차이 없습니다. 죽을 줄 알면, 살 줄도 알게 되는 거예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에 대해 뭔가 아는 건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처음 대화부터 그가 나를 알고 있던 것 같은 기분. 꿈 탓일까, 작은 일에도 예민해져 있는 나 때문일까.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여행을 다녀오면 이 모든 게 단순한 꿈이었다고, 애써 무시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큰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노인을 따라가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더 큰 일에 휘말릴 자신도 없고,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무심코 입에 문 빨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커피마저 다 떨어져 있었다. 갈증은 오히려 더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저, 마음이 답답했다.


열차 시간표를 보니, 안동행 열차는 거의 두 시간 간격으로 있었다. '이음'이라는 이름의 KTX 열차였다. 중간에 무궁화호 열차도 있었지만, 그렇게 느긋하게 갈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표를 구매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승차권에 적힌 '안동'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앞으로도 특별히 갈 일이 없었을 곳. 그런데 지금 나는, 그쪽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여행을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그런 의문과 두려움이 스쳤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이니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안동이라는 곳에서, 답은 아니더라도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아니어도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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