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빠르면서도 생각보다 편안했다. 창밖 풍경이 흐르는데, 살아온 시간들도 함께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기억 속 풍경과 닮은 장면들이 나타나면, 그 시절의 기억들이 투두둑 떠올랐다. 몸은 자랐고, 숫자로 세는 나이는 늘었지만, 내 안의 자아는 그 시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시간이 30년 넘게 흘러도, 그 기억은 방금 전 일처럼 선명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게 될지, 언제쯤 죽음이라는 것이 가까워질지 가늠도 되지 않지만, 그 순간이 온다면 나는 지금과 아주 다를까.
‘죽을 줄 알면, 살 줄도 알게 되는 거예요.’ 노인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다. 정말 무언가를 알고 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오래 살아온 사람이 습관처럼 툭 내뱉은 말이었을까. 확실한 건, 그 한 마디가 내 안에서 울림을 일으켰다. 도대체 죽을 줄 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죽음을 인정한다는 걸까. 그저 받아들이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노인이 건넨 종이를 꺼냈다. 하회탈이 그려진 종이. 그 아래, 주소 한 줄이 적혀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 보려다 멈췄다. 그냥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안동까지 가고 싶었다. 종이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기타 선율이 듣기 좋은 노래였다.
난 어떤 여행을 떠나왔나 언제 떠나왔는지도 몰라
잃어버려도 날 잊어버려도 날 계속 생각할까
부드러운 목소리와 노랫말이 조금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한 곡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언제부턴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 소리에 눈을 떴다.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의 짐을 챙기며 부산스러워졌다. 짐이 많지 않았던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몇 걸음 걸었다. 열차 안과는 확연히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과는 다른 공기였다. 어딘가 모르게 '맛있는 공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위장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아침도, 점심도 거른 상태였다. 검색을 통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안동 구시장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그곳을 구경하며 해결하기로 했다. 사실 안동 음식이라면 찜닭과 소주 정도밖에 아는 게 없었다. 무난하기도 하고, 마침 당기기도 해서 고민 없이 찜닭으로 메뉴를 정했다. 하지만 찜닭집이 생각보다 많았고, 검색상의 '맛집'들은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느낌이 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분위기, 적당한 사람들. 1인을 위한 메뉴는 없었고, 2~3인분을 시켜 충분히 먹다 남기기로 했다.
맛은 그야말로 적당했다. 안동에서 먹는 찜닭이 너무 맛있다면 서울에서 다시는 찜닭을 못 먹을 것 같고, 반대로 맛이 없으면 그 또한 낭패일 텐데, 적당히 맛있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소주를 마셔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술을 끊은 지도 오래되었다. 어차피 먹으러 온 여행도 아니니까, 그저 물을 마셨다. 배는 만족스럽게 채워졌다. 생각을 정리하러 온 김에, 괜찮은 곳에서 조금 걷고 싶었다. 식당에서 들리는 이야기들 사이로 '월영교'라는 이름이 자주 들렸다. 검색해 보니 나를 제외한 안동에 온 모든 사람이 이미 다녀간 곳 같았다. 그런 곳에서 혼자 걷는 것도 운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그들 사이에 끼기로 했다. 물론, 그들에게 내가 합류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용히 혼자, 속으로만 정한 결정이다. 여행지에서 비슷한 경로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혹 누군가 나를 월영교에서 마주친다고 해도, 내가 식당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장소로 왔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식당을 나와 택시를 탔다. 기사님은 과묵한 편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말이 잘 오가는 기사도 있고, 나는 그런 스타일을 딱히 꺼리진 않지만, 막상 대화가 없으니 살짝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가는 동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하늘에 반짝이는 물체가 하나 보였다. 지고 있는 해를 정면으로 받은 항공기 한 대가 온몸으로 햇빛을 반사하며, 이쪽을 향해 무언가 말을 걸 듯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