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거 당신 쓰랍니다.”
나는 엉겁결에 배우가 내민 탈을 받았다. 하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등줄기가 뻣뻣해졌다.
“… 뭐 해? 안 쓰고? 살고 싶으면 써.”
반말.
갑자기 나한테 반말을 한다고?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인가.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왜 겁도 없이 혼자 이곳에 들어온 걸까. 두려움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오만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머리가 하얘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극도의 긴장감에 옷소매가 떨리는 소리까지 느껴졌다.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눈앞의 모든 게 까맣게 지워졌다. 그리고 월영교에 서있는 내 모습, 복잡한 표정의 나와 일렁이는 물이 보였다. 속으로 뱉었던 내 목소리가 들렸다.
‘탈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손끝에 거칠고 마른 감촉이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짐작되는 탈의 굴곡진 모양. 마치 예고 없던 비바람 속, 길 잃은 벼랑 끝에서 손에 닿은 동굴의 입구 같았다. 귀에 느껴지는 심장소리가 점점, 외침 같이 느껴졌다.
나는 탈을 썼다.
“살아있네, 살아있었어! 이봐, 아무개가 살아 돌아왔다구!”
배우들이 나를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마치 죽었다고 믿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정말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을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탈을 쓴 순간부터 연극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내게 몇 번의 대사를 더 던졌다. 신기하게도 탈을 쓰니 어디선가 용기가 생겼다. 내가 대본에도 없는 무슨 말을 던져도 극은 어긋나지 않았다. 연극은 그대로 흘러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연극이었다. 내가 탈을 쓰고 다시 살아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전부, 계획된 장면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극이 진행될수록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연극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법이 있다면, '연출'이었다. 그는 작가이자, 규칙이자, 질서였다. 무대 위에는 배우가 없었다. 오직 배역만이 존재했다. 살고, 죽고, 슬프고, 웃고, 흥하고, 망하는 그 모든 일들은'배역'으로만 허용되는 일이었다. 탈을 벗고 연출에게 따졌던 배우와, 지금 탈을 쓴 나는 하나였다. 모든 이가 탈을 쓴 채, 살아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조차도, 살아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