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걷는 독서> 서문을 읽고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내 영혼의 길을 잃지 않도록.
박노해 <걷는 독서> 중에서
돌아보니 그랬다. 나는 늘 길 찾는 사람이었다. 길을 걷는 사람이었고 '걷는 독서'를 하는 이였다.
어느 날 마을 언덕길이나 바닷가 방죽에서 풀 뜯는 소의 고삐를 쥐고 책을 읽었고, 학교가 끝나면 진달래꽃 조팝꽃 산수국꽃 핀 산길을 걸으며 책을 읽었다. 벚꽃잎이 하르르 하르르 날리는 길을 걸으며, 푸르게 일렁이는 보리밭 사이를 걸으며, 가을바람에 물든 잎이 지는 길을 걸으며, 붉은 동백꽃이 떨어진 흰 눈을 걸으며 '걷는 독서'를 했다. (중략)
'걷는 독서'를 할 때면 나는 두 세상 사이의 유랑자로 또 다른 세계를 걸어가고 있었다. (중략)
돌아보니 그랬다. 가난과 노동과 고난으로 점철된 내 인생길에서 그래도 나를 키우고 나를 지키고 나를 밀어 올린 것은 '걷는 독서'였다. 어쩌면 모든 것을 빼앗긴 내 인생에서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한 나만의 자유였고 나만의 향연이었다.
박노해 <걷는 독서> 서문 중에서
진정한 독서란 지식을 축적하는 '자기 강화'의 독서가 아닌 진리의 불길에 나를 살라내는 '자기 소멸'의 독서다. 책을 '읽었다'와 책을 '읽어버렸다'의 엄청난 차이를 알 것이다. 읽어버리는 순간, 어떤 숨결이 일었고, 어떤 불꽃이 피었고, 저 영원의 빛에 감광되어 버렸고 그로부터 내 안의 무언가 결정적으로 살라지고 비워지고 만 것이다.
그 소멸의 자리만큼이 진정한 나를 마주하고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하나의 성소인 것이다.
나는 보았다. 아니, 보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만났다. 아니, 만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읽었다. 아니,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그 진리 앞에 응답해야 한다. 책으로의 도피나 마취가 아닌 온 삶으로 읽고, 읽어버린 것을 살아내야만 한다. 독서의 완성은 삶이기에.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한 권의 책을 써나가는 사람이다. 삶이라는 단 한 권의 책을.
박노해 <걷는 독서>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