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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Jun 10. 2024

예술가와 철학자

공공 철학자 김 태창 선생님이 페이스 북에서 매일 새벽마다 올려주시는 시들이 있다. "새벽 눈뜨면서 생명감각에 공진파동으로 울려 오는 *** 시인의  시 한수"에 여러 시인들의 시를 담고, 그에 대해 선생님이 간단한 느낌을 적은 것들이다. 90이 넘은 선생님이 이런 일을 매일 같이 하는 마음은 무언가 베풀려는 보살심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시를 읽기 힘든 세상에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시나 소설 읽기를 좋아 하는 편인데,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업과 철학자의 작업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모두가 생각의 표현일텐데 예술가들은 왜 이렇게 표현하고 철학자들은 저렇게 표현할까,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이들 간에 경계를 넘어서 소통하는 방법은 없을까? 등등이 꼬리를 문다. 과연 이들 간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많이 배우기도 한다. 



시인들이나 소설가들은 남의 생각을 끌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자 애를 쓴다. 물론 다른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영감을 얻고 상상력의 자극을 받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표현할 때는 오로지 자신의 생각 속에 완전히 용해된 상태로 표현한다.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표현 하는 수단으로서 언어에 절대적으로 의존을 하기 때문에 모국어에 대한 이해와 사용이 대단하다. 특히 시인들은 즉물적이고 구체적인 한국어의 특성 만으로도 좋은 시를 쓰기도 한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가 특히 그렇다. 무엇보다시나 소설 작품 속에는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세계, 그리고 일상이 잘 드러나 있다. 황석영이나 조정래, 박경리 등의 대하 소설을 읽다 보면 과거 한국인들의 삶과 시대와 생각들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쉽게 공감할 수가 있다. 



반면 동서 고금을 통해 한국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타자의 생각을 수입해서 해설하고 해석하는 일을 많이 한다. 게다가 이들의 언어 역시 타자로부터 빌려온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한결같이 이들은 언어의 국적, 모국어의 특별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 철학의 경우는 거의 번역 수준의 개념어들이 난무하고, 동양 철학의 경우는 한자와 한문을 모르고서는 읽기 조차 힘든 글들도 많다. 오래 전 불교 유식학에 관한 논문 발표에 참석했을 때 유식학의 오랜 전통에서 사용하던 알 수 없는 개념들이 너무 많아서 비판적인 지적을 한 적이 있다. 도대체 이렇게 글을 쓰면 다른 전공자들이 어떻게 유식학의 보편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더니 자신들은 그게 훨씬 익숙하며, 풀어서 쓰면 오히려 비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영향 하에서 크다 보니 한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아 왔다. 하지만 이런 한자어 개념이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의 원어와 같을 수가 없지 않은가? 또한 시인이나 소설가와 달리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타자의 시대와 역사 그리고 생각에만 매이다 보니 자신들의 시대와 세계 그리고 역사 등이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철학은 사유 속에 포착된 시대"라는 헤겔의 표현을 입에 달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생각하는 시대와 세계 그리고 역사는 서양의 근대일 뿐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과 영국의 산업 혁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이다. 



지난 주 "K-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심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발표자 중의 한 사람이 "왜 한국의 철학자들은 자기 생각을 못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오늘 날 한국의 철학자 들은 단군 이래 엄청난 논문을 쏟아 내면서도 여전히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모두가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에서 예술가들과 철학의 차이가 이렇게 큰 까닭이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철학자들은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역사를 개념화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철학이 끊임없이 '우리 철학'이나 'K-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을 보면 한국 철학은 아직 사춘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생의 발전에서 사춘기 시절에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의 철학자들이 좀 더 치열한 반성을 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고, 이런 물음을 통해 언젠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자신들의 철학을 할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나는 "K-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심포에서 발표한 젊은 학자들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보았다. 질문하고 풀어가는 방식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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