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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좌표를 찍는 나만의 언어지도>

마음의 사전을 펼치다 -오직 나만 아는 감정의 기원

by 숨결biroso나

“말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을 알 수 없을 것이다.”
- 산도르 마라이 (Sándor Márai)




1. 감정의 언어는 왜 항상 부족한가: 창조적 명명 (命名)의 시작


우리는 불안, 슬픔, 사랑,분노라는 공용어를 사용 하지만, 그 단어들에 내포하는 의미가 사람마다 제각각 다릅 니다. 2화에서 '불안'이 단어 하나로 설명되지 않았고, 3화에서 '괜찮아'가 오역을 낳았 으며, 4화에서 '침묵'이 오해의 언어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용어는 섬세한 감정의 모호성을 담아내지 못하며, 우리의 감정 원본은 공용어의 해석 범위를 늘 초과합니다.

우리가 쓰는 '슬픔'이라는 단어 속에는 친구를 잃은 슬픔, 지나간 청춘에 대한 애잔함, 노력의 좌절에서 오는 무력감 등 수많은 미세한 감정들이 뭉쳐 있습 니다. 이 감정의 모호성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의 사전을 빌려 쓸 것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감정 원본을 설명할 수 있는 나만의 사전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산도르 마라이가 말했듯, 감정에 말을 부여하는 행위야말로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주도권을 확보하는 최초의 창조 입니다.



2. 오직 나만 아는 단어의 기원: 내 안의 심리적 화석 발굴

사람의 감정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현재의 '불안'이 어쩌면 어린 시절 부모님의 예상치 못한 싸움에서 느꼈던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의 연구는 우리가 경험하는 순간의 감정보다 기억된 감정에 더 큰 가중치를 두어 삶을 판단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화석을 발굴하지 못한 감정은 늘 과거의 그림자를 입고 현재의 판단을 흔들게 됩니다. 이름 없이 억압된 과거의 감정은 현재를 지배하는 ‘심리적 화석’이 되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사전을 펼친다는 것은 바로 이 화석들을 발굴하는 작업입니다. 현재의 감정을 단순한 '분노' 로 번역하기 전에 그 분노가 촉발된 과거의 경험 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고통에 붙일 제대로 된 이름이 없다면, 고통은 이름 을 찾지 못한 채 우리를 난폭 하게 휘두르게 될 것입니다.

화석을 발굴해 냄으로써 '나는 단순히 화난 것이 아니라, 무시당할 때마다 느끼는 10살 때의 무력 감을 다시 느끼고 있구나' 라는 고유의 번역 문장을 얻게 됩니다. 오직 나만 아는 이 단어의 기원을 파악할 때, 비로소 감정은 공용어의 모호성을 벗어 수 있습니다.





3. 마음의 사전을 쓰는 법: 미세 감정의 스펙트럼 확장과 명명(命名)의 힘

감정의 화석을 발굴했다면, 이제 그 화석에 맞는 고유한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화남' 대신 '정당함을 박탈당한 억울함'이나 '기대했던 것에 대한 실망감' ,'실망감', '경멸감' 등으로 쪼개어 정의합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치 흐릿한 지도에 정확한 좌표를 찍는 일과 같습니다.

문학은 이런 언어 확장의 귀감입니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 첫 구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 에는 ”에 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이별의 슬픔이 아닙니다. 체념, 자존 , 사랑의 이중성 등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이처럼 시에 담긴 표현은 단어 하나로는 잡히지 않는 복합 감정을 은유와 이미지 라는 새로운 언어로 확장하는 좋은 예입니다.

문학과 철학은 오래전부터 감정의 사전을 넓혀 왔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직설적인 “사랑한다”는 말 대신 “오늘 밤 달이 참 아름답네요”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 은유 한 줄이 침묵 속에 숨겨진 벅찬 감정을 드러내는 새로운 단어가 되었습니다. 마르 타 누스바움은 『감정의 지성』에서 감정을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세계와의 가치판단적이고 해석적인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부끄러움, 분노, 희망 같은 감정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창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어의 ‘정(情)’, 포르투갈어 ‘사우다데(saudade)’, 독일어 ‘멜랑콜리(Melancholie)’는 모두 단일 언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복합 감정 단어입니다. 가령 ‘정(情)’은 사랑, 우정, 연민, 책임감이 뒤섞인 한국적 관계의 감정 복합체를 뜻합니다. 언어 공동 체마다 감정의 사전은 달라지고, 단어를 배우는 순간 감정의 이해 폭도 넓어집니다.





4. 감정을 객관화하는 번역가로서의 나


번역가로서의 나는 감정 원문에 고유한 주석을 다는 심층적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일반 명사가 아닌 고유 명사들의 연속으로 비로소 완성됩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명명 행위는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번역가로 자리 매김하는 철학적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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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조용한 위로를 믿습니다. 오늘도 삶을 살아내는 분들에게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문장을 씁니다. 깊은 숨결로 마음을 건네는 사람, 에세이스트 'biroso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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