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말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우리의 마음엔 아랑곳없이
너무 빨리 스러져간다.
가끔은 계절이 마음의 온도를 앞선다.
마음은 여전히 가을에 머물러 있는데,
세상은 어쩐지 겨울의 호흡을 내쉰다.
그럴 때면
뒤늦게 계절을 따라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서늘한 공기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사이, 우리 마음도 조금 자란다.
첫 바람이 불 때,
나는 온도로 계절을 맞이한다.
봄은 살에 스미는 꽃가루의 온도,
여름은 뜨거운 숨결이 이마를 감싸는 온도,
가을은 저녁빛 속에서 식어가는 손끝의 온도,
겨울은 숨소리마저 차갑게 식히는 온도다.
여름의 열기는 먼 여행길에서 마셨던
시원한 물 한 모금의 무게로 남아 있고,
가을의 서늘함은 유리창 너머에서
마음을 비추던 그날 오후로 남는다.
봄의 열정도, 여름의 뜨거움도
결국은 가을 앞에서 감사로 익어가듯,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성숙해진다.
가을은 늘 그렇게 겸허해지는 마음으로
하루를 천천히 숨 고르게 했다.
사진 속 색깔은 바뀔 수 있어도,
살결이 기억한 온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 온도가 마음과 닿을 때,
묵혀 있던 감정이 제자리를 찾는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렸었다.
가을비라기엔 조금 길었고,
겨울비라 하기엔 아직 따스했다.
빗소리는 부드럽게 이어졌지만,
어느새 아침 바람이 달라져 있었다.
찬바람이 골목을 쓸고 지나가며
가을이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듯했다.
가을 없이 겨울이 오는 듯한 공기 속에서
오늘도 나는 온도로 계절을 맞이했다.
창가의 나무 잎은 아직 새초롬한데,
찬바람은 이미 겨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서 있었다.
비가 멈춘 자리에서,
가을이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듯한 공기 속에서.
'이번 가을도 이렇게나 짧게 스치듯 지나가려나
나는 아직, 이 계절을 시작도 안 했는데...'
세상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다음 계절로 기울고 있었나 보다.
더 늦기 전에
이 계절의 숨결을 내 안에 들였다.
가을 냄새가 다 사라지기 전에,
이 계절의 한가운데 서서
나를 오래 기억해 두고 싶었다.
오늘의 찬바람 속에서
나는 다만,
이 계절의 여백을 오래 느끼고 싶었다.
아직 남은 온기를 다 잃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내 안의 가을을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변화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은 이렇게
조용히 사라지는 감각이
삶을 더 깊게 만들어 주니까.
오늘은 괜히 창가에 오래 머물고 싶어졌다.
식어가는 햇빛을 잡아보며
마지막 남은 가을의 여운을 천천히 들이켰다.
이 계절의 숨이 다 흩어지기 전에,
그 온도를 내 마음에 한 번 더 새기고 싶었다.
식어가는 빛 속에서도
마음의 온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달라진 기온이 알려주는 건
계절만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멀리 걸어왔는지,
그리고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도 함께 알려준다.
“너는 지금 어디쯤 서 있니?”
가을이 묻는 그 물음 앞에서
잠시 멈추어 나를 돌아본다.
떠나가는 계절이 남기는 건
허전함이 아니라,
그 허전함을 감싸 안을 힘인 것 같다.
겨울이 오기 전,
이 짧은 가을의 여운에 마음을 묻어둔다.
계절이 바뀌는 건 달력의 날짜가 아니라
바람의 결이 달라질 때다.
며칠 전까진 비가, 오늘은 바람이,
내일은 또 다른 냄새가
나에게 말을 건넬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말들 사이에서 나의 숨을 고른다.
놓쳐버린 찰나의 순간들을
나의 숨결로 대신 채워 넣으며.
'여러분의 가을은 지금 어디쯤인가요?'
며칠째 이어진 비와 찬바람 속에서도,
마음 한켠엔 아직 가을의 여백이 남아 있나요?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계절이 아쉽다면,
잠시 멈춰 창밖을 바라보세요.
아직은 남아 있는 마음의 풍경이 있을테니까요.
한 계절이 저물 때마다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진다.
식어가는 빛 속에서도
온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 서늘한 바람 속에도
누군가의 따뜻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
by 숨결로 쓰는 biroso나.
<작가의 말>
왜 아름다운 순간들은,
항상 빨리 스러지는 것일까요?
가을이 지나가는 일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벌써부터 아련해지는 마음입니다.
준비할 틈도 없이 바람이 바뀌고,
그 바람이 마음을 더 쓸쓸하게 하니까요.
그래서인지 사는 내내
계절이 바뀌는 순간마다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 듯합니다,
놓아주는 일, 그리고 다시 품는 일.
그게 어쩌면 ...,‘살아간다’는 말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