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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보다 남편 >

12화 남편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by 숨결biroso나

그날 아침,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커피를 내렸다.
코엑스 입시 박람회가 있는 날이었다.
딸을 위해 미리 신청해 두었고,
다녀오는 게 ‘당연한 일’이라 믿었던 날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는 자꾸만 주저하고 있었다.
머리가 띵하고, 입 안엔 혓바늘이 가득했고, 귀에서는 맥박 소리 같은 울림이 났다.
몸이 아픈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마음이 더 지쳐 있었다.

딸도 덩달아 앓고 있던 눈이 더 아프다며 울었고,
남편은 친구의 죽음에 몇 날 며칠 말을 잃은 채 있었다.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아팠고, 그중에서도 가장 나서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나였던 것 같았다.


엄마라는 이유로 괜찮은 척을 오래 해왔었다.
몸살이 나도, 마음이 무너져도 가장 나중에 아픈 사람이 엄마의 자리였다.

엄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엄마의 그 시절을 고스란히 밟아가고 있는 심정이랄까.


코엑스에 도착해서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일부러 마감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사람들이 북적였고, 정보가 넘쳐났고, 열심히 걷고 뛰는 부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나는 ‘남편의 얼굴’을 계속 떠올렸다.

딸보다 남편의 안색이 먼저 보였다.
말은 툭 내뱉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었다.
그 어깨가 요즘 따라 자꾸 눈에 밟혔다.


올려다보았던 그 어깨가 자꾸만 초라해 보인다.
“이제는 우리가 같은 마음의 나이를 걷고 있는 걸까?”

자식을 함께 키우며 누군가는 끌어주고, 누군가는 밀어주던 시간들이 지금은 어깨를 나란히 둔 채
서로의 주름을 마주 보는 순간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예전에 엄마가 아빠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 눈빛이 자꾸 생각난다.
자식보다 더 먼저 챙기던 아빠의 밥상,
말없이 챙긴 물 한잔.
한사코 아빠 편을 들어주던 그날들.

그 시절의 엄마는
자식을 돌보면서도
한 남자의 슬픔을 함께 안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세월을 지나 이제야 그 마음을 조금 알아가는 것 같다.

그날, 딸은 죽마고우를 잃은 아빠의 눈물을 보며
아마도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아빠를 보며,
비로소 인생의 무게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지도.

그날 나는,
딸의 진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곁에 있는 사람의 ‘지금’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지켜야 할 사람의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면,
사는 일의 마음 씀씀이는 때때로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아이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 옆의 사람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끔은 딸이기도 하고 남편이기도 하며,
때로는 마음속에 여전한 엄마일 때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

그 사랑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시간 안에서
결국 가장 오래 나를 안아줄 사람은 나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또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자식을 돌보는 일보다
곁에 있는 어른 하나를 다정히 바라보는 게
더 큰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곁에 있는 슬픔을 바라보는 일이고,
나의 온기를 나누는 일이다.

사랑은, 이유 없이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다.




"자식을 먼저 걱정하던 마음이

어느 순간, 남편의 어깨를 먼저 바라보고 있었다."


by 숨결로 쓴다 ⓒ biroso나.



《엄마의 숨》브런치북은 매주 월요일

당신의 마음에도 다정히 말을 겁니다.




*<숨결로 쓰는 biroso나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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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 《엄마의 숨》

2) 월 《별을 지우는 아이》

3) 화/ 토 《78개의 마음》

4) 수/ 금 《다시, 삶에게 말을 건넨다》

5) 수/ 토 《마음에도, 쉼표를 찍는다》

6) 목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7) 금 《아무 것도 아닌 오늘은 없다》

8) 일 《말없는 안부》

9) 목/ 일 《가만히 피어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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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숨 #부부의시간 #가족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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