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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리스 Jul 15. 2022

손에 물 묻히지 않겠다는 말은 못 들어봤습니다

한결같음이 주는 믿음에 대하여

남자가 손에 반지와 꽃다발을 든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나랑 함께하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 줄게. 나랑 결혼해 줄래?” 여자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에게 안긴다.


결혼 전 어느 날, 남자친구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위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나도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웃으면서 “평생 같이 사는데 어떻게 손에 물 한 방울을 안 묻히게 할 수 있겠어,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너무도 솔직한 그 대답에, 결혼 전에는 다들 으레 하늘의 별과 달도 다 따줄 듯이 빈말을 하던데 그것도 못하나 싶어 조금 샐쭉해졌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라는 말을 못 들어본 채 결혼했다. 빈말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한 것이다.


내가 20대이던 시절 가장 핫했던 부부 중 하나는 션-정혜영 부부가 아니었나 싶다. 아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아내바라기에, 시시 때때 스윗한 이벤트로 아내에게 감동을 주는 션은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남편상이었다. 전통의 강호 최수종-하희라 부부를 잇는 새로운 다크호스가 등장한 것이다. 나라고 다를 바 없었어서, 나도 미래의 내 남편이 션처럼 자주 손편지를 써주고, 깜짝 놀랄 이벤트도 가끔 해주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넌지시 남자친구에게 그런 의사를 비추면 남자친구는 단칼에 “나는 그런 것은 간지러워서 잘 못해”라고 끊어버렸다. 어차피 몇 번 하다 말 것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또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나에게 잘해줄 것이라는 거였다. 어찌나 논리적으로 맞는 말만 하는지, 냉정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남자친구의 이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던 것은, 실제로 남자친구가 자신의 방식으로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먼저 챙겨주고, 내가 하고 싶다고 흘려 말한 것들을 귀담아 들었다가 나중에 함께 해 주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빈말이나 자신을 꾸며 연기하는 행동은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고 시간이 지나도 처음의 그 모습이 변치 않는 사람이었다.


남자친구와 사귄 지 1년이 채 안되었을 무렵, 남자친구와 나는 둘 다 회사를 퇴사했다. 남자친구는 자기가 몸담은 업계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며, 퇴사 후 이직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회사가 잘 맞지 않다고 여러 번 말했던 나에게 같이 퇴사 후 이직을 준비하자고 권유했던 것이다. 그 당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내가 원하는 부서에 배정을 받지 못하여 불평불만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최종 합격을 한 4곳의 대기업 중 하나를 골라 입사했었던 터에, 퇴사 후에도 충분히 다른 회사에 쉽게 이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쉽게 회사를 뛰쳐나온 나는 처음에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자유시간을 즐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생각과 달리 이직이 쉽지 않자 점점 초조해졌다. 게다가 같이 퇴사를 했던 남자친구가 빠른 시간 내에 원하는 회사에 턱 하니 합격을 해버리자 나의 스트레스는 절정에 달하였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는 자존심상 내가 힘들어하는 티를 내기가 싫었기 때문에, 나의 스트레스의 화살은 다 남자친구를 향했다. 내가 너보다 못한 게 없는데 왜 나는 취직이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네 말 듣지 말고 예전 회사를 다닐 걸 그랬다, 너는 내 바닥을 다 보았으니 취직만 하면 헤어져야겠다 등등 온갖 모진 말을 남자친구에게 했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상처되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왜 그랬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그동안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터라 처음 맛보는 실패를 나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상대에게 모든 짐을 다 쏟아내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나의 이 모든 말을 다 묵묵히 들어주었고, 나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용기를 주었다.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한 순간이 있다. 한 회사의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어느 날, 전화로 또 속상하다며 엉엉 울며 하소연하는 나의 말을 가만히 듣던 남자친구는 조용히 한 마디를 했었다. “많이 힘들면 이직 준비 그만하고 나랑 결혼하자”라고 말이다. 빈말을 안 하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 말에 나는 더 감동받았고, 나의 최악을 보고도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내가 원하는 직종으로 이직에 성공했고, 나는 빈말은 못하지만 내 최악의 순간에도 한결같이 나를 지지해주었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만 12년째인 지금도 남편은 한결같다. 연애할 때 절대 안 해주던 간지러운 것들은 지금도 절대 안 해준다. 대신 그때 해주던 것들은 지금도 대부분 다 해주는 것 같다. 회사에서 맛있는 스테이크 집에 가 회식을 했다면서, 나와 아이를 그 스테이크 집에 데려간다. 배 타는 것을 질색하지만, 내가 꼭 아이와 함께 카약을 타보고 싶다고 했더니 못 이기는 척 카약을 같이 타러 간다. 며칠 전 지나가는 말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파인애플인 것 같다고 했더니, 그것을 기억했다가 퇴근길에 파인애플을 사다가 냉장고에 툭 넣어두기도 한다. 남들처럼 뭐든지 다 해주겠다는 빈말은 할 줄 모르지만, 늘 한결같아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믿음을 주는 것이 나의 남편이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상대의 입맛에 맞게 나를 포장하기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진정으로 건강한 관계임을 깨닫는다. 나는 늘 한결같은 사람인가, 나는 남에게 나를 포장하지 않고 나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겠다. 얇은 포장지 속에 숨겨진 모습은 언젠가 들키기 마련일 테니, 그 본모습을 숨기는데 급급하지 말고 그냥 포장지 없는 나를 당당히 드러내고 그 모습을 한결같이 유지하고자 노력해야겠다.



* Image by Rewrite27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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