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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리스 Jul 06. 2022

갑자기 식탁 위가 풀밭이 된 까닭은

건강염려증을 건강하게 타파해보기

나는 건강염려증이 있다. 전문가에게 정확히 진단을 받은 적은 없지만, 나 자신과 내 최측근인 남편이 인정한 중증 환자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염려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약간의 정리 강박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결벽증이 있다거나 쓸고 닦아 반짝반짝한 공간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류는 아니었다. 그저 책장의 책이 크기에 맞춰 가지런히 꽂혀 있어야 하고, 서랍 속의 물건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정도의 정리벽이었다. 스스로를 조금 피곤하게 만들긴 했지만 주변 어른들에게는 자기 물건을 잘 정리하는 착한 어린이라고 칭찬받기 좋은, 딱 그 수준이었다.


어느 순간, 내 안 어디엔가 숨어있었던 건강염려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나의 건강염려증의 진행순서는 이렇다. 처음에는 몸 여기저기의 작은 변화들에 민감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배의 한 부분이 조금 결린 것 같다거나, 귀가 좀 멍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거나, 발에 있는 점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다던가.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걱정의 수준이 갑자기 중증 환자의 그것으로 뛰어넘어 버린다는 거다. 거슬리기 시작한 부분의 증상을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그중 가장 안 좋은 사례를 보며 두려움에 떨다가, 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를 다 해보고 진료를 받는다. 의사의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인터넷 검색을 멈출 수 없고, 갑자기 식욕이 떨어지고 모든 일에 의욕을 잃는다. 웃긴 건,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별 게 아니라고 느껴지며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이 과정이 주기적으로 증상만 바뀌며 반복된다.


7~8년 전 즈음인가, 어느 날 회사에 다녀왔는데 양 쪽 엄지발톱에 검은 반점 같은 것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손발톱 아래에 생기는 검은 반점은 악성종양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패닉.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양 쪽 발톱에 갑자기, 그것도 대칭으로 문제가 생겼다면 심각한 병변일 가능성이 낮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최악의 경우에만 꽂혀있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다음 날 바로 동네 피부과를 찾았는데, 의사가 그 반점이 멍일 수도 있고 만에 하나 아닐 수도 있으니 일단 기다려보자는 애매모호한 진단을 내려 내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다. 이 대목에서 대부분은 그냥 기다려보겠지만, 나는 달랐다. 바로 진료의뢰서를 받아 손발톱 전문의가 있는 삼성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전문의는 나를 만나자마자 확대경으로 발톱을 한 번씩 들여다보더니 30초도 안되어 “이건 멍든 거예요”라고 진단을 내렸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수선스럽게 느껴져 어디 가서 말하기도 부끄러운 에피소드다.




처음에는 내가 건강염려증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집 앞에만 나가면 쉽게 각 분야 전문의들을 만날 수 있는 한국에서는 인터넷 검색을 하며 걱정을 하는 시간 자체가 짧았기 때문에, 나의 건강염려증이 그다지 일상에 악영향을 끼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잠시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남편과 내가 우스갯소리로 정의한 이 나라의 의료 체계는 ‘죽지는 않게 해 드릴게’로, 단순한 의심증상에 대해서는 검사를 하고 진단을 받기가 매우 번거롭고 부담스럽다.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의사를 만나기가 어렵다 보니 혼자 걱정하고 상상하는 시간이 길어져 일상이 엉망이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곳의 병원은 크게 정부병원과 사립병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부병원에서는 ID만 있으면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매우 저렴한 비용으로 진료, 처방, 수술까지 가능하다. 응급 맹장수술을 한 지인의 아이가 수술비와 열흘 가량의 입원비를 교통카드를 찍어 내고 왔다고 할 정도이니, 의료보험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는 한국에 비해서도 엄청 저렴한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저렴하다 보니 의사를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웬만한 중병이 아니고서야 1~2년 뒤로 진료예약이 잡히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이다. 반면 사립병원에서는 원하는 진료과목의 의사를, 깔끔하고 수준 높은 서비스를 받으며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아, 물론 돈을 많이 낸다면 말이다.


이 상황에서 반복되는 크고 작은 증상들은 나를 매우 힘들게 했다. 의사를 만나려면 여러 번 병원에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많이 들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참고만 있기에는 내 정신이 너무 피폐해졌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몇 년을 홍콩에 머무르면서도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잘 지낸다는데, 자꾸 골골거리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아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나를 잘 아는 남편은 내가 그럴 때마다 짜증 한 번 없이 같이 걱정을 해주며, 비용은 상관없으니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라고 해주었다. 사실 좀 부담스럽기도 했을 텐데, 내색 한 번 없이 병원에 보내준 착한 남편. 감사합니다.




얼마 전 배가 아파 한화 약 390만 원을 내고 내시경을 받았다. 물론 진단 결과는 약간의 염증이 있을 뿐이니 크게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나온 진료비 영수증을 남편에게 건네주며, “나 아무래도 건강염려증인가 봐, 검사받아보니 별 거 아니었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는데, 남편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남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는 듯 이렇게 되묻는 것이 아닌가. “아니, 지금까지 본인이 건강염려증이란 걸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라고. 남편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내가 중증의 건강염려증 환자라고 늘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갑자기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몸의 작은 변화에 너무나 민감했던 나, 그리고 한 증상에 꽂히면 인터넷을 검색하며 어떤 질병 일지 집착하던 나, 의사를 만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했던 나, 의사의 진단을 받으면 거짓말 같이 걱정이 사라졌던 나. 그렇다. 나는 건강염려증 환자였던 것이다.


남편은 이때다 싶었는지 몇 마디를 덧붙였다. 늘 어딘가가 아프면 인터넷을 검색하며 초조해하는 모습이 안쓰럽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조금은 답답했다는 것이다. 아픔에 집착하기보다는, 아프기 전에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도 전했다. 그렇다. 나는 건강염려증은 있었지만, 정작 운동이나 식생활 관리에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파트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피트니스센터나 수영장을 거의 이용한 적이 없고, 집 밖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다. 시간이 있을 때 주로 하는 일은 독서, 인터넷 서핑, 재테크 공부 정도. 다 앉아서 하는 것들 뿐이다. 게다가 먹는 것에도 그다지 의욕이 없어서, 건강한 음식을 해 먹으려는 노력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가 있기에 꾸역꾸역 요리를 하긴 했지만 밀키트의 도움을 받거나 간단한 한 그릇 요리로 한 끼를 해결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부서진 외양간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소가 도망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꼴이라니. 정말 최악 중의 최악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냉장고 채소 칸과 찬장을 열고, 안에 있는 재료들을 몽땅 꺼냈다. 깻잎, 시래기, 오이고추, 오이, 토마토, 곱창김 등등. 한국 식재료가 보이면 왠지 사놓아야 할 것 같아 쟁여놓긴 했지만 귀찮음에 그냥 묵혀놓고 있었던 재료들이었다. 그리고, 지독한 습기와 더위를 참아내며, 밑반찬을 만들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다섯 가지 반찬이 완성되었다.



저녁 식탁은 다섯 가지 채소 밑반찬과 된장찌개, 삼치구이로 차려졌다. 갑자기 달라진 식탁을 보고 아이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고, 남편은 웃음을 보였다. 만족함의 웃음이라기보다는, 과연 이 변화가 얼마나 갈 것인지 흥미진진해하는 웃음 쪽에 가까웠다. 웃을 테면 웃으라지. 그래도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며, 시작이 반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는 건강을 잃을까 걱정만 하고 앉아있기보다는, 건강한 채식 식단과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을 먼저 지켜볼 거다. 아, 그러려면 운동도 해야 할 텐데…. 일단 건강한 식생활의 시작으로 반은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운동은 천천히, 무리하지 않게 시작해야겠다. 언젠가는 건강염려증 대신 운동중독증에 관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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