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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리스 Jul 12. 2022

관계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사람들과 편한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이유 찾기

어떤 집단에 가던지 사람들과 잘 친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외향적인 사람, 내향적인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등 상대의 특성과 관계없이 모두와 스스럼없게 가까워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친화적인 사람과도 편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한 두 명 눈에 띌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이 나다.


그렇다고 내가 사람들의 미움을 사거나 소외를 당해왔다는 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낯을 많이 가리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편이어서 그런지 집단의 바깥으로 내쳐진 적은 없었다. 오히려 초중고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에게 모범생이라며 칭찬받고, 반 친구들의 손으로 뽑는 학급 임원에 이름을 올리는 쪽이었다. 늘 같은 반 안에 단짝 친구가 한 명씩 있었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항상, 단짝 친구를 제외한 나머지 무리의 친구들은 나를 묘하게 불편하게 여긴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끼리는 서로 스스럼없이 뭔가를 부탁하기도 하고 짓궂은 농담을 하며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나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불필요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깔끔한 관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그들과 나 사이에 넘지 못할 투명한 벽이 있는 느낌이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하나의 교실 안에서 제한된 범위의 인간관계를 어찌 되었든 유지해야 하는 초중고 학창 시절은 그래도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스스로 나서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고립되어버리는 대학교와 직장은 또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나는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개척 해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며 내 몫을 해나갔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 노력했고, 단체 활동에서도 모나지 않게 참여했으며, 해야 할 일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학생 또는 직원이라는 꽤 괜찮은 평판이 늘 따랐지만,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유지되었다.




E팀장님은 회사 안에서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직설적인 성격과 발언으로 유명한 분이다. 어느 날 내가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응대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갑자기 잠자코 있던 E팀장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OO 씨는 친절하긴 한데, 듣다 보면 영혼이 하나도 없어”라고. 사회생활 내공이 나름 쌓인 나는 “아닌데요, 저는 제 영혼과 진심을 다 담아서 일하고 있어요, 하하하”라고 말하며 웃어넘기려는데, E팀장님은 한 마디를 더 거들었다. “지금도 연기하는 것 같은데.”


E팀장님의 발언은 나를 매우 뜨끔하게 했다. 남들은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도 알고 있었다는 데에서 온 놀라움과 민망함이었다. 사실 나는 가족 및 매우 가까운 지인 외에는,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다. 특별히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도 별로 들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나의 속내를 남에게 밝히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흉될 이야기는 굳이 떠벌리고 싶지 않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이야기는 괜한 미움을 살까 봐 드러내고 싶지 않다. 내 일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하는 데에 익숙했고, 반대로 남을 도와주는 것에도 인색한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남들과 대화를 할 때도 이야기의 수준이 깊어지지 않았고, 깊이 없는 대화만 반복되다 보니 당연히 관계도 깊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E팀장님의 말처럼, 대화와 관계 속에 내 영혼이 담기지 않았던 것이다. 영혼이 없는 관계가 상대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 테고 말이다.




해외에 나와 살다 보니 가끔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없어 난감할 때가 있다. 남편이 회사에 휴가를 내지 못한 어느 날 내가 조금 먼 거리에 위치한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나는 당연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사는 한국인 J언니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에게 섭섭해하는 것이 아닌가. 본인 집에 아이를 맡겨두고 가면 아이도 나도 더 편했을 텐데, 내가 언니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묻지도 않았다는 점이 섭섭했다는 것이었다. J언니는 나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나에게 조건 없는 도움을 준 언니다. 한국에서 맛있는 음식이 오면 기꺼이 나누어주고, 동네에서 알게 된 좋은 정보가 있으면 먼저 알려주기도 하고, 아이를 데려다가 저녁을 먹여 보내기도 하는 등 나로서는 상상치도 못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베풀어주었다. 처음에는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은 다들 이렇게 조건 없이 베풀고 살았었나, 나는 그동안 너무 닫힌 채로 살았던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J언니 옆에 있다 보니 나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게 된 것 같으면 J언니의 집에 가져다 주기도 하고, J언니의 아이를 맡아주거나 반대로 우리 아이를 J언니 집에 맡기기도 하게 된 것이다. 서로와 서로의 생활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40년을 살아오면서 느끼지 못했던 인간관계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그동안은 내가 사람들에게 편치 않은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냥 그대로 살아왔지만, 뒤늦게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음을 경험하며 나를 조금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서로의 선을 잘 지키는 예의 바른 관계도 물론 필요하지만, 가끔은 서로에게 폐를 주고받으며 서로가 가진 빈틈을 메워주는 관계도 필요한 것 같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또 사실 그렇게까지 완벽할 필요도 없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조금은 풀어진 편한 모습으로 만나는 관계들도 늘려나가고 싶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와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노력도 해보려 한다. 내가 편하게 상대를 대하다 보면 상대도 나를 편하게 대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이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든 불안감.

나는 내가 스스로 타인에게 선을 긋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결론 내렸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나에게 내가 모르는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진짜 큰 문제일 텐데 말이다. 아, 그런데 더 생각하기도 귀찮다. 내 마음대로 결론내고 그냥 복세편살 하련다.




* Image by Anemone123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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