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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등석 Nov 27. 2021

장마

     

 이제 막 8개월이 된 우리 딸은 투레질을 시작했다. 장마가 시작되면 아기들은 피리를 불 듯이 두 입술을 떨며 푸푸 소리를 내기에, 농사가 주된 산업이었던 과거에는 비가 안 오면 아기들의 투레질을 기다렸고, 장마철이면 투레질을 못하게 하였다곤 한다. 우리 딸이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지루한 장마가 며칠 째 지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시골 사는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인천에는 비가 며칠째 지속되어 출퇴근 시 신발이 흠뻑 젖곤 하는데, 당신이 농사짓는 벼는 물에 잠기지 않았냐고 여쭈었다. 아버지는 별일 없다는 듯이 시골은 아무 염려 없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다. 그러시곤, 차라리 작년처럼 논이 물에 잠겨 보상금이라도 받으셨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셨다. 보상금이라곤 해보았자 얼마 되지도 않았고, 농사꾼은 농작물이 잘못되는 것만큼 속상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곡물은 거짓이 없다곤 하지만, 자연재해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어릴 적, 물에 잠긴 논을 보시고는 허탈해하시던 아버지의 근심 어린 얼굴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올해 큰 수술을 하셨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는 못 가더라도 사람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족여행이라도 가려던 나와 아내는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아버지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별일 아니라며 오히려 우릴 위로했다. 더 큰 수술도 하셨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수술은 다행히 잘 끝났지만, 땀을 흘리시면 안 되시기에 나는 아버지에게 논에 너무 많이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차라리 올해는 농사를 포기하는 것이 어떠시냐고 의중을 물었다.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셨기에, 몸에 익은 습관은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딸이 태어난 뒤에 나는 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아들이기에 영상통화는커녕 문자도 잘하지 않던 나였다. 나는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아기에 대하여 전문가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히 놀라웠다. 아기들이 하는 잠꼬대를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인 <잠뜻>, 아기들이 별 의미 없이 생긋생긋 웃는 것을 뜻하는 <배냇짓>, 위에서 말한 <투레질>까지, 다 아버지에게 배운 말들이다. 아버지에게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 좋다.


 나는 아버지의 병이 장마처럼 느껴진다. 어두운 하늘 아래 물에 잠긴 논을 바라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실 아버지의 근심은 지루하고 긴 장마가 끝나면 깨끗하게 사라질 테니까. 딸이 투레질을 그만둔다면 아버지의 병은 말끔하게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딸아. 어서 투레질을 그만두어라.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아직도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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