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싸움을 구경하는 아이들 사이에 있었다. 주먹이 살을 때릴 때의 둔탁한 소리, 피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는 모습, 울음과 비명이 뒤섞인 소음. 그 장면들은 공포스러웠지만, 동시에 기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끌림이 나를 사로잡았다. 공포와 매혹이 뒤섞인 감정.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미적 공포'였다.
학교 뒤편, 담벼락 아래에서 벌어진 그 싸움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두 남학생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주변에서는 아이들이 원을 그리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부추겼고, 어떤 아이들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나는 그 조용한 아이들 중 하나였다. 말없이 지켜보는 것, 그것은 개입도 아니고 도피도 아닌 제3의 위치였다. 관찰자의 위치.
"때려! 더 세게!"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 말은 폭력을 부추기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 상황을 언어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폭력은 행위일 뿐 아니라 언어였다. 그 언어는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강력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어의 폭력성을 목격했다.
나이가 들면서 접하는 폭력은 더 세련된 형태로 변모했다. 말의 칼날, 시선의 돌, 침묵의 매질. 나는 이런 폭력의 언어를 배웠고, 때로는 그것을 직접 목격했다. 친구를 향한 비난조의 농담, 동료를 향한 무시의 표현, 연인을 향한 구속들. 그것들은 모두 폭력의 다른 형태였다.
폭력에 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미학적으로 포장하려 했다. 폭력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그것은 진실의 표현이라고. 영화 속 폭력 장면의 미학적 구성, 문학 작품에서 묘사되는 잔혹함의 시적 표현, 그리고 현대 미술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의 승화. 그것들은 모두 나에게 정당화의 근거를 제공했다.
"정의를 위한 폭력과 악을 위한 폭력, 그 경계는 어디인가?"
이 질문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혁명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억압에 대항하는 폭력은 다른 종류의 폭력인가? 아니면 그것 역시 동일한 폭력의 순환 고리의 일부일 뿐인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을 구분한다. 신화적 폭력은 법을 세우고 유지하기 위한 폭력이다. 반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적 폭력의 순환을 끊는 혁명적 폭력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이 두 폭력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모든 폭력은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깨달았다. 폭력의 언어가 익숙하다는 것은, 내가 이미 그 언어로 사유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정의와 악 사이의 선명한 경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재구성되는 유동적인 영역이었다. 폭력의 연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먼저 내 안의 폭력성을 인정해야 했다.
대학원에서 나는 폭력의 철학적, 심리학적 기원에 관한 연구를 했다. 르네 지라르의 '모방욕망' 이론은 특히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라르에 따르면, 폭력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쟁과 갈등의 결과이다.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이 이론은 내 안의 폭력성이 단순히 개인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조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언어가 폭력을 멈추어야 한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언어가 폭력을 멈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공격적인 표현을 자제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폭력을 구조화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느 날 우연히, 나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하루 동안 모든 대화에서 이분법적 표현을 자제하기로 했다.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 우리/그들과 같은 구분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날의 대화는 평소보다 어려웠지만, 동시에 더 풍부하고 깊은 것이었다. 이분법을 피하자, 세상은 더 이상 흑백이 아닌 무수한 그라데이션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었다.
폭력의 언어를 인식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일종의 명상과도 같았다. 내 안의 분노, 적대감, 경쟁심을 관찰하고, 그것들이 언어로 표현되는 방식을 알아차리는 과정. 그것은 폭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다루는 새로운 방식을 찾는 것이었다.
불교의 자비 명상은 이런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모든 존재가 평화롭기를,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런 기원을 통해, 나는 적대감을 자비로 변화시키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매우 어색하고 인위적으로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자연스러운 태도가 되어갔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았다. 완전한 비폭력은 가능한가? 폭력 없는 언어, 폭력 없는 사유는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더 세련되고 은밀한 형태의 폭력일 뿐인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주인공처럼 나무가 되어버리는 것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폭력의 연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육식을 거부하고, 결국에는 인간성마저 거부하며 식물이 되고자 한다. 그것은 폭력의 세계에서 완전히 이탈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가끔 어린 시절의 그 싸움 장면을 꿈에서 다시 본다. 그러나 이제 그 꿈에서 나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다. 때로는 맞고 있는 아이가 되고, 때로는 때리는 아이가 된다. 그리고 가끔은, 둘 다가 된다. 그 꿈은 언제나 통증으로 끝난다. 주먹에 맞는 통증이든, 주먹을 내지르는 통증이든. 그리고 그 통증은 깨어난 후에도 오래도록 남는다.
폭력의 언어는 여전히 익숙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언어를 좀 더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때로는 그것을 거부하고, 때로는 그것을 변형시키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하려고 노력하면서. 폭력과 비폭력 사이의 이분법조차 넘어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여정. 그것이 폭력의 언어와 함께,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살아가는 나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