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목교

1978년-1980년 언저리

by 서완석

제22화 숙희와 선희

일제고사가 끝나고 며칠 후, 노란 은행잎은 찬 바람에 거의 떨어지고 떨어진 은행들이 사람들 발에 밟혀 시멘트 골목이 지저분해졌다.

“우리 엄마한테 허락받았어. 오늘 너희 집에 가도 돼.”

학교에서 선희가 먼저 숙희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 선희의 표정은 마치 엄청난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아이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진짜? 네가 우리 집에 온다고?”

“괜찮아. 나도 떡볶이, 번데기 못 먹고 살아온 세상에서 탈출하는 거야.”

두 아이는 정문을 나섰다. 평소라면 조 선생이 억지로라도 선희와 숙희를 떼어 놓으려 했겠지만, 어쩐 일인지 조 선생은 오늘따라 교무실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류만 뒤적이고 있었다. 사실 조 선생은 선희 어머니로부터 두 아이가 만나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말을 들었지만, 숙희의 맑은 눈을 보고 차마 우정을 깨라는 말을 꺼낼 수 없어 두 아이가 친해지는 것을 보고도 애써 모른 체 하고 있었다.


숙희와 선희는 중간에 떡볶이와 번데기를 사먹으며 숙희의 집이 있는 오목교까지 재잘거리며 갔다. 선희는 아주 신이 난 모습이었다. 숙희네 동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연탄아궁이 냄새와 정체 모를 냄새가 뒤섞인 특유의 냄새가 났다. 그녀의 동네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창피해서 어쩌니? 부끄러워”

숙희가 집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립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괜찮아. 우리 집은 넓기만 하지, 숨이 막혀.”

선희는 숙희의 집 안에 들어섰다. 밖은 얼기설기 막은 판자로 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서니 방 두 개와 작은 부엌이 전부다. 방 한쪽에는 숙희가 이불을 개어 놓았고, 책상은 낡았지만 깨끗했다.

“우리 집에는 소파 같은 것 없어. 그냥 방바닥에 앉아야만 돼. 미안해.”

“그런 소리 하지 마! 난 네가 사는 집에 꼭 한번 와보고 싶었거든. 이제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두 아이는 방바닥에 나란히 앉아 선희가 가져온 ‘공주 그림’이 그려진 노트를 펼쳤다.

“우리 엄마는 내가 이런 그림 그리는 거 보면 화를 내. 나보고 “화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면서 꼭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어. 그런데 난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좋거든.”

선희가 ’후‘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엄마는 나더러 “숙제만 잘 하면 된다.”라고 하시는데. 나는 우리 엄마처럼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돈 많이 벌어 좋은 동네로 이사 가는 게 꿈이야.”

숙희가 조금은 자신이 없는 태도로 말했다.


선희는 숙희의 낡은 책상 위에서 왕자표 크레파스와 작은 붓과 물감 통을 발견했다.

“숙희야, 너도 그림 그려?”

“응! 우리 엄마가 내가 그림 그릴 때 싱글벙글하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고 하시며 사줬어. 나는 우리 엄마 얼굴 그릴 때가 가장 좋아.”

선희는 깜짝 놀랐다. 숙희의 그림 실력이 자신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숙희야! 너 그림 너무 잘 그린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내가 네 그림 실력을 몰랐지?”

선희는 숙희가 그린 곰소댁의 얼굴 그림을 보았다. 넉넉하고 인자한 곰소댁의 미소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우리는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구나. 와! 너무 기뻐.”

선희가 숙희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나 물감도 많고, 이젤도 있고, 그림 그리는 도구도 아주 많아. 너 우리 엄마가 화가인 거 알지? 너 필요한 것 있으면 다 줄게.”

“아니. 난 네 엄마가 화가라는 걸 몰랐는데?”

“우리 엄마는 자기가 화가이면서도 딸이 화가가 되는 것이 정말 싫은가 봐. 아빠처럼 의사가 되라고 하시는데 난 정말 싫어.”

선희는 과장되게 진저리를 치며 웃었다.


“그런데 선희야! 너 정말 네 엄마한테 여기 온다고 허락받은 거야?”

숙희는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응. 그런데 너희 집에 온다고는 안 했어. 다른 친구네 집에서 놀고 오겠다고 했어. 미안해. 만일 너에게 솔직히 말하면 네가 나 여기 데리고 오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당연히 그랬겠지.”

숙희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선생님도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 하고 계셔.”

그제야 숙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 여기 다시 와도 되지? 오목교만 건너면 되니까."

"난 네가 엄마 속이고 오는 건 싫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마."


오후 늦게 숙희와 선희는 버스를 타고 영등포시장으로 갔다. 곰소댁은 좌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이구! 우리 선희 아가씨도 왔는가? 이제부턴 진짜배기 친구가 될랑가 보네?"

선희는 곰소댁의 따뜻한 말투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고향순대국집'에 있던 최 사장이 가게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워메! 두 공주님이 또 납셨구먼.”

“어째, 곰소댁. 오늘 장사는 잘된 거여?”

최 사장이 귀엽다는 듯이 숙희와 선희의 볼을 한 번씩 만지더니 곰소댁을 향해 물었다.

곰소댁은 허리를 펴며 오른 손으로 왼쪽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했다.

“잘 되기는, 힘들어 죽겄는디?. 오늘 고창댁이 나헌티 잔소리를 허며 지랄을 혀서 내귀가 아주 피곤하구만.”

옆에 서 있던 고창댁이 곰소댁을 쿡 찌르며 말했다.

“아따, 내가 언제 지랄을 혔다고 그려? 시방 최 사장 앞에서 애먼 소리 허지 말어. 최사장! 이 아짐씨가 요즘 싱숭생숭헌가 벼?”

고창댁이 최 사장을 향해 짓궂게 눈을 흘겼다.

최 사장은 애들 보는 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창댁을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이고! 참말로. 고창댁은 시방 또 뭔 소리를 허는 거여. 곰소댁, 이 두 아가씨 오늘 저녁은 뭐 잡수게 할 거여? 니들 순대랑 머리 고기 쪼까 챙겨 줄 팅게 먹을래?”

“네”

선희가 한 손을 번쩍 들며 크게 외쳤다.

곰소댁은 최 사장을 흘끗 보았다.

“워메 오라버니! 뭔 일인가는 모르겄는디, 오늘따라 인심이 후하네 잉.”

“두 분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뭘 못 허겄는가? 오늘은 특별히 더 챙겨줄 것이여.”

최 사장은 곰소댁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숙희와 선희에게 주는 순대와 머리 고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곰소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곰소댁이 좌판 구석에서 낡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오라버니! 이것 좀 보소. 요즘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디, 지난번에 빌린 거 이거라도 먼저 갚을 팅게 받으소.”

최 사장은 곰소댁의 손에 들린 봉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따, 뭔 소리여. 그거 누가 갚으라고 혔간디? 숙희 대학 갈 때 등록금에나 보태소. 우리 같은 서민은 애들 공부시키는 것이 젤로 큰 짐이여. 나야 뭐, 장사 잘되고 있응게. 암시랑토 안혀.”

“뭔 소리여? 계산은 바로 허라고 혔어. 언능 받어.”

“얼래?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 아녀? 꿔준 돈을 안 받는다는 것은 부부간에나 있을 법한 일인디. 이것 수상헌디?”

고창댁이 또 슬쩍 끼어들며 곰소댁의 반응을 요리조리 살폈다.

“아따! 애들 듣는 디서 이년이 벨놈의 소리도 다 헌다. 저리 썩 꺼져.”

최 사장은 쑥스러운 듯 슬쩍 자리를 피해버리고 곰소댁의 돈봉투만 무색해졌다.


“최 사장! 곰소댁이 고마워하는 눈치구만 최 사장이 꼭 숙희 아부지 같네.”

고창댁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뱉어놓고 숙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숙희는 딴청을 피고, 선희는 재미있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이고! 이 이쁜 공주님들 굶기지나 말어. 배창시가 등가죽에 붙을 시간인디 이렇게 세워놓고만 있을 거여? 어서 아저씨 가게로 가자.”

최 사장이 숙희와 선희의 손을 잡아끌고는 자신의 가게로 데려갔다.

곰소댁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정 선생이 살아 있었더라면 숙희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장사가 끝날 때까지 숙희를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그런데 오늘 최 사장의 따뜻한 배려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희는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어렴풋이 최 사장님이 숙희 어머니를 좋아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근디 말여. 곰소댁! 미스리가 박사장헌티서 돈 멫푼 받고 쫓겨나서 그 돈으로 쩌그다 다방 냈다는 소리가 들리던디 들었는가?”

고창댁이 '고향순대국밥집'을 한번 봤다가 시장 반대편을 가리키며 곰소댁에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뭔 소리여? 그년이 무슨 낯짝으로 이 부근에다가 다방을 낸단 밀이여?”

“나도 잘 모르는디 최 사장 알먼 속창알머리 없는 저 인간이 그년한티 다시 갈랑가 모르니께 단속 잘혀.”

“아따! 이년이 벨소리를 다 허는구먼. 나허고 저 냥반허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내가 단속을 혀?”

곰소댁이 큰 소리를 지르자, 고창댁은 깜짝 놀라 검지를 자기 입술에 대며 최사장의 동정을 살폈다. 다행히 최사장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 두 소녀 대접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조용, 조용히 말혀. 나 귓구녕 안 맥혔응게.”

“네년이 아직 내가 월매나 무서운 년인지 모르는 개비다. 내가 뭐가 무서워서 조용, 조용히 말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곰소댹의 우렁찬 목소리가 시장안에 울려퍼졌다.

“뚫린 입이라고 아무 소리나 허는 거 아녀.”

고창댁이 보니 최 사장이 무슨 싸움이 났나 이쪽을 흘끗 보는 듯해서 얼른 화장실을 간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곰소댁은 애써 미스 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자 노력하면서도 몸은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최 사장이 숙희와 선희에게 순댓국을 대접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따뜻하고 평화로웠으나, 곰소댁의 마음 속에는 이미 미스 리의 환영이 들어앉은 뒤였다.

곰소댁이 자리에 앉아 물을 마시자, 최 사장이 국자를 들고 다가왔다.

“아이고, 곰소댁.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는디, 한 그릇 뜨뜻하게 잡숴볼랑가?”

최 사장의 눈빛은 평소처럼 곰소댁을 향한 걱정과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곰소댁은 그 눈빛 속에서 숨겨진 불안을 읽어내려는 듯 최 사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라버니! 이리 좀 와서 앉아보소.”

곰소댁은 숙희와 선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멀찌감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최 사장을 불렀다.

최사장은 곰소댁의 평소같지 않은 모습에 조금은 놀란 표정이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오라버니! 미스리가 이 부근에 다방 냈다는 소리 들었는가?”

곰소댁은 돌려 말하지 않고 대놓고 물었다.

최 사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순댓국집의 뜨거운 김 사이로, 그의 표정은 시린 겨울 강물처럼 굳어버렸다.

“뭔 소리여?”

최 사장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화장실에 다녀와 좌판에 앉은 고창댁이 곰소댁과 최사장 둘이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큰일이 났다고 생각했는지 자기 입술을 오른 손으로 몇 차례 때리고 있었다.


최 사장의 시선은 곰소댁이 아닌, 펄펄 끓고 있는 뚝배기를 향했다.

“그년이 박 사장헌티서 쫓겨나서 온 거라던디. 여그다 다방을 낸 이유가 뭣이라고 생각하는 거여?”

“근디 그 이유를 내가 알어야 허는 거여?”

최 사장이 매우 불쾌하다는 표정을 물었다.

“글고 곰소댁이 나헌티 그걸 묻는 이유는 또 뭐여?”

곰소댁은 최사장의 연이은 질문에 외통수라도 걸린 듯 매우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나는 고년이 오라버니헌티 또 피해를 줄까 싶어서 허는 소리지.”

곰소댁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최 사장은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곰소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쓰라린 회한이 서려 있었다.

“그년 일은 나헌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이여.”

최 사장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곰소댁도 알다시피, 우리는 한때… 참말로 살아볼라고 발버둥을 쳤제. 내가 구로공단에서 재단사로 일헐 때, 감독 조승헌이가 그년을 겁탈헐라고 혔는디, 내가 그거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회사에다가 그 사실을 알렸다가 해고까지 당허고 어찌 어찌허다가 고년에게 홀려서 살림까지 차렸다가 당헌 거 잘 알고제? 근디 내가 그런 년헌티 다시 마음을 줄 성싶은가? 안 그려?”

최 사장은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다.

“내가 그 일로 잘린 후, 순대국집과 살림을 차리고, 우리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다고 믿었었제. 근디 울 엄니가 항상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고 혔는디 그 말이 딱 맞는 말이더란 말이시.”

최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년이 떠난 후 정말 견디기 힘들더라고. 근디 시간이 해결해주더라고. 지나고 나서 본 게 그년은 돈이 전부였어. 글고 열 남자 싫어할 년도 아니었어. 내가 참 순진혔지. 나는 원래 사람을 잘 믿는 편이거든.”

최 사장은 점점 화가 나는 듯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곰소댁은 최사장에게 애들이 들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년이 술만 마시면 자기를 따라다닌 남자들이 아주 많았다며 자랑을 혀곤 혔어. 글고 여러 놈허고 가리봉동이나 구로동 옮겨 다니면서 동거했더란 말이여. 그렇지만 이제 내 여자니께 내가 잘 데리고 살먼 되겄다 혔는디 천성이 그런 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더라고. 자기 엄마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 버리고 도망갔다고 허던디 그런 영향도 있는 것 같고. 여하튼 심성이 좋은 년은 절대 아니었어.”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었어?”

곰소댁이 물었다.

“술이 취허문 지가 이뻐서 그런 거라고 자랑스럽게 마구 떠벌렸거든. 사실 얼굴은 반반혔잖어?”

“그건 그렇지.”

그것은 곰소댁이나 시장 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지보다 연하인 남자도 저를 좋아해서 한번 사랑을 해줬다고 떠들던디? 동거하던 남자가 눈치를 채고 뒤를 조사했다나봐. 그런디 그년은 동거남을 의처증환자로 마구 몰아대면서 딱 잡아뗐다고 허드라고. 동거허던 놈도 나랑 똑같이 어리숙한 놈이었던 게지.”

“아니 같이 사는 년이 그런 소리 허문 오라버니는 화가 안 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 거여?”

“내 여자가 됐응게 과거지사는 다 잊어뻔지고 살라고 혔지.”

사장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변했고, 손마저 덜덜 떨고 있었다.

"내가 아직까지 병원에 다니면서 약을 먹고 있어."


곰소댁이 최 사장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오라버니! 물어 본 내가 죽일 년이네. 힘든 이야기는 그만 혀. 옛날 일은 다 잊어버리소. 세상에는 베라 벨 놈의 사람들이 아주 많으니까. 나는 그저 그년이 돌아왔응게 조심허라는 의미에서 헌 이야기여.”

“글고 선희를 얼른 집으로 보내야 헐 것 같은 디?”

곰소댁이 아이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최 사장이 제정신을 차린 듯 두 아이를 쳐다보았다. 숙희와 선희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깔깔대며 맛있게 순댓국과 수육을 먹고 있었다.

“그려. 어서 애들 보내소.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했구먼? 부끄러워 죽겄네?”

“부끄럽기는! 솔직허니 털어놓으니까, 오라버니가 믿을 만헌 사람이라는 생각이 더 드는디?”

“그려? 그러믄 다행이고.”

최 사장은 곰소댁의 진심이 어린 눈빛을 보았다. 그는 곰소댁이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를 감싸안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고마워! 곰소댁. 내가 정신 차리고 저 두 공주님 식사 마무리허라고 헐 팅게 어서 애들 데리고 퇴근혀.”

곰소댁이 차분해진 모습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좌판정리를 하고 다시 애들 앞으로 갔다.

“자, 이쁜 아가씨들. 배터지게 먹었응게, 인자 집에 가야지. 숙희야! 엄마 손 잘 잡고 가거라.”

“잘 먹었습니다! 아저씨!"

선희가 배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희 역시 “감사합니다, 아저씨!”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곰소댁은 숙희의 손을 잡고 순댓국집 문을 나섰다. 최 사장은 문밖까지 나와 두 사람을 배웅했다. 곰소댁과 두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따스했다.

“뭔 야그를 그리 오래 헌 디야?”

고창댁이 귀엽다는 듯이 두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물었다.

“알면서 뭘 물어? 이 화상아!”

고창댁은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궁금해 죽겠는데 곰소댁이 화를 낼까 무서워 참았다. 다만 곰소댁의 표정과 말투를 들어보니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아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그래. 조심히 가소!”

시장은 파장 분위기라 불빛이 드문드문 꺼져 있었다. 곰소댁은 숙희와 선희의 손을 잡고 선희네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 선희 아가씨 집은 어디다냐?”

“저는 이 큰길로 곧장 300미터만 가면 되거든요. 그러니 제 걱정일랑 마시고 숙희랑 어서 가세요.”

“그려! 네 엄마가 보시면 안 좋아헐 팅게 여그서 헤어지자. 직선거리니까 여그서 너 대문 들어가는 것 보고 갈 거여.”

“네. 아줌마! 너무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런데 식사비는 누가 내신 거예요?”

“아이고! 공주님 그런 것은 걱정 안 혀도 되네요. 어서 가셔요.”

“선희야 잘 가.”

“그래 숙희야 내일 학교에서 보자.”

곰소댁과 숙희는 선희가 자기 집 대문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엄마! 오늘 선희가 우리집에 왔었어.”

“뭐여? 선희가 우리집에 왔었다고?”

“이거 큰일 난 것 같다.”

“왜? 엄마.”

“가난한 판잣집에 와봤으니, 실망해서 내일부터 너 안 만날지도 모르고 지네 엄마가 아시면 난리가 날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엄마가 지난번에 말한 것과 다르잖아.”

“내가 뭐라고 혔는디?”

“사람 차별하는 건 나쁜 거라 했잖아? 그리고 하늘에 있는 작은 별도 필요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

숙희가 따지듯이 물었다.

“아이고! 우리 딸 많이 컸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더니. 이 에미가 잠시 생각을 잘못 혔네. 맞어! 우리가 선희 엄마의 잘못된 생각을 따라갈 필요도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어. 당당허게 사는 거여.”

“근디 숙희야 최 사장님이 너헌티 잘해주디?”

“그럼! 얼마나 친절하게 잘해주시는지 몰라. 선희도 너무 좋으신 분이라 했어.”

“너도 그런 아빠 하나 있으면 좋겄냐?”

“엄마! 아빠 보고 싶다.”

숙희는 대답을 피하는 건지 엄마가 하는 말을 못 들은 건지 갑자기 정 선생 이야기를 꺼냈다.

곰소댁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근디 말여. 엄마는 우리 딸이 참말로 착한 아이라고 믿어. 글고 선희랑 서로 의지허는 좋은 친구가 될 것을 믿어. 선희 엄마가 뭐라고 헐지는 모르겄다만,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선희헌티 최선을 다해서 잘해주면 선희도 너헌티 똑같이 대해줄 것이여. 그것이 바로 사람 살아가는 방법이여. 네가 진심으로 대하면 된다 그말이여.”

곰소댁은 얼른 대화 내용을 바꾸며 숙희의 손을 꼭 잡았다.

“네! 엄마. 선희는 정말 착한 아이 같아요. 나도 그림 그리기 좋아하듯이 선희도 그렇대요.”

버스가 오목교를 건너는데 창밖으로 멀리 경인고속도로가 보이고 인천 쪽으로 붉은 노을이 지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해가 꼴까닥 넘어가고 있었다.


곰소댁은 숙희를 재우고 낡은 방바닥에 앉았다. 연탄아궁이에 올려놓은 큰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하지만 서늘한 밤이었다. 곰소댁은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반짇고리를 열어 오늘 최사장에게 갚으려 했던 봉투를 다시 집어 넣었다.

최사장은 돈을 받지 않았다. “숙희 대학 등록금에 보태소”라는 그의 말은 고장난 시계 초침이 뭔가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딸깍거리듯이 계속해서 곰소댁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리고 곰소댁은 최사장이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를 털어놓았을 때, 자기도 똑같이 분노하면서 대신 복수를 해줄까 하는 생각까지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밤은 깊어가는데 마음 한 구석,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미스 리의 존재는 자꾸만 곰소댁의 평화로운 밤을 방해했다.


왜 착한 사람은 남에게 당하고 사는 걸까? 착한 사람은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하고, 약속을 지키고, 상대를 배려하고, 갈등을 피하려 하고, 무리한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심지어 대화 중에도 대화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 하다보니 규칙을 어기는 사람보다 늦게 되고, 조용히 숨어있는 나쁜 자들보다 눈에 잘 띄게 되며, 소리 큰 사람에게 양보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더 공격하고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과 관계를 끊으면 또 속좁다고 욕하지 않는가? 이런 저런 온갖 잡념에 곰소댁의 밤은 새벽까지 뜬 눈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