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영석은 정화에게서 받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아직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단호하게 “이 이상은 안 돼”라고 결심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 심어진 정화의 밝고 긍정적인 인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영석은 정화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정화는 영석의 결심을 모른 채 답장을 기다렸다.
며칠 후, 정화는 영석이의 안부가 궁금하고 좋았던 첫 인상 을 잊을 수 없어 언니 봉숙이의 학교 후배인 봉자에게 전화를 걸어 SOS를 쳤다.
“봉자야, 네가 다니는 학교에 영석이 오빠 연락처 알아낼 방법 없어? 내 번호는 줬는데, 오빠네 집엔 전화가 없다잖아. 집주소는 받았지만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봉자는 난감했다.
“정화야! 나도 그 오빠 전화번호는 몰라. 학과가 다르니 마주칠 일이 거의 없거든. 그리고 난 그 오빠를 한번도 본 적이 없잖아. 우리 봉숙이 언니도 그 오빠 연락처를 모르는가 보던데?”
“그렇다면 봉숙이 언니와 미팅을 주선한 상대방이 그 오빠 연락처를 알고 있지 않을까? 혹시 그 오빠가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건 아닐까?”
“에이. 그럴 리가 있겠니? 너에게 주소는 알려주었다면서? 그리고 너처럼 예쁜 여학생을 싫어할 남자가 있을까?”
봉자는 정화가 싫어하지 않을 말을 특별히 골라 말해놓고는 까르르 웃었다.
정화는 봉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봉자는 언니 봉숙이에게 연락했고, 봉숙이는 태종에게 상황을 전했다. 태종은 영석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가 정화가 자신을 통해 영석을 찾으려 한다는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경계인이 잠시 쉬는 쉼터’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영석이? 요즘 중앙도서관 열람실에 틀어박혀서 거의 안 나와. 헌법재판 관련 공부한다고 정신이 없을 거야. 오전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꼼짝하지 않는다고 보면 돼. 중앙도서관은 하얀색 건물이야.”
봉숙이는 태종에게 들은 정보를 그대로 봉자에게 전달했고, 마침내 정화는 영석을 만날 단서를 확보하게 되었다.
곧 겨울이 닥쳐올 걸 예감이라도 하듯 푸른색을 띠던 명륜당과 대성로의 은행나무는 황금색을 띠기 시작했다. 오후 1시 30분. 봉자와 정화는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정화야! 저 하얀색 건물이 중앙도서관이야. 그런데 열람실에 있는 많은 학생 중에서 어떻게 그 오빠를 찾지?”
봉자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정화는 개의치 않고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그런 부류의 오빠는 늘 구석진 곳에 숨어 있게 마련이지. 나만 믿어.”
두 사람은 중앙도서관에 들어섰다. 헌법재판 관련 서적을 옆구리에 낀 영석이가 잠시 허락했던 일탈의 즐거움을 끝내기 위해 단절을 결심했던 그 공간이었다.
그러나 정화는 열람실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학생증을 보여달라는데 타교 학생인 정화에게 학생증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넉살좋은 봉자가 나서서 자기 학생증을 보여주고 정화의 연인이 연락이 안 돼 찾아왔고, 이 학생이 상사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열람실 입구를 지키던 경비 아저씨를 협박하여 20분이라는 귀한 시간을 허락받았다. 경비 아저씨는 절대로 소란 피우지 말 것과 주어진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정화의 열람실 출입을 허용했다. 정화는 봉자를 이끌고 열람실 복도를 앞장서 걸었다. 봉자는 열람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창문을 통해 안을 살폈지만, 정화는 망설임 없이 열람실 문을 열고 영석을 찾아 나섰다. 열람실은 시험 기간이 아님에도 학구열로 가득 찬 학생들로 빼곡했고, 정화의 등장에 몇몇 남학생들의 시선이 정화에게 꽂혔다. 정화는 그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꺼운 골판지 등으로 좌우를 막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고립시키고 있는 학생들만 골라 집중적으로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영석은 정화가 예상한 바대로 창가 깊숙한 곳에 법 관련 서적들을 쌓아두고 고개를 숙인 채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가 정화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했던 단호한 결심이 숨 쉬고 있는 공간이다.
정화가 영석의 책상 옆에 다가섰다. 미동도 없던 영석은 책상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미세한 숨소리가 들리자,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들었고, 눈앞에 선 정화를 발견하는 순간,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영석은 얼굴이 빨개진 모습으로 그저 입만 벌리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오빠!”
정화는 영석이 옆으로 다가가 영석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환하고 맑았으며,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낯선 아름다움은 영석이 애써 외면하려 했던 자유로운 가능성 그 자체였다.
영석은 벌떡 일어나려다 주변 시선 때문에 다시 주저앉았다. 죄책감과 당혹감, 그리고 정화의 등장에서 오는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뒤섞여 그의 심장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여, 여기는 어떻게?”
“내가 찾아냈지. 이렇게까지 숨어버리면 내가 내 마음대로 오빠를 찾아온 것을 탓할 수밖에 없잖아. 오빠는 자제심으로 나를 끊으려 했지만, 나는 운명을 믿고 왔어.”
정화는 활짝 웃으며, 영석의 가장 깊은 고민이었던 '자제심 대 운명'이라는 대립적인 단어를 꺼내어 그의 결심을 조롱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봉자는 슬그머니 열람실 밖으로 나가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다.
영석은 정화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힘들게 쑤셔 넣었던 메모지의 전화번호와 수아에 대한 죄책감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 같았다.
“왜? 오빠는 내가 싫어? 아니면, 나에게 솔직한 오빠 자신으로 대하는 게 겁이 나?”
정화의 질문은 영석의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영석의 마음은 이미 수아에 대한 책임감과 눈앞의 정화가 선사하는 낭만적 해방감 사이에서 통제 불능의 격렬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억압된 현실에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밝고 자유로운 가능성’ 조각을 들고, 굳게 닫힌 그의 마음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오빠! 아직도 나에게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커다란 장벽을 세워놓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아냐!, 아냐! 너무 당황해서 여기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서.”
영석은 분명히 당황했고,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어서 이 열람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지난번에 오빠네 학교 찾아가도 되느냐고 물었을 때 오빠가 그래도 된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두 사람이 열람실 밖으로 나오자, 봉자가 영석을 향해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봉숙이 언니 동생 봉자예요.”
“아! 그러시군요. 태종이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지난번 미팅도 봉자씨 힘이 컸다고 하던데요.”
“말씀 낮추세요. 정화가 오빠라고 한다면 제게도 오빠잖아요.”
“같은 학년인데요. 뭘”
“오빠 저 역시 정화처럼 7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오빠보다 두 살 아래예요. 그러니 편하게 말 놓으세요.”
“그래도 초면인데.”
“오빠! 그런 형식적인 예의 차리지 마세요. 필수과목인 유학강의 시간에 고루한 유교적인 관습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단 말입니다.”
봉자가 자기 목을 두 손으로 조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온 정화를 그냥 보내실 겁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가방을 챙겨 가지고 나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영석은 열람실에서 가방을 챙겨 정화와 봉자를 이끌고 중앙도서관을 벗어나 정문을 향해 걸었다. 정화의 해맑은 미소와 봉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영석의 귀를 울렸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에게 이 만남은 분명, 자신이 단호하게 닫아걸었던 ‘수아에 대한 책임감’의 문을 정화가 억지로 열어젖힌 행위였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정문 부근에 있는 '피네' 다방에 들어섰다. 정화는 당연하다는 듯 영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 커피 뭐 드실 거예요? 봉자랑 나는 비엔나커피 마실 건데.”
정화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아, 나도 같은 걸로 하지 뭐”
영석은 사실 커피 종류에 대해서 잘 모른다.
“드디어 오빠가 말을 놓았네. 서로 너무나 편하잖아.”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난 커피에 대해서 잘 몰라. 비엔나커피가 뭔지도 몰라.”
영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잘 몰라. 그저 뜨거운 블랙커피에 차갑고 달콤한 휘핑크림을 듬뿍 얹은 거라고 알고 있어.”
봉자가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주문을 하면서도, 정화에게는 비밀스러운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정화는 그 눈빛에 자신감을 얻고 영석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오빠, 지난번에 연락처 쪽지 받고 왜 연락 안 했어?”
정화는 질문을 했지만, 목소리에는 원망 대신 장난기가 가득했다.
“애프터 신청도 받지 않았는데 여자가 이렇게 먼저 찾아온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법이야. 오빠는 이제 내게 빚을 진 거야.”
영석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하게 묻었다. 정화의 적극적인 태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리고 봉숙이가 꼭 한번은 정화에게 애프터 신청을 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정화에게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느냐고 물은 기억이 없다.
“정말 미안해. 내게 사정이 있어.”
“사정? 그게 뭔데? 아주 바쁜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면 내가 이해해 줄 게.”
“그런 게 아니라....”
영석은 어떻게 수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오빠! 혹시 나 말고 사귀고 있는 다른 여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정화는 에둘러 가는 일이 없는 직진형 인간인 것 같아 한편으로는 시원스럽다는 생각이 들지만, 영석이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영석은 정화가 이왕 말을 꺼낸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말이야. 정화한테는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
영석은 어렵게, 그러나 단호하게 수아의 존재를 밝혔다.
정화는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알아, 오빠. 봉숙이 언니한테 들었어. 하지만, 둘이 결혼한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영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영석은 태종이가 봉숙이에게 자기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오빠가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기에 자존심도 좀 상하고 오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서 봉숙이 언니에게 물어봤어.”
“오빠가 나에게 연락하지 않은 건, 그저 오빠의 이성적인 판단이 감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잖아. 내가 오빠에게 준 쪽지는, 오빠의 결심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빛’이었는데, 오빠는 그 빛을 스스로 껐을 뿐이야.”
영석은 자신이 수아의 존재에 대해 말하면 정화가 토라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거나 적어도 실망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지극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오빠! 난 말이야. 싱겁거나 쉬워 보이는 게임에는 흥미가 없어.”
봉자가 커피 석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봉자는 정화와 영석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긴장감을 단번에 눈치챘다.
“에이, 영석 오빠. 정화 말이 맞아요.”
봉자가 비엔나커피의 크림을 한 모금 마시며 거들었다.
“오빠,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낡은 책임감 때문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외면해요?
“그리고 오빠!”
봉자가 목소리를 살짝 높여 쐐기를 박았다.
“우리 정화가 오빠 만나려고 수원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오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잠도 못 잤대요. 이 정도의 운명적인 끌림을 외면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얘! 잠을 못 잘 정도는 아니었어. 너무 과장하지는 말아.”
정화는 봉자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영석의 팔을 가볍게 툭 쳤다.
“그런데 오빠! 봉자 말이 맞아. 난 오빠를 운명으로 생각하고 왔어. 오빠가 내 손을 놓더라도, 나는 오빠를 놓지 않을 거거든.”
영석은 정화의 맹렬한 기세에 어안이 벙벙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테이블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영석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영석은 두 여학생의 적극적인 공세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특히 정화의 눈빛은 마치 “나는 오빠의 억눌린 자아, 오빠가 감히 밖으로 꺼내지 못한 ‘밝고 자유로운 가능성’이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영석은 커피잔을 들었지만, 마시지 못하고 손으로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수아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미팅이 끝난 후 정화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이유, 중앙도서관 깊은 곳에 자신을 고립시켰던 모든 행위가 수아에 대한 배신감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 막걸리 한 잔 마실까?”
영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정화와 봉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영석은 계산을 마친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바로 옆 ‘홍성집’으로 갔다.
“아따 저 잡놈! 공부는 안 허고 어쩐 일이여?”
홍성집 할머니가 영석을 보고 한마디 하셨다.
“여! 영석이 도서관에 앉아 있어야 할 놈이 어쩐 일이냐?”
구석에 앉아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자는 태종이었다.
“가만! 저분은 지난번 종로에서 봤던 분 아닌가?”
태종이가 정화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세 사람을 향했다.
“맞아요. 오빠!”
정화도 태종이를 알아본 듯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또 한 분은 누구신가?”
봉자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저 김봉자라고 합니다.”
“엥? 그러면 봉숙이 동생?”
“네 우리 언니를 아세요?”
“그럼! 내가 봉숙이 친구 한태종이야.”
“아! 태종이 오빠? 언니한테서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뵙는 건 처음이네요.”
“그러지 말고 여기 와서 합석하는 건 어때?”
태종이 옆에는 이미 취기가 오른 친구들이 두 명이나 앉아 있었다.
“아니에요. 오늘은 영석이 오빠랑 이야기하고 싶어요.”
정화가 단칼에 태종이의 제의를 거절하고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석과 봉자도 정화를 따라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굳건한 성벽처럼 쌓아 올린 의무감의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정화는 미련 없이 그 장막을 찢고 들어온 한 줄기 섬광이었다. 심장에 박힌 수아에 대한 죄책감은 시시각각 그를 찌르는 가시인데, 정화의 눈빛은 그 가시를 뽑아내고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낭만적 해방의 횃불처럼 타오른다. 영석은 지금, 오래된 겨울의 언약과 눈부시게 다가온 봄의 유혹 사이에서, 존재의 근간마저 흔들리는 통제 불능의 격랑을 견디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두 세계의 경계에 선 허수아비'라 조소했다. 정화의 눈부신 직진 앞에서 자신의 단호한 결심이 얼마나 허망했는지 깨달았다. 자유의지를 외쳤으나, 결국은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낡은 밧줄에 묶여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딛지 못하는 우유부단함. “나는 끝내 수아도, 정화도 온전히 붙잡지 못할, 결정 장애를 앓는 비겁한 그림자일 뿐인가.” 영석의 속삭임은 스스로를 향한 날카로운 채찍이 되어 심장을 후려쳤다.
영석은 이미 자신이 정화의 ‘필연’이라는 맹렬한 기세에 완전히 포획되었음을 깨달았다.
“할머니! 여기 막걸리 한 주전자에 동태찌개 하나 주세요.”
영석은 이 복잡한 상황에서 도피하려는 무의식적인 선택으로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오빠, 막걸리는 내가 따를게. 첫 잔은 ‘현실 직시’로 마셔야지.”
정화는 영석의 투박한 막걸릿잔에 막걸리를 가득 채우며 말했다.
“오빠는 수아 언니의 존재를 밝혔어. 그건 오빠의 솔직한 마음이 오빠의 입을 통해 선언된 거야. 하지만 동시에 오빠는 나를 피해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았지. 이건 오빠의 ‘자유의지’가 아직 완전히 억압되지는 않았다는 신호야.”
정화는 자신과 봉자의 잔도 채우더니, 영석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나는 이 잔이, 오빠가 마시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던 비엔나커피의 ‘휘핑크림’, 즉 해방감보다 더 솔직하다고 생각해. 오빠, 나는 오빠의 ‘책임감’이 아무리 강해도, 내 운명적인 낭만이 오빠를 꿰뚫을 수 있다고 믿어.”
정화는 영석이 막걸리를 마시든 말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기운이 살짝 오른 듯, 그녀의 맑은 눈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오빠, 내가 이 집에 들어서기 전에 뭐라고 했지? ‘싱겁거나 쉬워 보이는 게임’에는 흥미가 없다고 했지? 내가 수원에서 여기까지 온 건, 오빠의 상황이 복잡하다는 걸 이미 알았기 때문이야. 나는 오빠가 가진 ‘밝고 자유로운 가능성’을 세상 밖으로 꺼내 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확신해. 그리고 나는 이 게임에서 질 생각이 추호도 없어.”
그녀는 주전자를 다시 들어 영석의 빈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정복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석은 막걸릿잔을 든 채, 그녀의 눈빛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화는 이미 영석의 내면 깊숙이 침투하여,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지점, 즉 ‘수아에 대한 배신’과 ‘새로운 자아의 발견’이라는 딜레마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 건배! 우리의 ‘복잡하고 재미있는 현실’을 위하여!”
영석이 보기에 정화는 도대체 감추는 것이 전혀 없는 아주 투명한 유리 같았다. 그러나 영석은 그런 여자를 마주했을 때 흥미가 반감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영석은 이러한 자기 내면의 심리가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추격하는 자와 도망치는 자의 패턴’과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패턴은 추격자가 관계의 단절을 느끼고 불안해져 파트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도망치는 자는 이 추격자의 행동을 압박으로 느끼고, 자신의 자율성을 잃는 것이 두려워 더 멀리 도망가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영석은 정화의 직진하는 모습이 마냥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심리 상태가 정말 궁금했다.
“여! 이제는 내가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
태종이가 친구들을 모두 보내고 들어오더니 담배 냄새를 풍기며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그나저나 10월 16일부터 부산과 마산이 심상치 않다는데 혹시 정부가 휴교령이라도 내리는 건 아닌지 몰라.”
세 사람은 무슨 소린지 몰라 태종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시국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지금 연애질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냐.”
태종은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다.
“자, 모두 들어봐. 지금 부산과 마산에서 둑이 터졌다는 말씀이야.”
태종은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더니,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첫째, 이 정권이 ‘유신’이라는 솥뚜껑으로 국민의 입과 귀를 꽉 막아놓고 있어. 정치는 대통령 혼자 다 해 먹고, 야당이고 국회고 숨 쉴 틈이 없어. 특히 김영삼 총재 제명 사건 말이야. 야당 총재를 국회에서 날치기로 쫓아내? 이건 이 나라에 민주주의의 그림자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폭력적인 선언이나 마찬가지야. 부산 시민들한테 김영삼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억눌린 자유의 상징이거든.”
“둘째, 뚜껑을 억지로 막고 있으니, 안에서는 압력이 차오르지 않겠어? 그게 바로 경제 문제라 이 말이야. 중동발 오일 쇼크니 뭐니 해서 물가는 폭등하고, 기업들은 줄줄이 문을 닫고. 특히 부산, 마산처럼 노동집약적인 공장이 많은 곳은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았어. 그런데 정부는 오로지 ‘수출, 수출’만 외치면서 이 가난하고 억눌린 서민들의 고통은 외면하고 있어. 이 경제적 불평등과 서민들의 분노가 둑 안에 가득 찬 물이었다고 봐야 해.”
“그리고 셋째, 그 둑에 금이 가기 시작한 사건이 바로 YH 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이야. 힘없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살기 위해 야당 당사로 찾아갔는데, 경찰이 새벽에 들이닥쳐서 폭력적으로 진압했잖아? 그리고 한 여공이 추락해 죽었어. 이건 국민에게 ‘이 나라는 서민의 눈물은 안중에도 없다’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고, 김영삼 총재 제명의 도화선이 된 거야.”
태종은 막걸리를 비운 영석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었다.
“결국, 정치적 억압이라는 솥뚜껑, 경제적 고통이라는 거대한 물, 그리고 김영삼 제명이라는 결정적인 충격이 합쳐지면서 둑이 터져버린 거야.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더 이상 못 참겠다!’ 하고 일어선 거지. 이건 단순한 소요가 아니라, 10년 넘게 억눌린 국민의 ‘자유의지’가 폭발한 운명적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두눈 부릅뜨고 봐야 해. 이 부마사태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말이야.”
태종은 마지막으로 ‘운명’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정화를 바라보았다. 정화는 태종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영석에게 몸을 돌렸다.
“오빠, 태종 오빠 말이 맞아. 부마 사태는 억눌린 자유가 터져 나온 운명이야. 그런데 오빠는 지금, 오빠 자신의 억눌린 자유를 내게 터뜨릴지 말지를 망설이고 있는 거지? 이 복잡한 시국에서, 오빠는 과연 어떤 운명을 선택할 거야?”
정화는 영석이 막걸릿잔을 들도록 유도하며, 시국의 ‘운명’을 영석 개인의 ‘자유의지’ 선택 문제로 다시 끌고 들어 왔다.
“내가 아까 말했지? 지금 그런 연애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바뀔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순간이라고.”
영석은 태종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저 카사노바로만 알고 있던 태종에게서 지금까지와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빠 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제명을 당한 거야?”
봉자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태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올해 8월, 가발 수출업체인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 폐업 조치에 항의하며 제1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였어. 그러자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가 이들을 찾아가 격려하며 농성을 지지하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어. 그런데 8월 11일 새벽, 이 정권은 경찰력을 투입하여 신민당 당사에 강제로 진입해 농성을 진압했지. 이 과정에서 노동자 1명이 사망하고,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국회의원과 기자들이 폭행당하거나 강제로 끌려 나가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는데, 김영삼 총재는 이 과정에서 경찰에게 폭행당하며 강제로 상도동 자택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었어.”
“표면적인 제명 사유는 딱 하나야. 바로 ‘품위 유지 의무 위반’. 그런데 그 근거가 뭐냐? 김영삼 총재가 1979년 9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 때문이지.”
태종은 막걸릿잔을 들고 손가락으로 공중에 큰따옴표를 그렸다.
“김영삼 총재는 그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를 향해 ‘국민에게서 멀어진 소수의 독재 정부냐,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냐를 미국 정부가 명확하게 선택할 때가 왔다.'고 말했어. 더 나아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서라도 박 대통령에게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가할 것’을 요구했단 말이지.”
“현재의 유신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게 뭐겠어? 반국가적인 매국 행위이자, 정권을 뒤흔들기 위해 외세의 개입을 요청한 중대한 범죄로 둔갑시키는 거지. 그래서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이 인터뷰 내용을 ‘반국가적 언동’으로 규정하고, 10월 4일에 신민당 의원들의 저지를 피해 국회 별실에서 변칙적인 방식으로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어.”
“하지만, 그건 껍데기일 뿐이야. 진짜 이유는 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 첫째,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가 된 후, ‘선명 야당’ 노선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어. 유신 정권에 대한 타협을 일절 거부하고 ‘민주 회복’을 기치로 정면 대결을 선언했지. 특히 앞서 말한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과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정권 입장에서는 이 ‘투사’를 그대로 놔두면 유신 체제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했겠지. 둘째, 제명 직전에 정권은 신민당 내의 반김영삼 세력을 부추겨 법원에 총재 직무 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게 만들었어. 이미 법원의 결정으로 김영삼은 총재 권한을 잠시 잃은 상태였지. 정권은 이 상황을 틈타 아예 싹을 자르려는 의도로 의원직까지 박탈해 야당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려 한 거야. 셋째, 결국 여당은 신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하며 저지하는 상황에서, 국회 경호권까지 발동해서 별실인 146호실에서 단 10여 분 만에 날치기로 제명안을 통과시켜 버렸어. 그 결과가 뭔지 알지?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부마사태’라는 불꽃을 당긴 거지.”
태종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결론적으로 김영삼 총재 제명은 ‘외세 개입 요청’이라는 명분을 쓴 유신 정권의 야당 탄압과 민주 세력 고립 시도이고, 이는 역설적으로 유신 체제 종말의 결정적인 트리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야 이놈들아! 정치 얘기 그만 해. 주변에 경찰들이 쫙 깔렸는데 잡혀가고 싶어?”
태종의 말을 듣고 있었는지 할머니가 꽥 소리를 질렀다.
홍성집은 태종이나 영석이가 학생증이나 손목시계를 맡기고 술을 마시는 단골집이다. 따라서 영석이와 태종은 할머니가 진짜로 그들을 꾸짖는 소리가 아니라, 혹시라도 그들이 경찰에게 잡혀가는 일이 있을까 걱정을 해서 하시는 말씀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영석이나 정화는 지금까지 둘이 나눈 대화가 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에서 시위가 발발했고, 10월 18일에 시위가 마산지역으로 확대되었어. 그리고 10월 20일인 오늘 마산지역에 위수령이 선포되었다는 거야.”
태종이의 말에 나머지 셋은 급격하게 침통해졌다.
“오빠 제가 지나치게 현학적인 말로 오빠를 헷갈리게 한 점 이해해 줘요. 그냥 오빠가 보고 싶었어요.”
정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