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1980년 언저리
제24화 수아의 방문(2)
“아따, 김치찌개 냄새 한번 지랄 맞게 좋네 잉!”
곰소댁은 정희가 ‘영석이 여자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곰소댁의 목소리는 활기가 넘쳤다. 그녀는 방금 일을 마치고 온 듯, 머리에는 수건을 둘렀고 몸에서는 비릿한 생선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풍겼다. 그녀는 익숙하게 정희네 부엌으로 성큼 들어섰다.
“근디 이분은 누구시당가?” 곰소댁은 부엌 바닥에 쪼그려 앉아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는 정희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낯선 수아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희는 곰소댁의 거침없는 등장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까르르 웃으며 자랑스럽게 답했다.
“아이고, 아줌마. 퇴근하셨네? 인사해. 우리 옆집 사는 아줌마야. 그리고 아줌마! 이쪽은 영석이 여자 친구래요.”
정희는 이제 수아에게 말을 놓았다. 수아는 그 편이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곰소댁은 수아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이 동네에 낯선 여인이 영석의 좁고 누추한 방에 들어와 있는 것 자체가 곰소댁에게는 큰 뉴스거리다.
“뭐시여! 영석이 총각 여자 진구?” 곰소댁은 정말 의외라는 듯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방 안에 앉아 있던 영석의 귀에 천둥처럼 꽂혔다. 영석은 자신의 가장 사적인 관계가 동네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이 너무도 불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찾아온 수아의 존재가 너무나 부담스럽고 당황스러운데 곰소댁이나 정희 누나는 이 상황을 즐기는 것만 같아서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숙희도 곰소댁의 흥분에 합세해 수아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엄마! 이 언니 엄청 예쁘지? 영석 오빠 여자 친구래!”
곰소댁은 수아의 얼굴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마치 상품을 감정하듯 솔직하게 말했다.
“아따, 잘생긴 놈이 묵은지 귀신이라더니, 요로코롬 고운 아가씨를 숨겨놓고 그동안 내숭을 떨고 있었단 말이여? 허허 사람 속을 이렇게 몰라쓰까? 그나저나 우리 영석이 복 터졌네. 근디 아가씨, 이런 판자촌까정 어찌코롬 알고 찾아왔당가?”
곰소댁의 악의 없는 솔직함은 수아에게는 환영이었으나, 영석에게는 자신의 가난한 현실을 확성기로 퍼트리는 일과 같았다.
수아는 애써 밝게 웃으며 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삼춘이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요.”
수아가 아까부터 풀이 죽어 있는 영석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 영석의 귀에 꽂힌 게 분명한데도 영석의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근디 여자친구람서 시방 삼춘이라고 허는 것은 뭔 일이당가?"
“옥수동 사는 우리 조카 경숙이 친구래요.”
정희 역시 영석의 굳은 표정을 의식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래서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곰소댁 들으라는 듯 크게 한마디를 했다.
“근디 사는 곳은 어딘디 여까지 왔당가?”
곰소댁은 예쁘고 귀티가 나는 수아가 이런 동네를 찾아온 것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는 태도였다.
“보광동에 살고 있는데 곧 쌍문동으로 이사 갈 거예요”
“한남동 옆에 있는 보광동?”
“네! 맞아요.”
“아따! 멀리서도 왔네. 집에 갈라믄 한참 걸릴 턴디.”
보광동에 사는 아가씨가 이 판자촌까지 찾아온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곰소댁은 또 한마디를 했다.
영석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두면 곰소댁의 성정상 “누가 더 아깝다.”는 식의 솔직한 심정을 말할 것 같았다.
“누나! 밥 다 됐으면 어서 상 차려! 배고파 죽겠는데.”
영석은 부엌을 향해 날이 선 목소리로 외치며, 곰소댁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 했다.
영석이네 판잣집은 곰소댁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장터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아줌마! 오늘은 여기서 같이 식사해요.”
정희는 곰소댁이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녀 역시 영석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치찌개와 조촐한 반찬 몇 가지가 차려진 상이 방 한가운데 놓였다. 좁은 방이지만, 영석, 정희, 수아와 이웃 곰소댁, 숙희까지 총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으니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마치 친척들의 명절 식사처럼 북적이는 분위기였다.
수아는 영석과 정희의 중간에 앉아, 정희가 떠준 김치찌개 한 숟가락을 맛보더니 활짝 웃었다.
“와, 언니! 김치찌개 정말 맛있어요. 깊은 맛이 나요.”
수아의 진심 어린 칭찬에 정희는 수줍게 웃었다.
“에이, 별거 아닌데. 우리 집은 그냥 김치찌개랑 콩나물밥이 전부라.”
“제가 지금까지 먹어 본 김치찌개 중에서 최고예요.”
수아가 영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석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계속해서 수아를 관찰하고 있던 곰소댁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수아를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과 검증의 빛으로 가득했다.
“근디, 아까 보광동 산다고 혔등가? 아가씨 집은 좀 살 만 한가 보네 잉?”
곰소댁은 거두절미하고 아까부터 가장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수아는 당황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네 보광동에 살고 있고. 아빠가 작은 가게를 운영하세요.”
곰소댁은 만족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여그는 어뜨케 알고 찾아왔당가? 서울 사람 중에 이런 동네가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 틴디.”
이 질문은 영석의 가장 민감한 치부를 정확히 찔렀다. 영석은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항상 맛있게 먹던 김치찌개와 밥알이 모래처럼 느껴졌다. 그는 숟가락을 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밥그릇 안만 노려봤다. 그는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것 같았다.
“삼춘이 워낙 연락을 안 하셔서요. 궁금해서 무작정 찾아왔어요. 그런데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삼춘한테 물어보고 찾아올 걸 그랬나 봐요.”
수아는 다시 한번 영석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영석의 침묵이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가난이 죄간디? 돈주머니는 헐거워도 맴주머니가 꽉 찼으믄 그것이 참부자인겨!”
곰소댁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지만 영석의 꽁꽁 얼어 버린 마음은 풀릴 줄 몰랐다.
“언니, 그럼, 언니도 이제 여기서 영석 오빠랑 같이 살 거야? 우리 오빠한테 시집오는 거야?”
수아는 곤란한 듯 미소만 지었고, 정희가 숙희의 등짝을 가볍게 때렸다.
“아따 요 촉새 같은 년이 뭣을 안다고 끼어든다냐?”
곰소댁이 숙희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영석은 쏟아지는 질문과 관심 속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는 곰소댁의 질문 하나하나가 정화와의 짧은 만남과 수아에 대한 죄책감을 건드리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밥 한 숟가락을 간신히 입에 넣었지만, 돌덩이처럼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씹으려 노력하며, 침묵으로 자신의 긴장과 복잡한 심경을 감추려 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영석이 총각 밥 먹는 것이 영 시원찮네? 어디 아픈 것이여?"
곰소댁의 날카로운 시선이 결국 영석에게 꽂혔다.
영석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아뇨, 배가 별로 안 고파서요.”
그의 말은 정화와 술을 마신 후의 죄책감과, 수아에게 가난을 들킨 후의 수치심이 뒤섞여 나온, 가장 비겁하고 불안한 대답이었다.
“엄마 나 만화영화 봐도 돼?”
숙희가 진공관 텔레비전을 누르면서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던 영석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고 ‘치익칙’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식사가 끝나자 수아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정희를 도와 설거지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영석의 싸늘한 침묵이 신경 쓰였고, 더 이상 머물러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언니, 오늘 김치찌개 정말 잘 먹었어요. 얻어먹고만 가서 미안해요.”
수아는 정희에게 공손하게 인사했고, 정희는 수아의 손을 잡았다.
“아이고, 무슨 소리야.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영석이 이놈이 영 성의가 없지?”
정희는 영석을 힐끗 쳐다봤다.
“아따, 아가씨 참 고생 많네. 영석이 총각이 말은 안 혀도 마음은 뜨거운 사람이여.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말어. 조심히 잘 가소.”
곰소댁도 영석의 모습을 보며 뭔가 눈치를 챈 것인지 수아에게 몸을 기울여 귓속말을 했다.
수아는 곰소댁에게 고개를 숙이고, 숙희에게는 “다음에 올 땐 예쁜 인형 사줄게.”라고 속삭였다.
영석은 벌떡 일어나 외투를 챙겨 입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어서 가자.”
그의 목소리에는 의무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혼자 갈 수 있는데.....”
수아가 힘없이 말했다.
“아이고, 뭔 소리여. 이 동네는 밤이 되면 칠흑같이 어두워서 귀신이 옆에 서서 가는디도 모를 판이여.”
귀신이라는 소리에 정희가 흠칫 놀라 곰소댁의 팔을 붙잡았다.
“아냐. 그 정도는 아냐. 영석이가 집까지 바래다줄 거야.”
정희가 안심하라는 듯 다른 한 손으로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오목교 판자촌 골목. 영석과 수아는 나란히 걸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가장 낯설고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곰소댁과 누나의 소란스러운 식사 자리에서 영석이 보였던 방어적인 침묵이 그대로 두 사람 사이에 남아버린 것이다.
영석은 수아에게 가난한 현실을 들켰다는 수치심과, 그 초라한 집에서 정화와의 갈등을 숨겼다는 이중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수아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수아는 영석의 굳게 다문 입술과 푹 숙인 어깨를 보며 안쓰러움과 함께 서운함을 느꼈다. 영석이 자신을 반기지 않은 이유가 자신이 그의 초라한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가 이토록 말 한마디 없이 냉랭한 것에 적잖이 화가 났다.
“삼춘.”
수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응.”
영석은 짧게 대답했다.
“저기… 언니랑 김치찌개 끓이는데, 오빠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겠더라고요. 삼춘이 재수할 때도, 대학 와서도 늘 ‘괜찮다, 괜찮다’ 라고만 했잖아.”
수아의 목소리가 축축했다. 그녀는 영석의 힘든 현실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어.”
영석은 감정을 숨긴 채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괜찮지 않잖아? 그런데 삼춘, 나는 삼춘이 이런 곳에 산다고 실망하거나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아.”
수아는 영석의 팔을 붙잡고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삼춘의 가난이 아니라, 삼춘이 나에게 말을 안 해준 그 마음이 서운해. 나는 삼춘의 뚝심과 미래를 보고 좋아하는 거잖아.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남자가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오늘 삼춘에게 실망했어.”
영석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미안해.”
“여기까지 찾아온 내게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수아는 진짜 화가 난 듯했다. 영석은 적잖이 당황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만 생각했을 뿐 수아가 어떤 감정이었을지를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것 같아서 수아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수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영석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수아의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수치심과 죄책감에 갇혀, 그녀의 방문이 가진 진정한 의미와 그녀가 겪었을 상처를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미안해.”
영석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기계적이지 않았다.
수아는 울먹이며 영석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삼춘은… 늘 혼자만 생각하는 것 같아. 내가 삼춘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여기까지 물어 물어 찾아왔겠어. 난 삼춘이 살고 있는 이 동네와 삼춘의 집에 실망하지 않았어. 그러나 삼춘의 태도에는 엄청난 실망을 했어. 남자답지 않아.”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영석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이 순간만큼은 영석의 머릿속을 맴돌던 정화의 그림자도, 판잣집의 초라함도 모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수아의 눈물과 그녀의 아픔뿐이었다.
영석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수치심, 죄책감, 그리고 비겁함을 벗어던지고 수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따뜻하고 간절한 포옹이었다. 수아의 흐느낌이 그의 어깨에 전해졌다.
영석은 수아의 촉촉한 뺨에 손을 대고, 그녀의 눈물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찾아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찝찔한 눈물 맛이 났다. 그 키스는 단순히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아에게 전하는 사과였고, 영원한 책임에 대한 무언의 맹세였으며,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영석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기쁨의 눈물은 염분대신 포도당이 들어 있어 단맛이 나고, 슬픔의 눈물은 산성 성분이 많아서 신맛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슬픔이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흘리는 눈물은 염분 농도가 높아 가장 전형적인 짭짤하고 쓴 맛, 즉 짭쪼름한 맛이 나며, 단순한 슬픔을 넘어 감정의 혼란, 신체적 피로, 또는 안도감이 섞인 복합적인 감정 상태일 때는 찝찔한 맛이 난다고 했다.
수아는 영석의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눈물에는 이제 분노 대신 감동이 차올랐다. 영석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따뜻함과 진심이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였다.
키스가 끝나자, 수아는 영석의 품에 기댄 채 울먹이며 말했다.
“삼춘… 나 정말 오늘 너무 화가 났는데, 이 순간만은 모든 게 용서가 되네.”
그녀는 영석의 셔츠를 더욱 꼭 쥐었다.
“나는 삼춘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게 됐어, 다시는 괜찮다고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삼춘의 가난도, 힘든 상황도, 나한테는 아무렇지 않아. 오히려 더 많이 안아주고 싶고, 더 많이 도와주고 싶을 뿐이야.”
“삼춘… 내가 그랬잖아. 오빠의 뚝심과 능력이 오빠의 언덕이 될 거고, 그 언덕이 힘들면 내가 언덕이 되어주겠다고. 나는… 나는 삼춘이 어떤 모습이든, 어디에 있든, 삼춘의 가장 든든한 언덕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러니까… 나를 믿어줘.”
수아의 말은 어둠 속을 헤매던 영석에게 가장 밝고 굳건한 등대처럼 다가왔다. 영석에게 그녀는 자신의 모든 불안과 죄책감을 자신의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아야.”
영석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 너한테 실망을 줘서… 내 초라함이 부끄러워서 너한테 제대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어.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너에게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서도, 내 이기심 때문에 너를 힘들게 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영석의 진심 어린 사과에 수아는 흐느낌을 멈추고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알면 됐어, 삼춘. 나 사실… 방금 전까지 삼춘이 계속 그렇게 침묵하고 나를 밀어내면, 그냥 택시 잡아타고 돌아가서 다시는 삼춘 안 보려고 했어.”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말에 영석은 몸이 굳어졌다. 자신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들었는지 깨달았다.
“그런데… 삼춘이 나를 이렇게 안아주니까 용서가 돼.”
수아는 영석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삼춘만 믿어. 삼춘이 무슨 결정을 하든, 뭘 숨기든,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어. 그러니까 이제 약속해 줘. 혼자 감당하려 하지 않겠다고.”
영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수아는 그제야 환한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는 영석의 굳어진 표정을 풀어주려는 듯 그의 손을 잡고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휴! 삼춘만 힘든 거 아냐. 나도 요즘 집에서 힘든 것들이 많아. 삼춘처럼 나를 옥죄는 것들이 많다고.”
수아도 힘든 일이 있다는 데 영석은 또 수아의 마음을 놓쳤다.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에서 전철로 갈아탄 후 용산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보광동에서 내릴 때까지 영석은 수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삼춘 손은 왜 이렇게 항상 따뜻한 거야?”
수아가 영석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대며 말했다.
“울 엄마가 나 어릴 때부터 열이 많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런가?”
“나 삼춘한테 하나 다짐을 받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뭔데?”
“약속해 줄 거야?”
“뭔지를 알아야 약속을 하지.”
“그냥 약속해 줄 수 없어?”
“도대체 뭔데 그래?”
수아는 영석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두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진지함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뭔데?”
영석이 다시 한번 물었다.
“약속해 줄 거야?”
“뭔지를 알아야 약속을 하지.” 영석은 여전히 수아의 가벼운 농담이라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냥 약속해 줄 수 없어?”
수아는 영석의 눈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빛은 아까의 눈물 자국이 무색할 만큼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도대체 뭔데 그래?”
영석은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여전히 '수아가 설마 이상한 부탁을 하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에 머물렀다.
“그냥 약속해 줘. 설마 내가 삼춘한테 죽어달라고 할까 봐서?”
수아의 말에 영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그래. 말해 봐.”
수아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영석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 삼춘이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절대, 절대 한 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줬으면 좋겠어.”
수아의 목소리는 너무나 진지했다.
영석은 당황했다. 설마 수아가 정화와의 일을 아는 것일까 싶기도 했지만, 그럴 일은 전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석은 수아의 다짐을 ‘순진한 여자 친구의 질투’나 ‘오늘 늦은 귀가에 대한 귀여운 경고’ 정도로만 해석했다. 그는 정화와의 일탈은 이미 끝났으며, 앞으로 수아에게 충실할 것이라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있었다.
“하하,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수아를 두고 다른 여자랑 뭘 어떻게 한다고.”
영석은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넘겼다.
“걱정 마. 내가 수아를 두고 딴짓할 사람 아니잖아.”
실제로 영석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아의 표정은 순간 복잡해졌다. 그녀가 원했던 다짐은 ‘영석과의 육체적 결합’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한 ‘결혼 압박 회피’의 약속이었으나, 영석은 그 심각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순진한 약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아는 아쉬움과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저 영석의 팔에 매달리며 웃었다.
“응. 나는 삼춘 믿어. 그러니까 이 약속, 절대 잊으면 안 돼. 내가 나중에 이 약속이 필요할 때가 올지도 모르니까.”
수아는 영석의 따뜻한 손을 다시 한번 꼭 붙잡았다. 영석은 수아의 말이 아직도 ‘연락 잘하겠다.’라는 식의 연인 간의 흔한 다짐이라 생각하며, 그녀의 말속에 숨겨진 절박한 현실과 은밀한 계획을 전혀 몰랐다. 그는 오로지 수아의 손을 굳건히 잡은 채 자신이 수아에게 지키기로 맹세한 책임감에만 몰두하고 있었다.